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가는 날
流水 이민호
“목욕가자.”
아이는 목욕가자는 말에 시큰둥해져 내 눈치만 보고 있다가 목욕하고 자장면 사 준다는 말에 금 새 표정이 환해지며 앞장을 선다. 내가 어릴 적엔 초등학교 이 학년 때 까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대중목욕탕에 갔었다.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집에 샤워 시설을 갖춘 욕실이 없었던 까닭에 열흘에 한 번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동네목욕탕으로 목욕하러 가는 것이 월 중 행사로 정해져 있었다. 입구에서 간혹 몇 살이냐는 목욕탕 주인의 물음에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어머니 대답에 나는 여탕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온탕에서 몸을 불리고 나와 한창 몸을 씻고 있을 때, 중년의 아주머니가 앞도 가리지 않은 채 탕 안으로 들어 왔다.
“엄마, 저 아줌마 저기에 머리카락이 무지하게 많아요.”
내가 아주머니의 중요한 부분에 무성히 나 있는 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어머니는 조용히 하라며 내 등을 냅다 사정없이 후려치며 입을 막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가 바닥에 뒹굴며 울음을 터트리자 목욕탕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내 비명소리에 놀라 다 큰 사내아이를 여탕에 데려 왔다며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어머니는 몸을 다 씻지도 못한 채 나를 데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나왔다. 그날 이후 난 어머니를 따라 여탕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목욕 가자."
"내일 가면 안 돼요?"
"오늘은 왜?"
"그냥요, 내일 가요, 아빠!"
"그럼, 아빠 혼자 간다."
"그러세요."
"그래? 이제부터 너 데리고 안 다닌다."
"진짜예요?"
"그래, 다음부터 엄마하고 같이 가라."
"그럼, 목욕하고 자장면 사 줄 거예요?"
"아빠는 자장면 먹기 싫은데."
"그럼, 안 갈래요."
"정말이지? 엄마하고 여탕에 가든지 알아서 해라."
목욕을 마치고 중국집 앞을 그냥 치나 쳐 오자
눈치만 보고 뒤따라오던 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빠는 짬뽕 먹으면 되잖아요!”
-(목욕 1) 전문
남자는 누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아이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이 소박한 꿈일 것이다. 손이 귀한 집안에 셋 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부족한 것 없이 내 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모두 다 내 마음대로 하며 자랐다. 그런 나였기에 자식도 내 마음대로 되리라 생각했지만 자식을 갖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주위의 친구들은 다들 아들 한 둘씩은 있었지만 난 딸만 하나 둔 채 자나 깨나 늘 마음속으로 아들을 소원했다.
동네에서나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빠와 아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아들을 오매불망하던 내게 아내는 결혼 한 지 8년 만에 귀한 아들을 안겨주었다. 내 나이 사십이 넘어 꿈에도 그리던 사내아이를 낳은 날 하늘을 날 것 같았던 그때의 그 심정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내가 대중목욕탕에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 아내는 아이가 아직 어려 위험하다며 나를 극구 말렸다. 난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비로소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목욕을 다녀 온 아내는 문득 나에게 다음부터는 아이를 데리고 가도 좋다고 했다. 후일, 아내가 내게 털어놓는 말에 내가 어릴 적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저녁을 먹다 말고 웃음보가 터져 한참동안 배를 잡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여느 때와 같이 아이를 목욕탕에 데리고 간 아내는 물을 좋아하는 아이를 대야에 물을 담아 놀게 하고 몸을 씻고 있을 때,
“와! 커다. 궁둥이, 찌찌도 커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중년여인의 따가운 눈초리에 얼굴도 못 들고 있다가 목욕탕을 빠져 나왔다고 했다.
옛날 우리 집에는 편백나무로 된 둥근 목욕통이 있었다. 부엌 뒷문 한편에 놓아둔 그 목욕통은 어른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아버지의 전용 욕조였다.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대중목욕탕이 처음 생기자 목욕탕에서 옴이라는 피부병에 걸려 한동안 고생을 하셨다. 요즘처럼 샤워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목욕탕에서 온탕에서 몸을 불리고 난 뒤, 탕 가운데 있는 둥근 물통을 두고 빙 둘러앉아 대야로 물을 퍼서 몸을 씻고 돌아온 그날 밤, 온몸이 가렵고 긁은 데마다 물집이 생겨 오랫동안 고생을 하시고 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대중목욕탕에는 가지 않으셨다.
평소 자주 목욕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유난히 깔끔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한 겨울에도 사흘이 멀다 하고 목욕을 하셨다. 고집이 세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무언無言의 복종으로 참고 사셨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목욕하는 날은 팔에 온 힘을 모아 아버지 몸을 씻기셨고 아버지가 고통에 신음하시는 것을 보며 아버지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쏙 빼 닮아 뼈대가 굵고 팔 힘이 좋아 우리 형제들도 어머니에게 등을 밀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설을 쇠기 위해 고향집으로 갔을 때, 먼동이 터오기 전 이른 새벽에 목욕가자는 시어머니 말에 말없이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아내는 목욕을 하고 등이 쓰라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시어머니에게 등을 맡긴 아내는 시어머니가 때 타월로 힘껏 미는 아픔에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돌아와 벌겋게 부어 오른 등을 내게 보이며 아픔을 호소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내는 두 번 다시 어머니와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우리 동네
마음씨 좋고
인사성 밝은
목욕탕 집 아저씨
언제나 목욕탕 입구에 서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반갑게 맞아주네
우리 동네
그 목욕탕에 한 번 가 본 사람은
물 좋고
친절한 아저씨에게 반해
단골이 되고 말아
우리 아이
걸음마 배우자마자
목욕탕 처음 갔을 때
허 허,
뉘 집 아들인지 참 잘 생겼다,
나중 큰 인물 되겠다, 하시며
정답게 손잡아 주시던
목욕탕 집 아저씨
우리 아이 자라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허 허,
네가 걸음마 배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초등학교에 들어가다니
고맙다,
고맙다,
잘 커줘서.
자기 손자 마냥
먹을 것 손에 꼭 쥐어 주시며
기뻐하셨네
이제 훌쩍 자라
중학생이 된 아이보고
허 허,
참으로 네가 많이 컸구나.
세월 참 빠르다.
널 보니 내 나이 먹는 것을
모르고 살았구나.
고맙다,
고맙다,
잘 자라줘서.
먼발치에서도
정겨운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우리 동네 목욕탕 집 아저씨
-[우리 동네 목욕탕 집 아저씨]전문
내가 지금 사는 동네에 이사 오고 십 수년째 단골인 목욕탕 집 아저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 앞을 지나칠 때나 목욕을 갈 때나 항상 목욕탕 입구에 서서 저만치에서 오는 나를 보고 큰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넨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는 “일학년, 일학년, 어서오너라.” 하시다가 아이가 한 학년씩 높아지면 “이학년, 삼학년.” 하고 부르셨다.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가 중학생이 된 걸 보고 “아이고, 세월 참 빠르다. 초등학교 일학년, 일학년 하고 불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니가 벌써 중학생이 되다니 참으로 세월 빠르다.” 하고 기뻐하는 아저씨의 미소 띤 얼굴 뒤에는 정情이 듬뿍 담겨있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오고 난후 주변에 건물들이 새로 많이 들어서고 최신식 사우나 시설을 갖춘 찜질방과 목욕탕들이 생겨났지만 굳이 동네 목욕탕만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인정 많고 인사성 밝은 목욕탕 주인아저씨 때문이기도 하다.
목욕을 하러 가는 날엔 종종 고집을 부리던 아이는 이제 목욕 가방을 챙겨 먼저 앞장서서 나를 재촉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자장면도 모 방송 프로에서 저 질 기름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는 자장면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는다. 어느 새 훌쩍 자라 중학생이 된 아이는 제법 팔 힘이 세져 힘껏 내 등을 밀어주며 나와 함께 목욕 다니는 것을 즐거워한다.
어릴 적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목욕탕에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들과 함께 주말이면 목욕을 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이제 키도 몸도 많이 자란 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주위에서 잘난 아들을 두었다며 부러운 눈길을 보낼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다. 친구들은 며느리 본다. 손자를 본다. 하면서 행복한 말들을 많이 하지만 앞으로 십몇 년 후엔 나도 손자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12.06.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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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민호(李珉浩) 시인/수필가/소설가. 경남 통영 출생. 호는, 流水, 道陽, 東湖 李煥. 월간 문학세계 수필 부문 신인 문학상. 월간 모던 포엠 수필 부문 신인 문학상. 월간 문학광장 시 부문 신인 문학상. 반년간지 문예 감성 편집이사. 문예 감성 문인협회 총무이사. 남강 문우 회 운영위원. (사)세계문인협회 정회원. 모던 포엠 세계 작가 회 회원. 다시 올 문학 회원. 한국영상문학협회 회원. 시집[사랑은그리움외로움기다림의시작입니다]. 공저시집[다섯 갈래의 길]. [언어의 사원을 꿈꾸며]. 단편 소설[사랑과 슬픔]. [배반의 장미] 외 다수의 동인지 참여.

첫댓글 그 시절의 목욕탕 ..그랬지요 다들 공감할겁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안병남
잘 지내시지요. 지난 가을 진주에서 뵙고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다시 뵈올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무더워지는 날씨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배건너 육거리에서 역전 파출소 가는 길에 있던 목욕탕집 생각이 나는군요.
그 집 어머님은 우ㅡ리 어머님과 계꾼. 나보다 년상이던 그 집 큰누님도 미인,
년하이던 영희도 미인이었는데.
제가 중학에 다닗 때 목욕탕에서 동생과 저도 옴이 올라 한동안 고생을 했답니다. 그때 온갖 약초를 다 발라봐도 낮지를 않아 아버지 친구 분이 구해주신 수은을 바르기도 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무지의 소치로 웃음이 납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유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은하목욕탕 주인 아들이 정인수 로 나의 초딩 동창인데 세상 버린지 꽤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