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헌(四靈軒)의 考證
의흥시장 내에 2층 건물로서 四靈軒(사령헌)이란 헌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그 건물울 사령각(四靈閣)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알고있다
6. 25동난때 소실되고 없으나 우리는 이 건물이 어떻게 건립되고
어떻게 운영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고 1940년대까지 하층 2간은
동사(洞舍.동회관)로 사용하든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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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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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神靈(신렬)한 동물을 우리 고장의 守護神(수호신)으로 삼아 제각(齊閣)을
새우고 지역의 無事泰平(무사태평)을 기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령(四靈)이란?
전설상의 네 가지 신령(神靈)한 동물. 용(龍), 봉황(鳳凰), 기린(麒麟),
거북(龜)을 말하는데 의흥을 주심으로 아래와 같은 지명이 있기에
그 신빙성을 짐작 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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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아(龍牙)마을 : 고로면 학성2리 속칭 용애
2. 인각(麟角) : 고로 인각사 부근. 인각(麟角)마을.
3. 귀산(龜山) : 의흥 읍내리 앞산 거북산.또는 장미산(長尾山)
4. 봉미(鳳尾) : 의흥.이지1리(배일) 마을앞 학덤이 장미산에서 길게 뻗은
봉황의 꼬리 끝 부분이라 고도하고
우보면 봉산리(鳳山)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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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곳의 지명을 사령(四靈)의 수호신으로 묘신 제각(齊閣) 인데
자금 군위군내 에서는 찾아 볼수있는 문헌은 군위 마을誌에서 약간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증(考證)을 한다는 것은 어릴때 허물어저 가는 그 건물을 본 기억과
나이 많은 분들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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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즈음 지역민들은 이 사령각을 복원 해야 된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의흥이 옛날보다 점점 쇄퇴 해 지고 발전이 않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현감이 계신곳으로 훌륭한 인재 배출과 재력가들이 많이 있어
인근에서는 의흥이 대단 했다는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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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속담에 "잘되면 자기탓이고 못되면 조상탓" 이라는 말과 같이 지역의
수호신(守護神)을 다시 崇拜(숭배)해 보자는 의견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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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도 절실 하다고 생각 된다.
이 문제는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군정에. 반영시켜 성사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고증인 : 심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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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헌(四靈軒)에 대한 추억담.[1].....(읍내리.김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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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이 코 흘리게 시절이였다..쌀전 근처 수양버들 늘어지고 프라타나스 고목이
우뚝서서 그 깊은 그늘을 만들고 수양버들 밑 말다갈(말 신)신기는 틀과 다갈밖는
손동수 노인 말발굽 지지는 노랑내와 못박는 망치 소리 .. 그집 마당에는 5마력 원동기
(톡티방아)로 정미소 역할을 했고 이 정미소에 흰쌀 쏟아지면 한줌 훔쳐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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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양 버들 욱어 늘어지고 프라타나스 자라던 자리가 의흥 동사(사령헌)이다.
그 때는 이것이 사령헌 인지 몰랐고 그냥 옛날 여기에서 동사로 모이든 곳이라 “동사”라고만
불렀다. 그 당시 드물든 목조2층 건물이며 2층은 여름날 논매기 일꾼들의 낮잠자는 곳이며
어른들의 잡담 하며 졸던 곳이다..그만큼 시원해서 도랑가(안보) 동사와 가까운 곳이
우리집이라 눈에 선하게 기억이 되고 거기에 살던 면면도 상세히 기억이 되는것이 신기 하구나.
권x윤. 이x춘. 이x식. 그리고 이북에서 넘어오신 두 가구 이 두가구는 동사 모퉁이에 흙집을
짓고 살았으며 처지가 이북에서 와서 객지 인지라 품팔이와 약초 케기로 생계를 꾸리는 모습을
봤지. 학교(초등학교) 갈 무렵이면 권x윤 형을 불러서 함께 가고 어쩌다 그 방을 들어서면
산적으로 구운 개상어... 탐스럽고 살림살이 단순 정갈한 모습을 볼수 있었다.
약초를 케고 장사를 하고 노동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였지만 얼굴에는 근심의 자욱을 볼수
없었다..가난한 가운데 누리는 평안함이 보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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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사(사령헌)2층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東으로는 작은 고부자 집(高慶壽씨댁) 수십칸
기와집과 안대문 바같대문 그리고 또 배x락 선배 솟을대문 높은 수십칸 기와집
그리고 큰 고부자집(高x찬)내 웅장한 기와집들이 코앞이고 西쪽은 일본순사 집(河x천)선배내 집.
고로집. 회나무집.들이 코앞인듯 보였으며..
멀리 北쪽은 지서와 용덤. 골안.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南쪽은 안보도랑이 뱀 몸통
같이 흐르고 먹당마을과 남천방이 보였다. 그리고 의흥읍내 1구 구장(동장)은
금구장님. 2구 구장님은 박구장님.이셨다. 의흥읍내는 타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따라서
자존심 대단하고 고집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여서..하는 말이 있었다.
의흥 읍내 구장 하는것이 군위군수 하는것 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라고..ㅎㅎㅎㅎ
얼마나 그 일이 어려웠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
그레도 의흥읍내의 전반적인 모습은 속은 복잡할 터이지만 겉은 평온하고 복이 넘치고 인정이
남천방 물처럼 흐르는 복지의 모습 이였다.
외지 사람들은 의흥읍내를 천하의 길지라고 하며 하는말이 마을을 중심으로 물이 흐르는
안보 도랑을 부러워 한다고 했다. 이 동사의 날아갈듯 날렵한 처마와 목제로 만든 이층 오르는
계단은 낡아서 삐걱데고 수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인데 난대 없이 6.25 전쟁이 터지고 말았지.
그 수양버들 아레를 달리며 숨박꼭질 하고 프라타나스 나무그늘 아래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고
목적없이 동사 2층을 오르내리던 추억이 눈물나게 그립다.
*
모두가 아시는 데로 고달픈 보리고개 먹다 먹다 먹을 것이 없어 술찌거기. 등게떡.
송기 벗겨 먹고. 삐삐 뽑아먹고. 참꽃 따먹고. 찔레순 꺾어 먹기도 하던 그 날들지..
넘쳐나던 거렁뱅이(거지). 문둥이. 각설이. 까맣게 그을린 바가지 옆구리에 가슴에
배 앞에 안고 들고 하며 끼때 마다 찾아드는 밥 좀주소 걸뱅이 외침 들리면 식은 밥
뜨신밥. 죽이라도 조금씩 덜어서 내민 바가지 민망치 않게 했고..각설이 장타령
댓가는 돈냥이 아니면 탁배기. 국밥 이였다.
문둥이가 밥 동냥을 와도 그릇을 채워주던 인심이 였지. 먹거리 없어 부황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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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부부 배고파 부등켜 안고 울던 시절이 였지만 겉은 멀쩡한 복지로 꾸미며 산 사람들이
의흥 사람들이다..그러니 겉 다르게 속은 당골차고 앙칼지고 서로를 경계 하던 사람들..
그러나 그 중에도 순수한 사람도 많았으니 의흥사회가 굴러 간것 아닌가 싶다. 또 다른 가정을
하자면 아무레도 6.25 전 빨갱이 색출 문제로 시골사람 잡아다가 매 타작 하던 지서가 읍내에
있고 그곳을 기웃데던 가족들의 한과 아픔이 작용한 듯도 하고 6.25 후 피난길에서 돌아와
부역자 색출 문제로 지금의 농협 자리에 지서가 설치되고 피난 안간 사람들의 매타작을 당하고..
장미산 꼭대기 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나고.. 고로 골짝 공비가 나타나서 총질을 해 데고
토벌나간 유순경이 총맞아 순직 하고 지서 안 주임은 복숭씨에 총맞아 절뚝였으며 이를 토벌하러
파견된 32사단 병력이 의흥의 집집 마다 방마다 주둔 하고 주야로 죽어나가고 죽이고 했고
우리선배 정x관 선배는 인민군 에게 잡혀 갔다가 돌아 오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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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무렵 오케스트라 같은 한밤 고요를 깨는 총소리 땅콩 땅콩 땅콩 총소리
드르륵 기관총 소리 쾅 쾅 박격포 소리 얼마남은 초가에 다시 불이 붙고 군인밥 하던
아낙은 파편에 맞아 굴신 할수 없어 그 불속에서 사람 살리소...소리 애처럽고
날랜 성북 경찰병력은 자취 없이 후퇴 하고 지키는 이 아무도 없었다.
공비 습격 그날 우리 아버지는 겁이나서 도망 간다는 것이 갈곳이 없어 x순이네 디딜
방앗간에 멍석을 덮어 쓰고 숨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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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6.25 라는 전쟁과 그 전에 일제의 수탈과 공비라는 괴물들 군인이라는 사람들
이들의 여러 행태의 모양들이 각인되어 의흥 인심은 이를 닮아 의심이 많아진 것이지..
그레도 대중적인 인심은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이어와서 굶어 초근목피로 살아 왔을 망정
굶어 죽은이 없는 마을이 된 이유는 남모르는 도움들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최소한 이지만
살아갈 꺼리가 재공된 것이 의흥 인심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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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동사(사령헌)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령헌 건제 할적 그 전후 사정이 말해 진다.문둥이
어린애 잡아 먹는다는 이야기가 실화나 되는것 처럼..엮어데고 문둥이가 아이 잡아 먹을려고
수수대 벗겨서 하얀 속살을 엿이라 속이고 엿 주마 이리온 뀌여서 잡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동사가 있던 시절을 살아 왔다.
그런 동사였는데 6.25 전쟁이후 자취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시장이 되었고..
그 날아갈듯 크고 기름끼 흐르던 기와집(부자집)들도 옛 영화의 기억만 안은체 모조리 사라지고
高x찬 내 기와집만 오동나무와 함께 옛 영화의 그늘을 덮어 쓰고 있지.. 생각하면 짧은 삶이
였지만 지금 기억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연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급속도로 변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 아닌가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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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디까지가 종점 인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몰라..이러면서 지금도 우리는 살아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 현실을 산다는 우리 늙은 이들은 그야말로 어질 어질 하다.
동사가(사령헌) 자취없이 사라지듯이 언젠가 우리 삶도 끝이 나고 자취마져 기억의 후면이
될 날이 올것이다..그날 까지는 어쩌든지 몸 편할. 마음 편할 도리를 찾아 보자..
그 코 흘리게 시절 늘어진 수양버들과 거창한 푸라타나스 지키던 포근한 솟을 대문 삐걱 소리
내고 들어앉은 목조2층 2칸 동사(사령헌)과 말 구루마 의흥 장날을 누비던 그 시절은 지난
세월이다. 동사(사령헌)에서 놀던 나도 늙어서 옛 사람이 되어간다..무상한것 인생이다.
아무리 무상하고 허무하고 뭐뭐 해도 살아있는 동안은 귀중한 생명이요
가진 생각들은 귀한 것이다..나는 이 지구에 하나 뿐인 존제며 나와 같은 나는 지구에
존제 하지 않는다. 그레서 나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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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 하자. 나를 박대 하지 말자.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 이기에 남과 바꿀 수 없다.
사령헌은 사라지고 없어도 그 모시던 사령의 정신으로 고향을 가꾸어 보자.
거리가 멀어. 마음이 멀어. 물질이 멀어. 어찌보면 모두가 핑개일 수도 있는것.
손발이 못 미치고 물질이 바닥이면 마음 만이라도 어떤 표현의 글로라도
의흥을 후세에 각인 시키고 그 기본정신인 사령의 정신을 자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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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인각. 귀산. 봉미...사령을 닮아 본다는 것이 현대에는 어려울것 같은 과제 일 것이나.
우리가 하지 않으면 후세는 영원히 알지 못할 일. 이 일이 생활의 활력이 되고 자존심이
되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장죽 긴 담뱃대 물지 않는 시절이요 그 시절 인심은 아니지만 걸배이(걸인) 밥 덜어주고
문둥이도 밥주며 각설이도 대우하던 그런 인심 그런 인간다움(나눔 정신) 을 우리는 이어왔고
우리가 이어갈 아름다운 인간을 향하는것 이것이 보시(布施)요 구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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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헌(四靈軒)에 대한 추억담.[2]...(읍내리.김진수)
더듬어 보면 그때가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나 싫지는 아니한걸 보니 추억이란 아름다움의
가치가 있는가보다. 인생 팔십(傘壽)가될때 까지 한 울타리에 은거하는 처소는 서너차래
바뀌었나 싶다. 골목길 역시 변동 변화를 거듭하며 옛 모습이 생각 나는것은 감정의 동물
인간이기에 두뇌에다 펼쳐보는가...그리운 과거의 자연이여 어떻게 보관할수 있다면
더더욱 소중한 역사 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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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幼年)시절 확실하게 말하기는 자신이 없으나 마을골목 한편에 통나무 기둥에 이층
난간에는 고급스러운 조각으로 난간이 사방을 감돌아 있었고 처마는 부연을 하여
네모서리가 하늘을 치솟는 듯한 청기와 건물 정면삼간 측면두간 정면에는 四靈閣인지
四靈軒인지 가운데 정면 석가래와 도리간에 희미하게 현판이 있었는 생각이 희미하다.
한국동란 무렵 골목 개구쟁이 시절 이층에 올라가 동족으로 보면 주재소(파출소)건물 역시
한옥으로 통나무 기둥에 청기와 건물이 바가지를 업어 놓은것 같은 초가지붕 너머 보였고
초등학교 교사가 길게 언덕에 보였고. 남쪽으로는 가깝게 裵00댁 역시 청기와 건물이
솟을 대문을 갖추어 천석지기 부자집 속칭 대문집 바로손에 잡힐듯 高00댁이 토기와
건물이 사랑채. 안채.고방채.솟을대문.작은대문을 구비하였고. 안보(內洑)건너
고경수(高慶壽)씨 같은 부자가 있어 사비로 남천방을 막아 탑들을 홍수 안전지대로 만든
만석지기 부자댁이 웅장한 자태를 하고 버티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한국동란을 면하고 을시년스럽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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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보면 고목나무 사이로 역시 한옥건물인 면사무소 건물 전에 우체국 청기와
건물이 보였고 좌측으로 금융조합 신식 건물이 버티고 있었으나 동란시 공비들이
습격하여 불에 타버렸다.
서남쪽앤 남천방 끝자락에 수서리(냉수정)능금나무 밭이 위천 넘어 가지골 배리마을이
눈앞에 닿을듯이 펼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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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란으로 일대 모두가 잿더미가 되어 이제는 철제건물이 전통시장으로 바뀌어
바닥에는 콘크리로 덮어져 있어 신발에 흙이 뭍지 아니하나. 그 옛날 초가집 사이에
골목길에 구슬치기.자치기.숨바꼭질 등등 놀이하든 그시절이 자꾸만 되새겨 떠 오른다.
이제 옛문화제를 복원하는 차원으로 사령헌(四靈軒)을 복원하여 보존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거북산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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