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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첫째 편>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만큼만 사랑한다.
아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그리움만큼
그가 나를 부를 때
어엉하는 콧소리의
울림만큼
잠자리에서
내 몸을 안고
부비고 떨 때
몸이 조이는 느낌만큼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만큼만 사랑한다.
내 볼에 살짝 대는
딸아이 빰의 온기만큼.
아빠 조심해
걱정해 주는 아들아이
목소리의 질감만큼.
그 이상의 사랑은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것
석가의 것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사랑조차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자존심이었거나
사랑이 아니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비겁이었거나
엿먹이기였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은
완전하며
언제까지나 진실이었다.
풋풋한 생굴을
혀로 눌러 부술 때
나는 나의 미각을 사랑한다.
샤워기 아래서 보는
내 앞가슴
지긋이 잡아보는
나의 그곳.
누가 나를
나처럼 귀하다 할까?
내 양 눈 1.5의 시력과,
종아리 근육,
185밀리 발을 보면
이뻐 죽겠다.
흘러 내린 코피와
깎아서 버리는 손톱에도
아쉬운 작별을 한다.
내가 사랑에 배부를 때 ,
넘쳐나는
내 사랑의 잉여분을
너에게 줄 수도 있으리.
그렇지 못한 지금은
나를 혼자 두어 달라.
내가 나를 만나서
위로하고 사랑하게.
나는 혼자인 때가 차라리 좋다.
나는 나를 몹시도 사랑한다.
<시; 둘째 편>
기사식당에서
장부다리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왔습니다.
동료와 함께요.
좀 더 독특한 것을 먹고 싶었지만.
얻어먹는 처지라서
그냥 먹었어요.
스무 가지 반찬 중에서
입에 맞았던
반찬 순서는요
배추 된장국
상추쌈
배추 무침
고등어 조림
갓김치
게 무침
돼지고기 볶음
미나리무침
묵은지 김치
젓가락도 대지 않은 반찬은
닭발 볶음
한 장 먹어 보고
짜서 실망한 반찬은
생 다시마
뜻밖에 먹을 만 했던 것은
부침개
4000원을 주고 산
백반 한 상에는
어쨌거나
먹을 게 여럿 있었고
먹지 않아도
돈 값을 할 만큼
넉넉한 갯수의
음식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엄마가 차려 준
밥상과는 달랐어요.
우리 아부지
땀 흘려 벌어서,
우리 어매
다듬고 조리고 끓여서
담아서 내 턱밑에 받혀
내 한입 우물우물 먹는 양 보며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은
없었어요.
대신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하는
상냥하긴 해도,
내 눈을 보지도 않는
마른 눈빛만 있었어요.
<수필; 첫째 편>
프랑스 아마추어 테니스 대회 참관기
"풍광이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에서 백년 수령의 우거진 송림 아래 수십 면의 테니스 코트를 누비며 한 주일 동안 테니스만 치면서 지내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아마도 최고의 극성 테니스 매니아일지라도 그런 꿈은 너무 과분해서 감히 꾸지를 못할 것이다. 나도 그런 꿈은 꾸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꿈을 꾸지 않은 그런 일이 어느 날 뜻밖에 내 앞에 벌어졌다."
2005년 8월에 리옹 지역에 어떤 아마추어 테니스 대회가 있었다. 프랑스 전국 단위 아마추어 대회인 나쇼날 컵(National Cup)대회의 지역 예선대회였다. 뜻밖에도 내가 리옹 지역 30/3 등급에서 단식 우승을 하였다. 30/3 등급은 한국으로 치면 중상급 정도, 미국 기준으로 4.0 정도의 수준이다. 본선은 10월 23일부터 일주일간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해변 도시 캡다그드(Cap d’Agde)에서 열렸다. 단식만의 시합이다. 프랑스에서는 단식을 주로 한다.
내 테니스 친구 세드릭이 하우스를 하나 빌려 놓았으니 같이 가지고 애걸복걸하였고, 나도 프랑스 사회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참가하기로 하여 딸아이와 같이 참가하였다.
캡다그드(Cap d’Agde)에서의 프랑스 아마추어 전국대회 경험은 놀라왔다.
이곳은 마르세이으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인구 3천명 정도의 해변 휴양지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선수와 가족 합해서 5,000 명가량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들이 도시를 가득채우고 일 주일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테니스 시합과 관광, 타이치 수련, 골프대회 등의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시간에는 프랑스 여자 프로 선수 라자노와 그 밖의 여러 선수들이 아이들과 같이 공을 치는 행사도 있었고, 브라질 댄스 공연, 가라데 시범도 있었다. 거리마다 테니스 라켓이나 테니스 가방을 맨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내가 보기에, 이 한 주일 동안만은 이 도시는 테니스인만으로 이루어진 테니스 나라, 아니 테니스 천국인 것이었다.
대회 장소는 국제 테니스 센터라고 부르는 곳이었는데 조명이 있는 25면의 실외 코트가 있었고, 원래는 8면 정도의 실내 코트였을 대형 공간은 대회 진행본부와 식당, 매점, 테니스 용품 전시 판매장, 기아(KIA)자동차, 바볼라(Babolat)등의 대회 협찬사들의 전시 코너로 꾸며져 있었다. 테니스장에 인접한 호텔은 이름조차도 “호텔 인터나쇼날 테니스”이고, 또, 그 옆에는 “테니스 빌리지”라는 팬션 단지가 있었다. 그 팬션 단지 안에도 테니스 코트가 20면이 있었다.
나는 테니스 친구 세드릭의 가족과 같이 대회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생 루프 빌라지”라고 하는 팬션 단지에 방 두 개짜리 집을 얻었다. 이 도시에는 팬션 단지가 수도 없이 많았다. 각 팬션단지는 수 십 세대의 스튜디오나 팬션을 이어 붙여 지은 다음 철망과 관목울타리를 둘러서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아마도 여름 휴가철에는 꽤 비싸게 주고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가 있겠거니. 우리가 든 단지는 100 세대 정도의 규모였다. 물이 데워진 야외 수영장이 있으며, 슈퍼마켓, 식당까지 있었다.
세드릭의 양아버지 파트릭이 전처 소생의 5살 아들 케빈과, 7살 딸 말로리를 데리고 왔다. 순진하고 명랑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방 하나를 썼다. 나와 세드릭이 다른 한 방을 차지했다. 세드릭의 14살 된 여동생, 베로닉이 내 딸과 같이 거실에서 잤다. 내 딸은 조용하게 휴가를 보낼 것을 기대하다가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되어서 피곤해 했다.
세드릭 어머니가 예정과 달리 오시지 않아서 유럽식 식탁을 보고 싶었던 내 기대는 깨졌다. 내가 나서서 저녁을 차렸다. 첫째는 내 입맛을 위해, 두 번째는 한국 음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마지막으로는 1주일 간의 집세 380유로(50만원)중 내게 80 유로만 물게 해준 세드릭에게 신세 갚음을 하는 의미였다.
내가 마련한 요리는 새우 야채 볶음, 돼지고기 야채 볶음, 닭 날개 조림(그러나 잘못해서 탕이 되어 버렸음)과 밥이었는데, 세드릭이 배를 두드려 가며 서너 번씩 덜어서 먹어 주었다. 조리를 한 나를 기쁘게 해 주려는 배려가 보였다. 5살 짜리 케빈도 새우 요리를 네 번이나 덜어 먹어서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세드릭의 양아버지 파트릭은 제빵 기술자인데 아마도 체중관리를 위해선지 내 음식에 별로 손을 대지 않고 샐러드와 바게트 빵과 치즈 종류로 간단히 때웠다.
집이 붐벼서 나도 스트레스가 좀 있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 일찍 혼자 해변으로 나가서 산책을 했다. 이 바다가 바로 세계사 시간에 그리스 로마 문명의 터전이라 배웠던 지중해다. 인적이 드문 가을날의 해변의 아침이다. 들리는 것은 파도소리와, 바람이 풀과 나무 잎을 나부끼게 하는 소리뿐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고 일렁이는 파도를 보았다. 맑게 씻긴 조개들을 종류별로 주워 담았다. 나 말고도 개를 데리고, 혹은 혼자서 산책하는 중년이 몇 명 있었다. 선창에서 새우를 500 그람에 2유로 주고 샀다.
선수들은 10대부터 50대 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나 같은 중년은 닳고 닳은 요령으로 승수를 늘려 가려고 하지만 10대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공격 테니스를 구사하면서 테니스의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너무나 신선하게 보였다. 그들의 부모들은 철망 뒤에서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다. 오늘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 우리 아이가 테니스에 집중하고 열정을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노력하다 보면 실력은 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하는 여유로움을 볼 수 있었다. 자기 아이가 지더라도 표정은 담담하였고 승자를 축하해 주고 상대방의 다음 경기에 행운을 빈다는 말을 해 주곤 하였다.
결승까지 모든 경기가 선수들 자율 판정에 의해 진행되었다. 라인 판정에 이견을 보이는 때가 없지는 않았지만 목청을 높여 다투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관중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평상적인 목소리로 각자 자기 주장을 하다가 어떻게든 진행해 나간다. 그 포인트를 다시 하거나 아니면 둘 중 어느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남자 일반부에 무등급(NC) 부터 최고등급까지 17등급, 남자 35세 이상부에 마찬가지로 17등급 여자 일반부에 17등급, 여자 40세 이상부에 17등급 등 모두 68개 등급에, 각 등급별로 30여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그러니까 어림잡아 선수만 2,000여명이다. 선수 치고 혼자 온 사람은 없었다. 다들 가족, 애인, 친구나 클럽 멤버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출전한 등급인 30/3에는 전국에서 32명이 출전했다. 1차 전은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비로 연기되어 월요일 오후 3시에 이루어졌다. 상대는 10대의 소년이었다. 셍 떼띠엔느에서 왔다고 했다. 스트록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넷으로 나갔을 때 매서운 패싱샷을 해 왔다. 어 뜨거라 ! 하고 그 다음부터는 넷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랠리 싸움에서 내가 더 안정되어 있어서 6대3, 6대2로 이겼다.
두 번째 시합은 화요일 오후 두 시에 이웃한 도시 베지에(Besier)에서 있었다. 30분 정도의 거리이고 대회 본부에서 수시로 셔틀버스가 다니지만 내가 운영 본부에 도착하기 15분 전에 떠나고 없었다. 내가 불어가 서툴고 정신이 분산되어서 대회 본부 바로 앞에 붙여둔 셔틀버스 운행시간을 미리 확인해 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내 차를 가져갔기에 10분 늦게나마 도착할 수 있었다.
플라타너스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국도를 드라이브하여 낯선 어느 이국의 도시를 찾아가는 느낌은 다소 드라마틱하기도 하였다. 불안과 설렘과 외로움과 호기심 등이 골고루 버무려진 느낌이었다. 베지에는 해안 평지에 이루어진 작은 항구도시였다.
두 번째 상대도 십대 소년이었다. 릴이라는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워밍업 때는 스트록이 물러 빠져서 나를 안심시키더니 막상 시합에 들어가니 강타에 이어 넷 대쉬를 해 온다. 그의 발리와 스매쉬도 안정되어 있어서 내 장기인 수비를 무력하게 했다. 2대0, 3대1, 4대2로 밀리고 있었다. 맘 속으로 « 2차전에서 탈락하면 너무 아까운데... » 하는 생각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열심히 볼을 걷어 올리되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높게 올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이 통했다. 그의 발리와 스매쉬가 조금씩 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4대4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내가 계속 앞서나가 6대4로 첫 셋을 이겼다. 두 번 째 셋은 6대1로 이겼다. 아마도 첫 셋 후반부터 그는 자기의 거의 위닝샷에 가까운 공조차도 걷어 올리는 나의 끈질긴 수비에 벽을 느끼고 기가 꺾인 것 같았다. 사실은 나도 맘속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수요일 오후 3시에 3차 전 경기를 테니스 빌리지 4번 코트에서 가졌다. 상대는 40세 정도의 아담한 체격으로 파리 남쪽 물랑에서 왔다고 했다. 어린 선수들과 달리 플레이에 안정감이 있었다. 경기 초반, 내가 조심하느라고 안정되게 넘기기만 하는 사이 그는 좀 더 과감한 공격을 해 와서 내가 2대0, 3대1로 뒤졌다. 그러나 내가 더 집중하여 4대4를 만들고 결국은 6대4로 첫 셋을 땄다. 두 번째 셋은 그가 버티는 힘이 줄어서 내가 쉽게 6대0으로 이겼다. 경기 후 그는 "토너먼트가 여러날 계속되니 다들 지쳐서 더 끈질긴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끈질겨서가 아니라 내가 기술이 나아서 이긴 것 아닌가요?" 하고 반문하였지만 겉으로는 "그래요. 많이 지치신 것 같아요." 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
어느 덧 4강에 진출한 것이다. 애초에 기대한 것보다 훨씬 나은 성적이다. 전국에서 예선을 거쳐 모인 선수들이므로 다들 한가락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1차전에 탈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 친구 세드릭은 화요일의 2차전에서 이미 탈락하여 시무룩해졌고, 할 일이 없어서 수영하고 낮잠이나 자고 있었다.
목요일 오전 11시에 준결승이 있었다. 나는 아침 9시부터 코트로 나가서 벽치기를 하며 컨디션을 다듬었다. 그러면서 매 샷을 점검했다. 스트록은 자신 있게 체중을 실어서 스윙을 끝까지 하자. 길게 치자. 잔발을 끊임없이 떼자. 무릎을 한껏 굽히자. 상대의 백핸드를 주로 공격하자. 발리는 볼을 끝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코스를 정하자.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검토를 하고 시합시간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었다. 11시 15분 전에 대회 진행 테이블에 가서 신고를 하고 상대를 만났다. 상대는 좀 까불어 댄다고 할 정도로 활발하고 명랑한, 파리에서 온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그는 첫 게임부터 내 백핸드 쪽으로 숏에 가까운 짧고 약한 볼을 주고 넷으로 들어 왔다. 볼에 힘이 죽어 있고 짧고 백핸드 쪽이라서, 좇아가서 걷어 올리는 내 반구도 힘이 없을 수밖에. 그는 내 반구를 발리나 스매시로 넘기되 패대지 않고 각도만 꺾어서 빈 곳으로 찔러 넣었다. 그는 매 득점마다 팔을 들어 펌프질을 하고 "캄온!" 하는 기합소리를 질러서 속으로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테크닉에서 워낙 밀린다고 판단하니 기가 죽어서 파이팅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만 거듭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당하기만 하면서 내가 첫 셋 5대0으로 지고 있었다. 내가 국면을 전환해 보려고 그의 백으로 치고 넷으로 들어가면 그는 로브를 해 왔고, 그는 내 스매시 코스를 다 읽는 듯 나의 결정구 스매시도 다시 로브를 해오거나 패싱샷을 쳐 왔다. 첫 셋을 6대1로 잃었다.
두 번째 셋은 그가 실수를 좀 해서 내가 4대3으로 앞서가기도 하였으나 거기서 내 서브 게임을 잃어서 4대4가 되고 나머지 게임도 연거푸 잃어서 6대 4로 졌다. 그는 내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 주었다. 속으로 별로 고맙지도 않았지만 그의 활발한 성격을 장점으로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퉁명스럽거나 거만한 것보다는 좋으니까. 그에게 공이 뛰어나다고 칭찬해주고 결승에서 행운을 빈다고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패이스에 말려 시원스럽게 쳐보지 못하고 꼬이는 경기를 하고 만 것이 허망하였다. 그동안 나에게 진 여러 상대방들의 마음도 아마 이랬겠지. 나를 응원하러 왔던 세드릭이 왜 그렇게 못쳤느냐고 했다. 그는 내가 좀 더 파워있게 못친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내 플레이를 꼬이게 만든 상대방의 게임 운영을 세드릭은 아마도 아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드릭은 죽자사자 패대는 스타일이다.
대진표의 반대쪽 박스에서는 리옹 예선 결승에서 나에게 역전패 당하고 눈물을 글썽이던 벤자망이라는 15세 소년이 결승 진출을 했다. 결승은 금요일 오전 11시에 있었다. 나는 나를 이긴 파리 청년의 테크닉에, 세드릭은 벤자망의 견고한 스트록에 1유로씩을 걸었다. 결과는 견고한 스트록의 승리였다. 좌우로 강하게 쳐 오는 벤자망의 스트록에 밀려 파리 청년은 공격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그의 넷 플레이도 벤자망의 정확한 스트록으로 쉽게 구멍이 나는 것이었다. 테니스의 기본은 스트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캡다그드(Cap d’Agde)에서 3승을 하여 준결승 진출을 했으니 참가한 보람을 충분히 누렸다. 3등 상품으로 바볼라 테니스 가방과 시디 플레이어를 받았다. 토요일의 기아 세라토 자동차 2대 경품 추첨을 포기하고 금요일 오후 1시에 리옹으로 향했다.
태어나서 맛 본 그 어느 휴식보다 더 휴식다운 나흘간이었다. 내 나라에도 이러한 공간과 이벤트를 언젠가 기획해 보리라고 다짐하며 밤이 늦어 집에 도착하였다. 뒷자리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던 딸아이가 이제 자기 방에서 편하게 쉬게 된 것은 참 다행이다.
<수필; 둘째 편>
프랑스 오픈 결승 참관기
2004년 6월 4일 토요일, 프랑스 파리, 비 조금 뿌리고 짙게 흐림
지금은 새벽 5시. 여기는 몽파르나스의 한 인터넷 카페다. 몽파르나스는서울로 치면 신촌 같은 곳으로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옅은 청자색으로 물들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아마도 섭씨 14도 정도나 될까. 어젯밤 11시부터 롤랑가로스 테니스 남자 준결승 나달-페더러 편을 쓰고 있는데, 곧 마칠 수 있을 듯해서 버티다가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더 걸려서 마치고 나니 아침 9시 반이 되었다. 인터넷 사용료만 25유로(1유로=1,300원)나 냈다. 밤새 맞은 편 바에 들락날락하면서 생맥주를 세 잔, 커피를 세 잔 먹었으니 그 값도 20유로 정도 된다. 그러나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 아깝지 않다. 글을 끝내고 인터넷 사이트 “테니스리포트”에 올렸다.
호텔로 돌아와서 아침을 청해 먹고 샤워를 했다. 한잠도 못 잤지만 몸은 견딜 만 했다. 롤랑가로스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갔다. 6번과 10번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가서 “뽁 도뙤이으(Porte d'Auteuil)” 역에 내려서 롤랑가로스로 걸어 들어간다. 걸어서 10분이 못되는 거리다.
길거리 양쪽 보도에는 성지를 순례하러 가는 듯 진지한 표정들의 파리 시민들과, 영어, 스페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줄줄이 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다. 암표를 파는 청년이 있다. 값이나 알아보려고 물었더니 센터코트 표가 250유로라고 한다(원래 가격은 58유로). 내가 안사겠다고 했는데도 얼마면 사겠느냐면서 계속 따라 오다가 돌아갔다.
센터코트 표는 당연히 매진이다. 부속코트(Annexe)표를 11유로 주고 사서 들어갔다. 오늘은 요행으로 센터코트 표를 구하기를 바라지 않아야 겠다. 프랑스인들이 자국선수로서는 몇 십 년 만에 결승에 진출한 피에르스에게 기대를 잔뜩 걸고 몰려들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어야 3셋인 여자 경기에서 경기도중 관전을 포기하고 나올 사람도 없을 것이므로, 어제처럼 도중에 나가는 사람에게 표를 얻어 입장할 요행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면에서 보람을 찾기로 했다. 구내의 테니스 박물관(Tenniseum) 구경을 했다.
테니스의 기원, 라코스테와 3명의 남자 선수가 그랜드 슬램과 데이비스컵을 휩쓸던 프랑스 테니스의 전성기인 1920년대 이야기, 야닉 노아의 롤랑가로스 우승으로 다시 의욕에 불을 당기고 있는 현대의 프랑스 테니스, 테니스 라켓 제조 광경,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저장해 놓은 롤랑가로스와 데이비스컵의 중요 순간, 선수 프로필, 테니스 관련 서적, 역대 우승자 사진, 등등이 주요 전시물이었다. 포괄적이고 수준 있는 전시였지만 환상과 매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방명록을 들춰보니, 언뜻 보기에 한국인의 서명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글과 영문으로 소감문을 적어 넣었다.
“지난 한 세기동안 인류에게 행복을 주었던 테니스, 다음 세기 동안에는 한국인도 한 몫을 맡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름 1미터는 될 성싶은 기념 테니스볼 앞에서, 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안내 여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바게트에 소시지와 겨자소스 넣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4.5유로. 겨자 맛이 코가 찡하게 매운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생맥주로 목을 적셨다.
* * *
지금부터가 여자 결승 관전기이다. 그런데 직접 센터코트에서 본 것이 아니라 코트 외벽 스크린을 통해서 보았으므로 현장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자신이 없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여자 결승은 센터코트 동편 앞 데이비스 광장 바닥에 앉아 대형스크린으로 관전했다. 1920년대에 프랑스가 데이비스컵에 연승을 하던 때의 주역 네 명의 남자 선수의 동상과 데이비스컵 모형으로 꾸며진 천 평 정도의 공간이다. 화면은 해상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텔레비전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업, 엘지나 삼성에서 찬조해서 선명한 것으로 교체해도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경기는 비교적 단조로운 패턴으로 흘러갔다. 비교적 짧게 끝나는 랠리와 범실로 엮어져 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피에르스의 연이은 스트로크 범실이었다. 매치 내내, 그는 에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트로크와 싸우고 있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에르스가 어설프게 받아서 루즈하게 넘긴 볼을 에넹이 매섭게 위닝 스트로크로 응징하는 것이었다. 피에르스의 선전을 기다리는 프랑스 관중들이 표정을 굳힌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게임에 하나씩 피에르스의 위닝 샷이 터지면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를 질렀다. “마리!” 하고 헤어지는 연인을 부르듯이 간절히 외치기도 하였다. 피에르스를 응원하는 나도, 경기 흐름의 반전을 목을 매고 기다리다 지쳐서 점점 더 침울하게 되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다 했다. 차라리 비가 와서 중단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중단하고 다시 시작한들, 피에르스가 전략을 바꾸어 국면을 전환시켜 낼 것 같지 않았다. 피에르스는 자신의 전술을 오로지 고집하는 듯 했다.
기다림과 목마름 속에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 났다. 셋 스코어 2 대 0이다(6:1, 6:1).
피에르스는 에넹의 8강 전 상대, 샤라포바와 꼭 같은 전술을 사용하였고 꼭 같은 좌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스라인에 가까이 서서, 빠르게 되받아 치려는 전술 말이다. 베이스 라인에 붙어 서서, 에넹의 빠르게 좌우로 빠지는 공을 받아 내려 하니 그러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받아내더라도 밋밋한 공에 그쳤고 좀 위력 있게 강타를 하려 하면 스트로크 실수가 나왔다. 그에 비해, 에넹은 아예 멀찍이 베이스라인 2.5 미터 뒤에 서서 여유있게 스트로크를 하였다. 서비스 리턴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리턴 하였다. 피에르스는 서브리턴을 할 때, 베이스라인에 바싹 붙어 있거나, 심지어 라인을 밟고 서 있었고, 세컨드 서브는 안으로 점프해 들어가면서 리턴 한다. 에넹의 서브 속도는 아주 빨라서 170 킬로짜리가 많았다. 그 빠른 서브를 베이스 라인을 밟고서 리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피에르스의 높은 능력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리턴했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리턴 공이 타이밍은 빠르지만 클레이 코트에서는 그 효과가 대단치 않았다. 다소 발이 빠른 에넹 같은 이는 그 리턴 볼을 충분히 잡아서 공격할 수 있었다. 여러 번 반복된 전형적인 게임 진행 포맷중의 하나는, 에넹의 강 서브를 피에르스가 좀 불완전하게 리턴하면 그 리턴 볼을 에넹이 포핸드로 잡아서 역크로스 강타를 하는 것이다. 피에르스는 자기 왼 쪽의 텅 빈 코트로 볼이 빠져나가는 것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왜 그런 식으로 성급하고 설익은 리턴을 하고는 역습 당하나요? 꼭 그렇게만 해야 하나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베이스 라인에서 뒤로 많이 물러나서, 스트로크 대결을 한다면, 꼭 이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처럼 승리를 헌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선수의 플레이는 상대방 플레이에 매 순간 영향을 받는다. 상대가 에러 없이 안정된 공을 쳐 오면 나는 당연히 조심이 되고 더욱 포인트를 아껴야만 한다. 반대로, 상대가 수시로 에러를 해 주고 점수를 바쳐 오면, 나는 점수에 여유가 생겨 더욱 더 자신감 있게 마음껏 휘두르게 된다. 에넹도 랠리가 7, 8개 이상 이어지면 에러를 하는 선수다. 그의 컨트롤은 그렇게 좋다 할 수 없다. 그런데 4, 5구 이전에 피에르스가 에러를 해 주니 에넹은 참으로 편한 게임을 했다. 두 번째 셋 중간쯤 언젠가 스크린 자막에 보니 언포스드 에러가 24 대 12라고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피에르스가 두 배의 범실을 하고 있었다. 에넹이 하나 실수하면 하나 더 보태서 2개의 실수로 갚는 꼴이었다. 에넹은 아마도 맘속으로 ‘마리, 너무나 고맙다.’ 하는 말을 수시로 하였을 듯하다.
이런 “빠른 되받아 치기” 전술은 하드 코트나 잔디 코트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을 전술이고, 클레이에서도 움직임이 둔한 상대방에게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이 코트의 베이스 라인 뒤에서 질긴 스트로크를 하는 상대를 만나면 결정적인 취약점을 가진 전술이 될 수가 있다. 제일 먼저, 그러한 빠른 되받아 치기가 수비력이 좋은 상대에게는 결정구가 되지 못한다. 즉 포인트를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상대가 일단 받아넘겨서 스트로크 대결로 양상이 진행되면 베이스라인에 붙어선 포지션은 매우 취약하다. 내 코트의 양 구석으로 길게 오는 볼을 좇아 갈 방도가 없다. 마지막으로, 상대는 충분히 시간을 쓰면서 매 스트로크를 안정되게 치는데 비해 나는 쫓기면서 스트로크 하는 셈이 되므로 아무래도 에러율이 높아질 것이다. 면이 빠른 코트에서는 빠른 공이 가지는 위력만으로 득점이 가능하므로 그런 플레이의 보람이 있지만, 면이 느린 코트에서는 그 보람을 거두기가 어렵다. 내가 보기에, 한 점을 얻는 동안에 세 점을 주는 폭이었다.
나의 전술 평가는 사실은 피에르스의 플레이에 대한 모욕이 될지도 모른다. 인생을 걸고 테니스를 하는 프로들의 플레이에 비해 내 분석은 즉흥적이고 일면적이고 얄팍하다. 그와 그의 팀은 내 분석보다 훨씬 깊고 종합적인 진단을 하고 나서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내 분석이 설사 장난감 유리구슬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피에르스의 게임은-참패한 게임조차도,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값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만 분의 일이라도 내 글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할 것 같다면 나는 이 글을 차라리 지우겠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기보다는 아마도 “재미있는 의견이군요.” 하고 웃어 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보기보다 아량이 있는 여자였다. 이 글 뒤에 나오는, 승부 결정 직후의 그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사실은 이 분석을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매일 코트에서 만나는 내 테니스친구들이다. 시종일관 강한 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조금만 참고, 랠리를 최소한 7, 8 개만 끌어 가 준다면 매 게임마다 아기자기한 재미를 더하게 되고 운동량도 엄청 늘어날 것인데.....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강한 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부드러움에서 나올 것인데.... 자신의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강타로 일관하다가 3, 4구 이내에 넷에 걸치거나 아웃시키는 플레이를 볼 때는, 나는 엑스타시에 이르기 전에 끝나버린 사랑의 행위보다도 더욱 안타깝다.
나는 왜 피에르스의 샷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가. 나는 약자이며 약자가 이기는 게임을 소망한다. 내가 세상살이에서 겪는 약자로서의 좌절감과 고통을 보상받고 더 나은 상승을 약속 받기 위해 그를 응원한다. 내가 내 삶에서 간절히 바라던 것, 몸부림치며 수고했지만 얻지 못한 소망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띄워 보내는 구애의 몸짓이다. 정원이 딸린 고급 맨션을 가질 만한 부자가 못된 것, 회사 내에서 승진하지 못한 것, 시험에 실패한 것,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한 것, 좋은 남편, 부모가 되지 못한 것. 이런 가지가지 좌절과 실패로 지금도 가슴앓이 하면서, 때로 자정 넘은 시간에 벌건 눈으로 창 밖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는 나이다. 난 내가 아끼는 스타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끝내 성공을 쟁취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싶다. 인생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역전은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가능할 것만 같았던 역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열중하던 관중들은 실현되지 않은 소망을 숙제처럼 다시 가슴에 담고 한층 무거워진 다리를 일으켜 세워 스타디움을 나선다. 아 어쩌면 저리 불쌍할까. 내가 다시 일어설 가망이 옅은 것처럼 그도 패배하였구나. 그가 언제 다시 그랜드슬램 결승 무대에 서기나 할까? 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퇴장하는 인파로 북적일 지하철이 어쩐지 짜증나고, 집에 가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가슴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나는 잘 안다. 이 삶의 번거로움을 절대 거역하지 못하리. 테니스는 하나의 드라마이고 공연일 뿐, 인생 자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인생은 그보다 수 만 배의 무게가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어쩌면 주인공이 실패하는 비극영화를 보고 난 듯, 내 에이는 가슴이 이내 아물어질 것을 기다리며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보고 긴 숨을 쉬어 본다.
승부는 결정 났지만, 아직도 시상식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에, 스타디움 출입구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 분이 있었다. 다시 들어갈 거냐고 말을 걸었다. 그는 나에게 다음 경기가 뭐가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 복식이라고 대답하니,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표를 그냥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가다가 돌아서서 책 한 권을 사 달라고 한다. 롤랑가로스 매거진을 8 유로에 사서 주었다. 대가를 치르는 편이 나도 맘이 편하다. 얼른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상식 장면이라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피에르스는 내가 본 가장 다정스러운 패배자였다. 승부가 끝나자마자 넷으로 달려가서는 에넹을 양팔로 감싸 안고 다정스럽게 양볼에 비주(프랑스 사람들이 뺨에 하는 입맞춤 인사)를 하고 무어라 말을 건넸다. 아마도 '축하한다. 당신 참으로 훌륭한 게임을 했다.' 이런 내용이었겠지. 그의 성숙한 태도는 모범적이다, 하지만 인간미가 덜 있다. 좀 내숭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참으로 자연스럽게도 그는 벤치에 앉아서 지긋이 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뱃속에서 복 바쳐 오르는 것으로 보이는 눈물이었다. 조신하게 앉아서 자신의 슬픔에 한동안 몸을 맡기도 있었다. 그렇지, 슬픈 게 당연하지. 당신 같은 1류 프로선수도 좌절하고 낙심하는구나. 그래, 나 혼자만 인생에 절망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매일 좌절하고 낙담하듯이 피에르스도 오늘은 불쌍한 한 인간으로 저 벤치에 앉아 있다.
이윽고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피에르스는 눈물을 닦고 나서는 다시 우아한 미소를 띄고 대회의 여러 관계자들에 대해 일일이 감사의 말을 한다. 볼 보이, 심판, 관중, 자기 스탶 들 등등. 한 5분은 되리 만치 감사의 말을 길게 하니 관중들도 웃음을 터뜨린다. 불어로 말하고 나서 영어로도 덧붙인다. 그는 캐나다 태생이니 영어가 모국어일 것이다. 그를 우승을 노리는 투사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울음과 웃음과 사람에 대한 정을 풍부히 가진, 인간미 있는 사람임을 알겠다. 내가 피에르스의 팬이 되길 잘했구나. 그의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저런 여성스러움과 사람냄새가 있다니!
이어서 벌어진 남자 복식 경기를 보고 나서 7시쯤 센터코트를 나섰다. 3시간 전에, 환호하는 피에르스의 팬들로 가득 차 있던 데이비스 광장이 고즈넉하다. 가랑비에 젖은 몇 장의 낙엽이 아스팔트를 장식하고 있다. 드높던 기대와 가슴 졸임은 실재하지 않은 환상이었던 양, 흔적조차 없다. 우리의 소망과 탄식은 빗물에도 씻겨 내리나보다.
어제 저녁은 호텔비가 좀 비쌌다(68 유로). 오늘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안내 여성에게 싼 호텔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했다. 종이에 적어 준대로 버스를 두 번 타고 쁠라스 드 끌리시(Place de Clichy)로 갔다. 그곳의 한 중국음식점에 들어가니 뷔페가 11 유로란다. 싸다. 식은 음식은 손님이 알아서 렌지에 데워 먹게 되어있었다. 스프랑, 고기요리랑, 밥이랑 해서 4인분은 먹은 듯하다. 배가 남산만 해 졌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샌드위치 두 개만 공급한 내 위장에게 약간의 보상을 한 셈이다. 호텔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다양한 취향의 바와 레스토랑이 있었다. 중년 손님들로 가득 찬 바, 인도식 바, 터키식 찻집, 그리스식 찻집, 등등. 여러 개성이 어우러져 돌아가는 파리의 삶을 증거하고 있었다. 아침용 바게트와 캔 맥주를 사서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25유로(3만 5천원)짜리로 그야말로 실비 호텔이다. 화장실은 층마다 하나가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낡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12시가 되어 자려고 누웠는데, 호텔 주인 할아버지가 쓰는 로비 층의 방에서 한 시간 여 동안 부부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냄비를 신경질적으로 긁는 소리와 두드리듯 하는 도마질 소리, 냉장고를 "쾅"하고 닫는 소리가 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나이가 많이 든 저 부부에게 저렇게 까지 상대방을 공격해야만 할 일이 있구나. 이게 우리 삶인가. 인생은 과연 축복이라는 게 사실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래, 이게 구질구질하지만 버릴 수 없는 우리 인생이지. 연꽃은 시궁 내 나는 썩은 흙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지. 이런 인생 속에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그 어떤 날을 위해 진흙 구덩이 같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거야!"
파리의 한 지붕 밑에서 동양의 한 중년 남자가 꿈과 회의로 엮어진 잠에 빠져들었다.
<동시; 첫째 편>
우리 아빠
아빠가 회사 가면서
돈 많이 벌어 올께!
집에 돌아온 아빠
앞으로 다 잘 될 거야!
아빠는 돈이 많이 필요한가 봐
난 아빠 무릎만이 필요한데
아빠는 내가 좋대지
나도 아빠가 젤 좋아
필요한 게 뭐냐 아빤 묻지
난 문방구 캐릭터 인형이면 돼
꼭 더 말하라면
우리 같이 물놀이 했으면....
아빠는 내가 더 잘 됐으면 하나봐
난 지금도 괜찮은데....
내가 아빠를 위해줄 방법을 모르겠어
아빠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그 맘 속은 알 수가 없어
뭐든 널 위해서라고만 하거든
네가 잘되기만 바란다고 하거든
내가 잘되는 날이 언제일까?
아빠는 그 때 얼마나 행복해질까?
<동시; 둘째 편>
봄 비
오늘 봄비가 오네요.
봄비가 차가와요.
찬비 맞으면 옷 젖고
찬비 맞으면 감기 들어요.
봄은 따뜻할 줄 알았는데
봄은 찬바람 많이 불어요.
봄은 맑을 줄 알았는데
봄은 먼지바람 불어요.
봄은 꽃피고 새 울 줄 알았는데
꽃은 안 피고 새 보이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봄은 멀고
내가 바라지 않던 이상한 봄이 내 주위에 머무네요.
내가 바라는 봄은 언제 오나요?
그 봄이 빨리 오길 바래요.
그 봄은 오래갔으면 좋겠어요.
그 봄에 내 친구들이 즐거워하면 좋겠어요.
학습지도 학원도 안하고 쉬면 좋겠어요.
학원 선생님들도 푹 쉬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 얼굴이 활짝 펴져서
목련꽃처럼 웃으면 좋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우리 같이 봄나들이 가서
종일 웃고 놀고도 힘이 남아서
집에 와서도 지치지 않고
노래하고 농담하고
잠자리에서 꼭 껴안고
다독거리며
잠들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