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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김혜순
비
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 (비)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 (비)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 (비)
마구 뚫는다 (비)
그를 떠밀면 떠밀수록 그는 나를 둘러싸고 오히려 나를 결박한다 (비)
내 심장의 화면에 투명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비)
글자들 위에 글자들이 또 새겨진다 (비)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비)
글자들이 이어져 어떤 파장을 그린다 (비)
새겨진다 (비)
하느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비?)
못 알아듣겠어요 (비)
이 전깃줄은 물이잖아요? (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그곳 1 김혜순
그곳 1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
엮어져 대못에 걸리는
그곳,
두 뺨에 두 눈에 두 허벅지에
마구 떨어지는 말발길처럼
스토리와 테마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
그곳,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끄고 숨죽였는데
나만 홀로
불켠 조그만 상자처럼
환한
그곳,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그곳 2 김혜순
그곳 2
채찍으로 내리치지 않아도 나는
발가벗긴다
발가벗긴 내 위로
물이 내린다.
안개가 쏟아진다.
이슬이 맺힌다.
다음―아버지들이 나온다
나와서 내 몸 밖에 커튼을 친다
비단처럼 보드라운! 그러나 강철 커튼!
솜처럼 푹신한! 그러나 이불보다 더 두꺼운!
다음―말씀의 채찍으로 내리친다
다음―잉크를 먹인다
몸통 가득 잉크가 차올라온다.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맞고
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
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 만다
수세기 전에도 했던
비밀의 그 예언을.
몸 전체에 불길을 매단 채.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기다림에 관하여 김혜순
기다림에 관하여
나의 딸아이 망원경 사달라고 하도 졸라서, 내가 단호하게 안 돼 돈 없어 했더니 내 딸이 나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안 부를 거야 아줌마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 그럼 이제 할머니라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다시 좋아 진짜 증조할머니라고 부를 거야 그래 다시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야 이제 진짜 웅녀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위가 아파서 마늘은 못 먹지만 할 수 없지 뭐 그랬더니 이번엔 진짜야 하등 동물이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거 말고 별이라고 불러줘 그 모든 할머니의 엄마는 별이니까 했더니 망원경으로 엄마는 안보여 엄마는 내 별이 아니란 말이야 엉엉 운다
학교의 소설가 선생님과 부소산성 거닌다
선생님 낮에는 왜 별이 안보이지요
여기가 너무 밝아서 그렇지요
선생님 낮에 별이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어둡겠지요
선생님이 부서진 기왓장 하나 주우시며
백제 때 기와일까요 환하지요 하신다
잠든 시체에서 요 위로 구더기들이 기어 나온다
구더기들이 내 눈꺼풀 위까지 올라온다
돌아누울 때 그의 말 들린다
아프지 말고 기다려요
기다리란 그 말에 모든 구더기들 날아 오른다
수백 마리 파리떼가 잠든 시체 주위를
윙윙거린다
너무 가까운 은하수처럼 기다려요 기다려요
파란 소리들이 잠 못 든 시체를 감싸고 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납작납작 김혜순
납작납작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눈동자 속 김혜순
눈동자 속
누군가 내 눈거풀 속 한없는 바닷속으로
한 삽 두 삽 모래를 퍼
가라앉힌 다음
눈꺼풀을 닫고 가면
바닷속에는 물이 산발치에서 산봉우리로 흐르네
비늘 돋친 새들이 산 깊이로
깊이로 날으네
깊은 곳이 높아지고
높은 곳이 낮아지네
그곳에 밤이 오면 내 죽은 할머니들이
우리들 발밑에 찬찬히 등불을 밝히고 가네
구름은 두 발 아래 맴돌고
사람들은 바닥에 창을 매다네
아버지는 바람 속에 알을 낳고 어머니들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새끼를 기르네
그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산맥을 길러
육지를 세우고 달을 퍼올리네
내 한없는 바닷속 그 깊은 곳에는 참 이상한
거꾸로 된 세상이 늘 깊어 있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담배를 피우는 시체 김혜순
담배를 피우는 시체
어디서 접시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그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죽은 여자의 전신이 망가진 기계처럼 흩어졌다.
꺼어먼 뼈 사이로 검은 독충들이 기어 나왔다.
내가 한 마리 독충을 들고 웃는다.
혹은 말을 걸어 보고 싶다.
내 진술은 여기서부터 더듬기 시작
바, 방에는 검은 독충들이 더, 듬, 으, 며 흩어지고
어리고 섬찌ㅅ한 금을 긋는다.
내가 죽은 여자의 입술을 주워서 담배를 물려 준다.
그러다가 이내 뺏아가고 다시 물려 준다.
불이 우는 것 같다. 어디서 복숭아 냄새가 난다.
시(詩)속에 사닥다리라는 말을 넣고 싶다.
사닥다리를 든 내가 계단에서 서성거린다.
창문이 열리고 흰 스카프를 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걸려 있다.
아, 아직도 접시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도솔가 김혜순
도솔가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 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 달라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딸을 낳던 날의 기억 김혜순
딸을 낳던 날의 기억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 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묵시록의 사기사 김혜순
묵시록(黙示錄)의 사기사(四騎士)
□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冕旒冠)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묵시록 6 : 1~ 2)
병사들은 오지 않는다
대신 안개 군단이 온다
안개는 와서 창문을 지우고
두께를 알 수 없는 벽을 지우고
안개는 경계를 먹어치운다
한 대의 시내버스가 힘차게 가고 있을 때
안개는 차체를 먹어치운다
바퀴를 먹어치우고 나의 눈빛도 먹어치운다
─내가 달려가는 시내버스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달려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 걸까
안개는 빌딩을 먹어치우고
안개는 아스팔트를 먹어치우고
안개는 한강교의 교각들을 먹어치우고
먹어치우고 안개는 안개를 게운다
여섯 명의 어린이가 줄넘기를 시작했을 때
새악씨 들어오고
……새악씨 지워지고
남비뚜껑 들어오고
……남비뚜껑 지워지고
두부장수 들어오고
……두부장수 지워지고
꼬마 들어오고
꼬마야 꼬마야 침을 뱉어라
꼬마야 꼬마야 별을 세어라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가위바위보!
……뱉은 침이 간 데 없고
……세던 별이 간 데 없고
……부르던 노래 잦아들고
……내민 가위가 잘려지고
여섯 명의 어린이가 줄넘기를 끝냈을 때
안개는 운동장을 먹어치우고
땅을 지우고 하늘을 지우고
하늘을 달력처럼 말아쥐고 떠나려는 자,
게 섰거라 !
땅을 보자기처럼 싸들고 떠나려는 자,
게 섰거라 !
□ 2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묵시록 6 : 3~4)
구름을 타고
안개 병사들이 온다
나팔 소리 삘랄라
울릴 적마다
나팔 속에서
병사들이 쏟아진다
─나팔 부는 자, 그 누구인가
소리 뒤에 몸 감추고
내 일생의 말을 모두
지워 버리는 자, 그 누구인가
안개 병사들이
보자기를 털 듯
땅의 네 귀를 틀어쥐고
우리를 털어낼 때
갑자기 산맥들이 공중에
튀어오르고
바다가 거대한 대포를 쏘며
항진해 올 때
탕! 탕!
손들엇!
이것은 옛말
내 칼을 받아랏!
이것은 더욱 옛말
아무도 총 쏘지 않아도
모두 쓰러진다
자던 잠 더 자고 싶어
옆으로 쓰러진다
강물은 핏물이 되어 흐르고
태양도 지워지려 하는 듯
─공중에 나는 영혼들이여
부리를 세우고
저기 저 쓰러진 네 육체를
배 부르도록 쪼아먹어라
□ 3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묵시록 6 : 5)
정복자들이 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정복된 것을 안다
정복자들은 오지 않는다
대신 안개 군단이 온다
이슬 먹고 이슬 게우는
안개 군단이 온다
이슬 상처를 기르고
이슬 벼를 거두는
굶주린 안개 군단이 온다
오늘 밥상엔 이슬 국과
이슬 밥과 이슬 김치와
─너희에게 가죽 허리띠와
이슬을 내리노니
위장을 졸라매고
이슬을 마시라
내가 너희에게
안개를 내리노니
영원히 배고픔에 처하노라
하늘과 땅이 사라진 자리에
안개 이불을 덮고 안개 요를 깔고
우리가 잠들면서, 서로의 가슴을 더듬으며
배고픈 사랑을 꿈꿀 때
너와 나의 입술과 입술 사이로
너와 나의 난자와 정자 사이로
슬며시 안개 이슬 한 방울이 끼어든다
보라,
이윽고 내가 달과 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아기를 낳고 있지 않은가
보라,
이윽고 내 자궁 속에서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저 이슬 포도송이들을, 쉴 새 없는 안개를
보라,
내가 잉태하여 딸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슬이라 하리라
□ 4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묵시록 6 : 7~8)
확실한 하늘이 사라지고
확실한 땅이 사라지고
조용히 안개의 도시가 썩고 있을 때
바람난 여자의 자궁처럼
문드러지고 있을 때
느닷없이 도시 전역에서
불끈불끈 솟는 옻나무
내 전신을 타고 오르며
팔을 내뻗는 옻나무 가지들이여
전신에 꽃피는
찬란한 옻의 꽃들이여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던
질긴 나의 육체여
물레를 돌리듯
하염없이
풀어져 나와
발밑에 드러눕는
실낱 같은 나의 뼈들이
안개의 장막을 짜고 있도다
역사 속에서 뛰쳐나온 영혼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며
꽃핀 내 소뇌 대뇌를
쪼아댈 때
그리고 말없이, 부드러운
나의 정복자들이
피고름나는 나의 종기를 애무할 때
별나무에서 별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떨어지듯
나의 육신을
벗어나
저
심
연
으
로
아아 나의 두개골인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밤이 낮을 끌고 간다 김혜순
밤이 낮을 끌고 간다
밤이 낮을 끌고 간다
아침이 새초롬히, 소녀처럼 끌려 가고
한낮이 햇살 양산을 빙그르르,
다음, 저녁이 아련한 소복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잠옷을 벗고 어둠을 한 세숫대야 씻어낸 사람들이
또 시작이야 아침을 먹고
밤새 널어 놓은 신발을 신고
뛰자 뛰자 집을 나서지만
늘 출발한다고 말하지만
등 뒤엔 언제나 검은 파이프를 문 밤
밤이 낮을 끌고 간다
한낮을 지나 저녁을 지나 술집을 지나
잠자리에 몸을 쾅 눕힐 때까지
밤이 나를 끌고 간다
날마다 낮이 짧아진다
살아볼수록 낮이 짧아진다
매일매일의 밥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키스가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노동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시신을 먹고
밤은 배부른 둥근 자석 지구처럼
둥그래 검은 배가 날마다 불러온다
간혹 역사를 읽고 동상을 세우지만
책 속에서 메마르게 떨어지던 낡은 이름
끌려간 한낮은 다시 보이지 않고
오늘 저녁이 또 바삐 끌려간다
우리들의 음화, 문학과지성사, 1990
부산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김혜순
부산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 1
보러가자. 정확한 시간은 몰라. 내가 어떻게 지들이 언제 그러고 있는지 알겠어? 바다와 달, 지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야. 우린 그냥 지들이 그러는 동안에 갈라진 바다 사이로 하섬 가면 되는 거야. 생각해봐. 장화를 빌려 신고 갈라진 바닷속을 걷는 거야. 불도 없는 섬을 향해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거야. 그리고, 또 다음날 보름달이 바다를 다 마셔 버리면 우리는 또 그 섬을 나오면 되는 거야. 원불교 섬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 갈래?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
□ 2
최소한 베개를 안으면 아프진 않을 텐데
없는 너를 안고 우리는 하섬 간다
징그러워 징그러워
갈망으로 뭉그러진 몸뚱어리인가
보라 군청 주황별들이 떨어져 여는
불가사리의 길을 따라
우리는 하섬 간다
발 밑에서 별 터지는 소리
가슴까지 튀어 오른다
저기 저 돌아보면 하섬도 없고 뭍도 없는데
보이지 않는 달의 손가락이 푸른 바다의 치마를 끌고 어디로 갔는지
내 몸 속에 엉킨 온갖 것들이
물 없는 푸른 바다 깊이 한없이 녹아 내린다
□ 3
우리는 별의 어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구상 모든 별들은 별의 어떤 부분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별의 어떤 속성은 저렇게 태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들기도 합니다.*
□ 4
흑성동 원불교 회관 지나다보면 하섬 가는 길 떠오른다. 가랑이 사이로 달이 떠선, 바다를 데리고 앞서 가버리고. 하섬 가는 길 열리던. 검푸른 하늘, 별들이 징그러운 징검다리 길을 놓던. 아아 나 모두 녹아내려 아무것도 하섬에 부리지 못했던 그 푸른 물 속 길.
* 이영자의 전화
** KBS 1, 지구촌 다큐멘터리, 우주의 신비, 1992.5.29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블라인드 쳐진 방 1 김혜순
블라인드 쳐진 방 1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왼쪽 페이지 상단에 볼펜으로 점을
하나 찍고 그 못에 벗은 옷을 갖다 건다
나 혼자만 드나들던 옷이 거기 걸려 있다
그곳으로부터 금을 그어 나와 오른쪽
페이지에 닿게 하고 또 거기에 무엇을 걸까
머리가 빠진 모자가 바람도 안 부는데
책장 앞에서 흔들거린다
또,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걸쳐 있는
마룻바닥에 알 수 없는 동그란 점을 하나 찍어 본다
그 점이 거기 있으므로 왠지 빈 방에 구멍 뚫린 듯하다
바늘 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흔들리고
오른쪽 페이지 하단 쪽으로 커피가 쏟아진다
블라인드 쳐진 방이 뜨겁게 젖는다
벽 위에서 뜨거운 커피가 줄줄 쏟아져 내려오다
내 머리칼을 다 적신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블라인드 쳐진 방 2 김혜순
블라인드 쳐진 방 2
형광등 불빛을 받은 어항 여덟이 긴 나무 탁자 둘레를 빙 둘러싸고 놓여 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항들이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한다
난 크리스탈이야 한 어항의 빛이 여덟 갈래로 흩어진다 이 토론에서 그는 언제나 주도적이다
의자 뒤에 붙은 등받이, 그 등받이 높이 매달린 어항
내 바로 앞 어항의 붕어 두 마리는 붉게 충혈돼 있다
그러나 그 붕어의 눈동자 둘은 흰 재 앉은 듯 흐릿하다
늦게 도착한 어항이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흰 재 앉은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내 다시 반쯤 감겨진다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편 쪽 등받이 앞에서
무료한 손이 나와 파란 연필로 탁자를 탁탁 친다
그러다 그 어항에서 붕어 두 마리가 떨어진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나만 그 비린내에 몸서리치나
붕어 두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헤엄을 멈춘다
내 어항의 붕어 두 마리도 그곳쯤에서 멈춘다 둘의 시선이 탁자의 중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을 더듬고 있다
몸을 떠난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물이 없어요 퍼드덕거리다 이내 잠잠하다
휘발성 붕어! 두 사람의 시선이 황급히 거두어진다
토론의 진행자가 잠시 침을 삼키는 사이 안경 속의 붕어를 빛내며 한 어항이 빳빳해진다 그 어항이 외친다
그는 그 상황에서 왜 미리 자살하지 않았을까요 낡은 트렁크처럼 목숨을 질질 끌고 그 스페인 국경 산중까지 가야만 했을까요 나 같으면 미리 죽어 버렸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의 어항을 돌린다 어쩌다 붕어 네 마리가 마주친다
잠시 후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쪽 등받이 앞에서 파란 연필을 놓은 오른손이 올라와 어항의 밑바닥을 받친다
기울어진 어항의 물이 자칫 쏟아질 것만 같다
검은 머리칼 다발이 출렁 하고, 안경이 콧등까지 미끄러진다
어항의 뺨 위로 보이지 않는 두 줄기 물이 흘러 내린다
붕어 두 마리 감겨지고 물 새는 어항이 더 숙여진다 위태하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블라인드 쳐진 방 3 김혜순
블라인드 쳐진 방 3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던지자 방안 가득 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문 뒤에서 나를 데려다준 승강기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릴 뿐 바람도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기 아직도 펼쳐져 있는 하얀 이불 능선 속에서 찬 기운이 뭉클 올라옵니다 일시에 몸에서 열이 다 달아납니다 모두 흰눈 뿐입니다 형광등 불을 켜자 흡사 냉장고 속 같습니다 몸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솟아오릅니다 비닐 종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습니다 한 발자국 내딛자 얼음 바람이 가슴 속까지 들어옵니다 방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찬바람 풀무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콧속에 성에가 낍니다 온몸이 그을려 급기야는 뻣뻣해진 황소 같은 저 검은 소파까지 몇만 킬로? 발이 떼어지지 않습니다 주저앉아서 방바닥을 만져봅니다 그 동안 얼마나 눈이 온 걸가? 바닥은 너무 차갑게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허파도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몸 속에서 얼어붙은 허파를 날카로운 칼로 쓰윽 그어보는가봅니다 딱딱한 돌 속에서 숨을 길어올리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눈을 감습니다 눈거풀 내려오는 소리가 창문을 쾅 닫는 소리보다 크게 들립니다 얼음 벽이 다가오는 걸까요? 얼음 벽에 걸린 손목도 점점 얼어붙습니다 누군가 내게 얼음 조끼를 입혀 놓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숨쉴 수 없게 되었을 때 감은 눈 속으로, 얼음 위를 번지며 녹는 물처럼 그대가 들어옵니다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에 들어온 그대는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멀리 있는 그대가 내게로 보낸 것입니까? 눈쌓인 바닥이 갑자기 솜처럼 푸근해집니다 잠들면 죽는다 내 안의 누군가 나를 흔들어대지만 얼음 눈꺼풀 너무 뜨겁습니다 감은 몸 속 방 안이 더 뜨거워지려 합니다 가방을 베고 얼음 능선 위에 모로 드러눕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블라인드 쳐진 방 4 김혜순
블라인드 쳐진 방 4
나는 자리를 뜹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하루 종일 한 폭의 그림 사이로 한마디 말이 떠다닙니다 싱싱한 창에 불같이 뜨거운 뺨을 문지르고 싶습니다 싸늘한 바다였습니다 바닷속에는 더 싸늘한 우물이 깊었습니다 그 우물 곁에 낮은 집들이 잠들어 깊은 물 밖, 밤하늘로 잠꼬대를 송출중이었습니다 싸늘한 나무들이 파도에 몸을 떨었습니다 얼음 같이 찬 우물에 몸을 던지고싶었습니다 인적 없는 골목길, 그 골목길에 어두운 피가 돌돌돌 흘렀습니다……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낮은 집들마다 높은 안테나가 매달렸습니다 안테나 끝은 바닷물을 넘었을까? 그 보이지 않는 안테나 끝에서……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나는 꺼풀이요 그대는 심장입니다 아무것도 담아두려 하지 않는 주머니, 심장이 쿵쿵 뜁니다 꺼풀 속에서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지요?……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의자 두 개, 하루 종일 내가 번갈아 앉습니다 블라인드 쳐진 방안, 내 모든 핏길이 그리로 뛰어들지만, 아무것도 담아놓지 않은 길 한 뭉치, 심장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빵의 대화 김혜순
빵의 대화
커튼을 치고 우리는
잼을 바르지요
꿀도 바르지요
매끄러우라고 마가린이나
버터를 바르기도 하지요
가끔은 불 위에 벗은 몸을 얹어
굽기도 하지요
(냄새가 그윽하군요)
기분이 나면
머리 위에 체리 장식도 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먹어치우지요
두 손으로 좍좍 찢어가며
둘이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열나게 삼켜 버리지요
우리들의 음화, 문학과지성사, 1990
사랑에 관하여 2 김혜순
사랑에 관하여 2
□ 1
문: 눈 속에 있지?
답: 그래, 그래서 내 영혼이 매일 내 눈조리개만 보고 사는구나.
문: 영혼은 가슴 속에 있을지도 몰라.
답: 그럼, 내 영혼은 내 심장만 들여다보고 사는 걸.
문: 지가 무슨 공장님 맹자님이라고 사사건건 반론이야? 영혼은 어쩜 페니스 끝에 달려 있을 거야.
답: 그럼 그렇구 말구, 난 내 영혼을 자식놈을 위해 쏴 버렸다구. 난 혼도 없는 놈이야.
문: (꿈꾸듯) 영혼이란 건 어쩜 몸 속에 들어 있는 물 속에 녹아 있는지도 몰라. 난 네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울 때 네 영혼이 눈물과 함께 조금 흘러나오는 걸 보았지.
답: 그래, 물로 되어 있을 거야. 어제 내가 내 영혼을 식탁 위에 흘려놓았더니 그대께서 행주로 쓱싹 닦아 버리던 걸.
문: 어떤 이는 죽으면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간다고 그러던데?
답: 영혼이 알 낳는 짐승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문: 지금 생각해낸 건데 영혼은 몸 전체에 스며 있는 걸거야, 우린 애벌레와 같아. 죽으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거야, 이렇게 훠얼훨! 넌 흰 나비, 난 호랑나비.
답: 쳇, 하나님께서 나 같은 버터플라이 콜렉션 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 걸, 난 죽어서 거미가 될 거야, 특히 호랑나비 시식 취미가 있는.
□ 2
식은 밥에 미역국을 붓고
숫가락으로 뒤적이며, 쩝쩝 씹으며
네 영혼을 잡아두려, 찾아 헤맸다
헤매다 간혹 국물 속에서 길을 잃고
머리를 처박았다
영혼은 숫가락에 잡힐 듯
그러나 무거운 밥 속을 교묘히
공중 높이 가볍게, 아니
위장 아래 무겁게
□ 3
애벌레한마리와애벌레한마리가애벌레사랑을하는데애벌레가나비가되어도애벌레처럼사랑할까애벌레를벗어놓고나는날아오른다신나게애벌레를알아볼까나비가애벌레는껍질일까애벌레를벗어놓고너도날아오르는군애벌레는어머니일까아들일까애벌레두마리와나비두마리는어떻게서로사랑을해결할까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사월 초파일 김혜순
사월 초파일
영화는 기적처럼 잔인한 것. 우리는 어두워진 방안에서 텅 빈 하얀 공간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앉아 있다 ―프랭크 오하라, 레다의 영상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렬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애비 놔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루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치약을 짜 바닥에 글씨를 쓰는 사람 물을 사먹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셔츠를 파는 사람 사 입은 사람 햄버거를 까먹는 가게의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트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루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떼
흩어지는 저 나방떼
모든 아카시아들 하나씩 매단
조등(弔燈) 아래로 달려드는 저 나방떼
먹으러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서울의 밤 김혜순
서울의 밤&
몇 개의 산맥을 타넘어야
네게 이를 수 있니
불개미 한 마리가
플라스틱 장미 꽃잎을
한잎 한잎 타넘어가고 있다
몇 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잠든 너를 깨울 수 있니
저 혼자 불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몸으로 두근거리는 내가
잠든 너의 몸 속을
한밤중 소리도 없이 오르고 있다
어떻게 등불을 빨아먹을 수 있니
나방이 한 마리
혓바닥을 바늘처럼 곤두세우고
한밤내 가로등을 찔러보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신기루 김혜순
신기루(蜃氣樓)
한 방(房) 건너고, 두 방(房) 건너서
사람들이 돌아온다.
불개미 한 마리에 불개미 한 마리가 얹혀서
사각사각 사람들이 돌아온다.
잠시 수그려 보면
여기서 소리들은 잦아들고
잦아드는 소리마다 은밀한 불꽃이 튀긴다.
마디발 곤충(昆蟲)이 마디발 언어(言語)를 낳고,
마디발 곤충(昆蟲)을 낳고, 낳고, 나을 때
문 밖에 서 계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房) 건너고 두 방(房)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선 새도록 당나귀들이 떠나고
붉은 꽃 샐비어 지는 향기 하늘 높다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바삐바삐 이 방(房)에서 이 방(房)으로
건너 다니기만 할 때 나는 듣는다.
네가 부르던 외마디 가엾은 노래.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엄마 김혜순
엄마&
나는 엄마다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또 새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먹여서 기르니
나는 엄마다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 마!
때릴 거야!
그 전엔 난 엄마가 아니었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두 눈이 전우주를 향해 열려 있고
손가락들이 해왕성 명왕성을 꼬집고 놀 때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여자들 김혜순
여자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슬픔으로 견디겠다고
나는
썼던가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청승을 떨었던가 아니면 참혹한 여름이라고
엄살을 떨었던가 너 떠나고 나면 이 세상에 남은
네 생일날은 무슨 날이 되는 거냐고 물었던가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 영화속에서처럼 그러면
안 되겠냐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은 올까
모든 전쟁의 문이 열리고
모든 전쟁의 문을 막아서며 없어요 없어요
고개를 젓는 여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치마폭을 감추면 안 되겠냐고…… 치마폭에 한 남자를 감춘 여자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남자는 지금 막 숨이 끊어진 여자의 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소파의 솜을 다 뜯어내고 한 여자가 거기에 그를 숨길 방을 만든다. 피아노 속을 다 뜯어내고 여자가 그 속에 그의 침대를 숨긴다. 그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항아리에 결사적으로 걸터앉은 여자가 소리친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헛간에까지 쫓긴 여자가 지푸라기 속에 감춘 남자 위에 드러눕는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그들이 지푸라기 위에 불을 싸지른다.
이 다음에 난 죽은 다음에
내 딸은 나를 어떻게 떠올릴까
이마를 다 뜯어내고
아무도 몰래 다락방을 만든 엄마
밤이 무거워 잠이 안 와
자다 일어나 안경을 쓰고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잠꼬대하는 그런 엄마
비녀 꽂을 머리칼도 몇 가닥 남지 않은 할머니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저녁마다 언덕에 올라 동구
밖 내려다보시며
민대머리 절레절레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큰 손바닥으로
꽃도 안 피우고 맺은 열매를 가리고
비 맞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일몰 김혜순
일몰(日沒)
노을 속에 머리칼을 처박고
서 있다 보면,
나의 발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밤의 정체를 숨죽여 바라보다 보면,
긴 행렬을 짓고
개울을 가로질러 가는
물새떼들을 보다 보면
뒤따라 슬픔이 자르듯이
가슴이 새겨지는 것을 보다 보면,
얼굴엔 눈물이
생선 비늘처럼 꽂히는 것을
강물에 비춰보다 보면,
나무들이 이리저리 돌아서고
들판이 한없이 접히는 것을 어지러워하다 보면,
느닷없이
플레쉬를 터뜨리듯
내 뺨에 철썩 처얼썩 떨어지는
그의 손바닥을 보다 보면
내 얼굴에서 강둑에 떨어져 번득이는
비늘을 보다 보면, 내 눈알을 쏘아보다 보면
비상 먹은 달이
팽팽하게 떠올라오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죽을 줄도 모르고 김혜순
죽을 줄도 모르고
죽을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데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 올린다.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참 오래 된 호텔 김혜순
참 오래 된 호텔
참 오래 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 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 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 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 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 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 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내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 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 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낸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출구를 찾아라 김혜순
출구를 찾아라
잠들려고 하면 내 몸 속의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불을 끄다 말고 화들짝 놀라는 집들, 흐린 불빛 사이로 보이는 신발들, 눈을 반쯤 감은 대문들 팩맨이 계단을 올라온다 미로 속의 점선을 먹어 치우며 팩맨이 걸어온다 육체로 된 비디오 드롬 속을 올라온다 잠의 수평선이 더욱 아래쪽에 그어진다 수평선 아래로 내 생애의 집들이 수몰된다 음침한 두뇌의 미로 속엔 끝내 나를 모두 먹어 치우고 땅속에서 솟아오를 파리들이 잠기어 있고, 몇 억년을 쉬지 않고 나타나 하늘의 계단을 오르던 태양도 물 속에 잠기어 있다 무법자 팩맨이 잠의 수평선 위로 뛰어 오른다 팩맨이여 출구를 찾아라 찾아내면 이 게임은 끝난다 팩맨이 물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들어가다 말고 방문을 열어제친다 옷을 벗은 어린 내가 오들오들 떤다 기적 소리를 내며 기차가 역으로 들어온다 그곳에 내가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친다 저지선을 뚫고 팩맨이 달려든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켠 상자처럼 내 몸의 방들이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단풍 환한 방이 닫히고 폭설의 방이 열린다 눈물샘이 환해진다 배꼽이 불을 켠다 팩맨의 검은 칼이 가슴에 걸렸는지 내 두 손이 가슴을 싸안고 돌아눕는다 이불이 발치로 떨어지고 잠의 수평선이 내 몸 위로 솟아오른다 VTR처럼 시간이 나를 돌린다 팩맨을 가둔 채 내가 커튼을 젖힌다 불켠 상자 속에 갇힌 내가 아직도 어두운 서울을 내려다본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한사코 시가 되지 않는 꽃 김혜순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너무 차가운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뜨거운 것은
시가 아니다
끓는 물 속에
두 발 담그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얼음 속에 누워
눈 뻐언히 뜨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그날, 아무도 시를 쓰지 않았다
다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은밀히
시를 날려 보냈다
―새 옷을 입었는가?
―아니, 다만 헌 옷을 벗었어
그날, 아무도 시를 쓰지 않고
웨딩드레스를 찢어
붕대를 만들고
밥주발을 들어
각자의 머리를 담을 관을 삼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시가 아니다
그날, 입을 벌려
세상 처음인 듯 울 때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다만
한 도시 전체의 개화(開花)
지구밭에 떠오른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어느별의 지옥, 청하, 1988
해산 김혜순
해산(解産)
너 태어나던 순간
찬란하던 태양은 중천에서 떨어지고
강물은 태양을 싣고 거슬러 거슬러
가 버렸지만, 갑자기 밤이 와 버렸지만
세상의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열려서
찬란히 머리칼 흔들며
넘치도록 나에게 젖을 먹여 주었지.
피와도 같고, 눈물과도 같고, 골수와도 같은
무덤들의 젖맛이었지.
내가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온몸을 휘감던 몇 백년 전의 전율, 무거워만 가던
나의 앞가슴, 즐거이 앞가슴을 풀어헤치던
산맥들.
그러나 너 태어나 탯줄이 끊기고
눈꺼풀이 떨어지고
인큐베이터 속으로 너 떨어질 때
강물은 다시 흘러 내리고, 무덤들 검게 닫히고
우리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
내 두 젖은 말라 비틀어지고
텔레비젼은 왕왕거리고, 창 밖에선 클랙슨 소리
요란했지. 너 배고파 우는 울음 소리와 함께
산맥은 캄캄하게 돌아누웠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洪水 김혜순
洪水(홍수)
쥐가 온다. 한 마리, 두 마리. 처음엔 한 마리가 와서 지붕을 갉아먹는다. 다음엔 두 마리가 와서 서까래를 갉아 먹는다. 사각, 사각, 사사각. 두 마리가 금새 새끼를 낳아서는 기둥 갉아먹는 소리를 낸다.
물이 다가온다. 수천 마리 쥐떼가 다가온다. 방문 열면 가득히 밀려들고, 서까래 가득히 올라온다. 물이 온다, 온다, 오는구나. 머리 풀고 바다가 오는구나. 귀신들이 오는구나. 산을 갉아먹고, 바다를 먹어치우고, 강둑을 갉아먹고 마당으로 오는구나.
서까래는 내려앉아, 산은 무너져 주검들이 솟아오른다. 솟아오른 주검들이 물 속에 머리를 풀고, 우리 집으로 쥐떼처럼 찾아든다.
똥이 입으로 들어오고
밥이 항문으로 소리없이 나간다
똥을 누면 천장에 가 붙고
바람은 물 밑에서 물 밑으로 분다
비가 온다 비는 땅 속에서 하늘로
퍼붓는다 신나게 치솟아오른다
솟아오르던 죽은 외조모의 머리칼도
내 목을 휘감는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황학동 벼룩시장 김혜순
황학동 벼룩시장
신기료 할아버지 땡볕 아래 혼자 앉아 계신다
어휴, 저 많은 구두를 언제
서울 사람들이 신다 버린 구두를 남산보다 높이 쌓아 놓고
밑창을 갈고, 새 끈을 끼우고, 금단추를 달고, 무두질 하고
아이구, 저 구두는 원래 달렸던 것이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구나
행려병자의 시신이었나 해부하고 나니 국물 밖엔 없네
신기료 할아버지 새 구두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짓말 같다, 새 구두가 남산보다 높이 쌓여간다
십년이 지난 모터는 이제 다 닳아 녹이 더 많다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할아버지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기계 심장을 떼어 내어 핏빛 페인트 국물에
첨벙 담갔다 꺼낼 때마다
새 무쇠 모터가 생겨난다
그 무쇠 모터가 천 길 땅속의 핏길을 모아
싱싱하게 땅의 체액을 퍼올릴 것 같다
텅 빈 두개골을 양 다리 사이에 하나씩 끌어 안고
작업복 입은 청년 하나 머리칼 같은 전선줄을 심고 있다
그 앞의 또 다른 청년 하나 마주보고 앉아 뇌를 심고 있다
간혹 연기도 피어 오르고 냄새도 매캐하다
조금 있다보면 거짓말처럼
그 전자 두개골이 머리칼 사이사이에서
전파를 내보내는 것도 보이고
전자 뇌의 현재가 폭죽처럼 터지는 것도 보게 된다
채널을 맞출 때마다 크나큰 외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보게 된다
수건 쓴 아줌마 둘이 다친 부처들의 숲 속에 앉아 있다
부처들의 야전 병원 같다
백시멘트를 맨손으로 으깨어
둘이 하나씩 부처의 귀를 붙이고 있다
손가락을 이어 붙이고 미소를 그려 붙이고
점도 하나 그려 넣고 있다
애 아부진 거기 점이 있는디 말이야
잠시 아줌마의 육담에 이끌리다보면
분가루를 뒤집어쓴 부처가
손끝을 말아 쥐는 것도 보게 된다
부끄러운 듯 두 발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