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 / 시오노나나미
제 1장 유년시절 (BC 100~94, 카이사르 탄생~6세)
당시의 배경
▶로마의 일곱언덕: 제 6대 임금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건설할여 세르비우스 성벽이라고도 한다
•고지대- 개인용, 고급주택들, 중세로나 교화의 궁전, 현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까지
•저지대- 대사수 시민들의 주거 지역, 밀집, 상당히 넓은 지역에 분포
▶수부라지구
•서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넓게 펼쳐진 저지대중 도심과 가장 가깝고 포로로마 노와 거의 맞닿은 지역, 유명한곳
•서민층 동네, 온갖 장사꾼, 길거리행상, 대저택 하인 노예, 모두 섞인 활기찬 지역
•카이사르는 수부라 태생, 37세에 최고 제사장에 뽑혀 관저로 이사 갈 때까지의 삶터
집안배경과 환경
▶원로원 계급: 선조 몇 대 전부터 집정관, 원로원 출신 귀족 집안들
▶신참자 계급: 족보를 따질 수는 없고 당대부터 이름을 날린 사람들
•마리우스- 지방출신, 집정관7번 당선
•키케로- 변호사로 입신하여 개척한 인물
▶술라-로마 명문 출신의 코르넬리우스 씨족이나 그가 활약하기 이전 로마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몰락한 귀족
▶율리우스 카이사르: 명문귀족이나 인물 배출이 드물었고 재산도 많지 않아 경제적 빈곤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아닌 수부라에 산다
▶BC 1세기의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로서 이주자들의 수용문제로 항상 고민
▶세르비우스 성벽의 면적-5km², 빈곤층 수용은 건물을 고층화하여 4,5층 임대 공동주택
▶주상 공동주택: 당시 서민들의 주택 형태. 집주인의 처소와 임대점포가 한 건물.
▶별장: 농업국가 백성의 전통, 습관으로 농업생신기지, 올리브유, 포도주, 치즈 과일생산, 보통서민가능
제 2장소년시절 (BC93~84, 카이사르 7세~16세)
교육: 6,6세부터 자녀교육 시작, 일반가정은 학원보냄. 귀족집안은 여자, 노예도 주인집 자제와 같이 교육. 그리스인 가정교사 높은 대우, 카이사를 집안 형편상 갈리아인 교사 채용으로 라틴어, 그리스어 문법수학, 체육부분 이론과 실기 확실히 구분, 소년시절부터 신체단련, 무술 철저히.
당시의 배경
▶마리우스가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민회에서 집정관이자 오리엔트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한 술라의 결정을 뒤집게 되자, 술라는 오리엔트 병력 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 제압하여 쿠테타 성공, 민중파 지도자들 사형.도운 자들 문책한다는 법률까지 성립시킨다. →카이사르 12세
▶술라가 오리엔트로 떠난 후 집정관 킨나는 멀리 도망간 마리우스 명예 회복시키는 법안 성립하자
또 다른 집정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 발동, 망명중인 마리우스가 귀국하여 킨나와 함께 앙갚음으로 5일 만에 원로원 50명 살해, 기사계급 천 명살해, 집정관 옥타비우스 살해, 마리우스의 인척관계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살해, 그의 동생도 살해→카이사르 13세
▶충격적 사건의 연속, 마리우스 후계자 자처하는 킨나의 독재 치하에서 아버지 사망으로 카이사르는 가장이 됨→카이사르 16세
▶킨나 독재에 불만 많은 원로원파를 잠재우기 위해, 원로원들의 지지받던 고모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형을 사죄하는 암묵적 표시로 조카인 젊은 카이사르를 사위 삼음. 서민층의 확고한 지지에 원로원파의 호의 노린 꼼수, 정략결혼.→카이사르 16세
제 3장청년시절 (BC83~70, 카이사르 17세~30세)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언행이 분명, 책임감확실, 역사적으로는 무명 집안이나, 귀족적인 사람, 지휘한 모든 전투 승리. 신뢰감, 자존감 높은 인물
▶오리엔트 원정성공
▶킨나의 ‘민중파’와 술라의 ‘원로원파’ 두 계층간의 계급투쟁은 2년동안 격전, 술라의 압승
▶술라의 민중파 소탕작전, 반대파 색출, 카이사르도 살생부에 포함되었으나 측근들, 여사제까지 18세 카이사르 구명 요청하자, 킨나의 딸과 이혼 조건으로 살려줌
망명, 귀국
▶ 이혼을 거부하고 망명, 아이아 속주 총독인 미누키우스의 진영에 입대지원. 하급 막료로 로마 패권에 반발하는 레스보스 섬과의 공방전에 참여. 첫 군사경험.
▶22세: 해적에 맞서는 킬리키아 총독 세리빌리우스 휘하로 옮긴 때 술라사망→제대요청→4년만에 로마행
▶23세: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계속 실패. 술라의 명령 거부한 젊은이라는 위험 부담으로 최고학부 로도스 섬으로 유학 선택.
▶24세: 유학도중 해적만나 스스로 몸값 높이고 자신을 중요 인물로 만듦
해적들 상대로 거만, 자유로운 생활하다 자유의 몸이 된 후 모두 사형→ 대학생활시작
▶로마의 속주 미티니아에 외삼촌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부임하자 미련없이 대학 떠나 그곳으로 갔으나 비티니아 동쪽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이 비티니아로 쳐들어와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도망치자 갈 곳 없는 그때에, 제사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 듣고 귀국한다.
▶31세: 회계 감사관으로서 국가 요직에 선출된다
제 4장 장년시절 (BC69~61, 카이사르 31세~39세)
▶정계에 진출 전 카이사르 부채가 11만명 이상 병력의 1년 유지되는 거금에 해당될 만큼 많은 상태.
▶속주통치의 경제적 분야 담당→ 회계감사관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작전 완전 성공- 팍스 로마나 확립
▶37세 최고 제사장(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 계급 중 가장 높은 지위) 으로 뽑힘.
▶‘원로원최종권고’의 비합법성을 폭로해 원로원 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그들에게서 빼앗으려는 속셈.
※ ‘원로원최종권고’ : 원로원의 막강한 무기로서 반역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부여하는 것.
▶카탈리나 역모사건
가문은 좋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생활수준 위해 빚 많고 현실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전쟁 후 농민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한 술라의 퇴역병들을 모아 쿠테타를 일으키려 한 사건,
그러나 키케로의 변론에 지고 무산되어 버림.
※ 카탈리나?
술라의 민중파 숙청을 진두지휘한 사람 중 1인.
장로로서의 재능은 높으나 무자비한 명령실행자. 포용력 없고 세 번의 집정관 선출 모두 무산.
▶최고 제사장으로서, 법무관으로서의 집안의 금남제사가 열리는 날,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 후처 폼페이아를 짝사랑하여 몰래 침입한 사건발생. 로마 종교계의 최고 책임자 관저에서의 신에 대한 모독, 직무태만이라는 반대파의 주장에 카이사르는 이혼하여 위기 잠재운다.
▶원로원의원 ⅓의 아내들을 카이사르에게 도둑맞았다 할 정도로 여인들이 카이사르를 좋아한다.
▶여자들의 관계 원만, 오래 유지, 보기드문 재능의 소유자.
▶직접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도 많고 다른 사람에게 진 부채의 지불 보증도 서준 ‘대형채권자’인
당시 재산이 국가 예산의 절반수준을 가진 부호 크라수스에게서 경제적 지원받아 유지되었다.
제 5장 중년시절 (BC60~49, 카이사르 40세~50세)
당시의 배경
▶조숙한 군사 천재로서 20대부터 화려한 갈채, 칭찬에 익숙한 폼페이우스의 화려한 귀환 조건에 원로원 파는 동의하지 않는다.
▶카이사르가 집정관 후보 등록을 위해 개선식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에 원로원 파는 거부한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세 번째 개선식과 두 번째 집정관의 기회이고
카이사르에게는 개선식도 집정관도 처음의 기회,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후보를 등록한다.
▶폼페이우스가 옛 부하들 동원하여 카이사르 당선 돕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어 폼페이우스의 오리엔트 재편성안 승인 협약을 조건으로 서로 공조한다.
▶품페이우스와의 불평등 관계를 균형잡힌 힘의 균형을 위해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이른바 ‘삼두정치’
를 성립한다. (3인의 밀약은 비밀유지). 이는 서로의 이익을 위한 동맹관계를 만든다.
▶40세의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다수표로 집정관 당선. 삼두정치로써 자신은 집정관에 당선되고 원로원에 맞서는 강력한 동반자를 얻게 되면서, 동시에 키케로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도록 포커페이스로도 손을 쓴다.
※ 삼두정치는 국가 개혁의 새 질서 확립의 의미가 있고 원로원 주도의 로마 공화정은 삼두정치의 출현으로 무너지게 된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된 후, 급진파로서 로마 전통의 파괴자라는 인상을 없애기 위해서
①군 통수권 정무를 엄격히 지키고
②정무를 보지 않을 때는 공권력 상징인 권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③집정관 통달, 즉 원로원의 의사록을 공개해서 원로원이 가지던 특권 하나를 없애 버리며
④100여 가지의 로마 공직자 행동강령과 세제의 공정성을 강조한 ‘율리우스 레테르토리’
(율리우스 판례법, 공직자윤리법)을 만들어 로마 국가가 존속하는 동안 계속 효력을 갖게 하였다.
▶농지법
그라쿠스 형제 이후 숙원의 법안인 농지 개혁법인 율리우스 농지법을 성립시키려 하나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사수하려는 원로원 파들의 반대에 카이사르는 포로로마노 광장의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카토를 굴복,피신토록하고, 크라수스로 하여금 찬성을 받고 폼페이우스를 통해서는 모든 항목의 찬반을 묻고 이 법안 실시 이후에 책임자로까지 맡아주기를 공개하여 이 법이 반체제운동의 결과가 아닌 여당과 야당이 협찬한 정책으로 만든다
▶갈리아 총독
집정관이 임기를 마친 후 총독으로 부임할 속주를 원로원에서 결정하던 것을 카이사르는 ‘속주통치권에 관한 바티니우스법’을 원로원파의 막강한 반대에 대항하여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중심으로 가결시킨다.
출처 코이행복 201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