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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는 오후 2시에서부터 오후 5시까지는 가정집도, 식당도, 약국도, 수퍼마켓도 대부분 문을 닫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스떼야에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깐 구시가지를 걸어본 후에 수퍼마켓이 문을 열 때까지 알베르게로 돌아가서 샤워와 빨래를 하기로 했습니다. 빨래를 널기 위해 알베르게 뒤뜰로 나가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빨래를 널고 있는 사람들, 파라솔이 꽂혀져있는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담배를 피우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들... 낯익은 얼굴들도 꽤 눈에 띕니다. 뉴욕에서 왔다는 히스패닉계 미국인 부부, 명랑한 수다꾼들인 프랑스 아줌마들, 생장에서부터 자주 만나게 되는 독일과 이탈리아 사나이, 엇저녁을 같이 먹었던 한국청년들, 울산에서 온 지훈이, 오늘 처음 보는 한국 아가씨들과, 한국 청년들... 그리고 생장에서 우리방에 같이 묵었던, 울산에서 왔다는 모녀를 생장을 출발한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네요. 이 모녀와는 앞으로 계속 동행하게 됩니다.
하늘이 흐리진 않은데도 뜬금없이 잠깐씩 비가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니 빨래도 널었다가 걷었다가를 반복합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러시아의 소치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중계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한국시간 2월8일 새벽1시14분 입니다. 현지시간으로는 2월7일 20:14입니다. 2014년 동계올림픽이라 일부러 개막식 시간을 그렇게 잡았답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더불어 반기문 UN 사무총장 세사람이 개막식의 주인공이네요.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빨래도 다 널었으니 수퍼마켓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수퍼마켓은 바로 우리가 점심 먹었던 식당 옆에 있습니다. 어제 저녁요리로 재미를 봤던 홍합 해물탕을 해먹기로 했습니다. 어제 쓰고 남은 쌀이 있으니 밥은 그걸로 만들면 됩니다. 상추도 샀습니다. 포도주가 빠질 수는 없지요. 와인 코너에 가니, 우리보다 먼저 포도주을 고르고 있는 동양인이 있습니다. 계산할 때 보니까 그 사람이 고른 포도주도 내가 고른 것과 같은 것이더군요.
주방에서 밥을 짓고 해물탕을 끓인 후, 뒤뜰 테이블로 가져가 와인과 함께 맛있는 저녁식사를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산티아고도 식후경이지요. 옆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있는 서양인들을 보니 다들 먹음직하게 만들어 먹고 있네요. 낯이 익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나이들이 옆테이블에서 걸죽한 스프와 맥주를 먹고 있길래 우리 해물탕 맛을 보겠느냐고 권했더니 손사래를 칩니다. 한국음식은 매워서 못먹는다네요. 이 해물탕은 안맵다는데도 전혀 먹을 생각을 안합니다. 사실 라면스프를 몇봉지 넣었으니 외국인들에게는 조금 매울 수도 있겠습니다. 독일 친구는 BMW 한국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친구라고 얘기했었나요? 한국생활을 2,3년 했다는 친구가 아직도 이렇게 매운걸 무서워합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보니 아까 수퍼마켓에서 만났던 동양인이 저쪽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네요. 빵과 버터, 생선 통조림을 캔맥주와 같이 먹고 있습니다. 나이는 사십 후반이나 오십 초반 쯤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입니다. 우리하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 볼 생각으로 그 친구한테 다가가서 영어로 말을 건넸습니다. 왠지 한국사람 같지는 않았거든요. 과연 이 사람, 일본사람입니다. 우리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니, 선뜻 자기가 먹고 있던 음식들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옵니다.
이사람은 일본의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이 사람 표현대로 하자면, "싸라리 맨"인데, 유럽에 장기 출장을 왔다가 기왕 유럽에 온 김에 평소 생각해왔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조금이라도 걷고 싶어서 귀국 전에 휴가를 좀 내서 이길을 걷게 되었다는군요. 산티아고까지는 갈 수 없고 앞으로 일주일 정도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걸을 예정이랍니다. 세계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사람들이라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이 정도까지 알아내는데 엄청 힘들었습니다. 결국 종이와 연필까지 동원해서 필담(筆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왠지 친근감이 들어 술이 떨어질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포도주가 떨어지니 이친구가 자기 침대에 가서 포도주를 한 병 더 가져옵니다. 아까 수퍼마켓에서 샀던 그 포도주입니다.
산티아고 길을 계속 걸었지만 오늘 이후로, 산티아고 도착 이틀 전에 어떤 마을에서 일본인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사람들도 이 길을 많이 걷겠지만, 지금은 한국사람이 훨씬 더 많이 걷고 있습니다. 이 일본인도 말하기를, 유럽 어디를 가나 활기찬 한국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일본 젊은이들은 외국으로 나가려 하질 않는다는군요. 회사원들도 해외근무를 싫어한답니다.
우리가 잘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심각한 대화를 하고있는 동안에 승현이 엄마는 벌써 설겆이를 끝내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난 미사를 빼먹었네요. 이제 올라가서 자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늘 그렇듯이 오후 10시면 방에 전등이 꺼집니다. 뭐, 늦게 잘 사람들은 밖에서 포도주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눈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올라가 자야지요. 일본인 친구에게 즐거운 저녁이었다고, 잘 자라고 인삿말을 했습니다.
2013. 5. 8 (수) 에스떼야(Estella)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새벽 6시에 승현이 엄마가 깨웁니다. 나는 평생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데 습관이 된 사람이니, 일찍 일어나는 승현이 엄마가 늘 나를 깨우지요. 살며시 침대를 내려와 세면장으로 가서 고양이 세수를 합니다. 세면장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세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와서 보니 순례자들은 정말 새벽부터 부지런하더군요. 아침은 걷다가 카페에서 사먹기로 하고 배낭을 꾸려 바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무거운 짐은 택배용 배낭으로 따로 꾸렸습니다. 오늘 어디까지 걸을 것인가를 미리 결정해서 택배회사 봉투에 행선지 표시를 해야 합니다. 택배로 보낼 배낭에 7유로를 넣은 택배회사 봉투를 매달아 카운터 옆 빈 곳에 놓고 알베르게를 나섭니다. 이렇게 택배용 배낭을 꾸리는 일이,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아침 해야 할 일로 굳어졌습니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까지 22km 를 걷습니다. 생장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을 8km 나 걸어서 비야마요르(Villamayor de Monjardin) 까지 올라간 후, 다시 가파르게 내려와서 평지길을 걸어 로스 아르코스까지 가게 되는군요.
6시50분, 알베르게를 떠납니다. 우리가 잤던 알베르게입니다. 사방은 아직도 컴컴합니다.
에스떼야 구시가지를 지나 어제 봤던 아치형 게이트를 뒤로 하고 신시가지를 지나갑니다. 길바닥에, 가로수에, 길 옆 집 벽에 순례자들을 위한 방향표시가 보입니다. 어느쪽으로 걷는 방향을 잡아야 하나...하고 망설일 때 쯤이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 오는 표시들입니다. 승현이 엄마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좌우를 보고 있죠? 가로수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가 없었다면 저 횡단보도를 건널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흐린 아침입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군요. 30분쯤 걸으니 에스떼야 시가지를 벗어나 들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이내 저 앞에 자그마한 마을이 보입니다.
그 작은 마을을 향해서 언덕길을 걷다보니 언덕 위에 포도주 사진이 있는 간판이 보입니다. 간판에 FUENTE DEL VINO 라고 써있고 화살표가 보입니다. 이 사진을 찍을 땐 몰랐고 나중에 순례길을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알게 된 단어들입니다만, fuente 는 샘물이고 vino 는 포도주입니다. 즉 "포도주의 샘"이라는 말인데, 화살표 방향으로 가면 "포도주의 샘"을 만나게 된다는 말인가 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여기저기 자료를 뒤지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만, 스페인 사람들의 식탁에서 포도주가 없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세계에서 포도 재배면적이 제일 넓은 나라가 스페인이고 그 중에서도 리오하(La Rioja) 지방이 이나라 포도주 생산의 40%를 차지한다네요. 내일 가게될 로그로뇨(Logrono) 가 바로 리오하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고 앞으로 걷게 될 나바라 지방과 리오하 지방, 산티아고가 있는 갈리시아(Galicia) 지방이 모두 포도주로 유명한 지방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리오하 지방의 포도주는 스페인 포도주를 대표한다고 합니다.
소주 이외의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제가 순례길을 걷는 중에 어쩔 수 없이 포도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만, 스페인 포도주가 아주 맛있네요. 값도 무척 쌉니다. 이 좋은 포도주가 우리나라에는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들은 농담같은 얘기로는, 스페인 사람들은 자기들 마시기에 바빠서 자기 나라 포도주를 외국에 팔 생각을 안한다나 어쨌다나...
사전에 순례길에 있는 마을들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더라면, 그래서 저 앞에 보이는 동네가 아이에기(Ayegui)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에는 오래된 수도원과 그 수도원에서 재배하던 포도밭이 있고, 그 곳에 있는 양조장에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을텐데, 나는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포도주의 샘"을 봤을 때 제가 얼마나 놀라고 재미있어 했겠어요.
마을로 들어서니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 옆에 "포도주의 샘"(Fuente del Vino) 과 "이라체 양조장"(Bodegas Irache) 이라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마당으로 들어가면 건물 벽에 수도꼭지 두개가 설치된 음수대(飮水臺)가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포도주의 샘" (Fuente del Vino) 이죠. 왼쪽이 포도주(VINO)가 나오는 곳이고 오른쪽이 물(AGUA)이 나오는 곳입니다. 아무에게나 공짜로 제한없이 제공됩니다. 작은 물병에 포도주를 받아 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순례자의 상징인 가리비 껍대기에 한모금 받아 마시고 갑니다. 승현이 엄마가 가리비 껍대기에 포도주를 한모금 받고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아침 7시30분, 포도주를 마시기에 적절한 시간은 아니지만, 기념으로 한모금씩 마셔봅니다.
이라체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de Irache) 입니다. 8세기부터 있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고 한 때는 순례자용 병원으로도 사용되었다는데, 19세기에 수도원은 폐쇄되고 지금은 순례자용 숙소로 쓰이는 모양입니다.
공짜 포도주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라체(Irache) 마을을 지나 계속 걸으니 길 양 옆으로 밀밭과 포도밭,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밭들이 계속됩니다.
승현이 엄마와 죽이 맞아서 걷는 내내 둘이 수다를 떨었던 로사(Rosa) 아줌마입니다. 이 귀엽게 생긴 아줌마는 저 앞에 혼자 걸어가는 남편과 둘이서 순례를 왔다는데, 바스크(Basque) 지방의 수도인 빌바오(Bilbao) 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어제 에스떼야에 도착해서 점심 먹던 식당에서 우리 사진을 찍어주었던 바로 그 부부입니다. 자기 이름이 "장미"라는 뜻이라면서 영어로 R-O-S-E 를 또박또박 말해줍니다. 아줌마는 아주 활발하고 유쾌한 성격인데, 아저씨는 별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극진히 모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로사 아줌마는 자기네 동네 문화센터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이번 순례길에서 처음 외국인들하고 영어로 얘기한다며 아주 즐거워 합니다. 남편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혼자 멀찌감치 앞장서서 걷는군요. 승현이 엄마가 로사 아줌마에게 "우리는 5월10일 로그로뇨(Logrogno)에서 빌바오에 갔다 올 예정" 이라고 말해주니까, 이 아줌마가 깜짝 놀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는 빌바오에 있는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 을 보기 위해서 순례기간 중의 하루를 비워놓았거든요. 로사 아줌마는 빌바오에서는 특히 스테이크가 맛있으니 꼭 먹어보라고 정육점 아줌마답게 자랑합니다. 또, 빌바오에 있는 자기 딸한테 전화를 해서 로그로뇨와 빌바오의 버스시간표를 물어보느라 난리군요. 우리가 빌바오에서 로그로뇨로 돌아오는 막차가 몇시에 있는지 궁금해했거든요.
에스떼야를 출발한지 두어시간쯤 지났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아즈케타(Azqueta) 마을에서 빌바오 부부와 잠깐 쉬면서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동네로 들어서는 주변은 온통 포도밭입니다.
아즈케타를 떠나 계속 걷습니다. 생장에서 받은 자료에는 꽤나 경사가 급한 오르막을 올라가서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in) 이라는 마을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생각보다 별로 경사가 급하지 않군요. 포도밭이 가끔 보이는 가운데, 밀밭길이 계속됩니다.
저 뒤에 비야마요르 마을의 성당이 보입니다. Iglesia de San Andres 성당입니다.
푸른 밀밭 사이를 지나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이는 길-순례자가 아니더라도 순례하는 기분으로 걷고 싶은 길입니다.
계속되는 밀밭길. 비야마요르를 떠난지 두시간째 밀밭길을 걷고 있네요. 비야마요르에 올라오면서도 밀밭길을 걸었으니 서너시간동안 밀밭길만을 지나온 모양입니다.
밀밭 사이에 포도밭도 다시 눈에 띕니다. 새로 피어나는 연초록 포도잎이 싱그럽고 귀엽습니다.
포도밭 한쪽 옆에 가지치기를 한 포도나무 가지들을 모아 놓았네요. 문득 성서 한 귀절이 생각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요한15.1-2, 5-6)
저 잘려진 포도나무 가지들을 보니 웬지 소름이 돋습니다. 비쩍 말라서 이리저리 비틀어진 가지들이 마치 지옥 불길에 던져지기를 기다리며 몸부림치는 죄인들처럼 보입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고백성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예쁘고 풍성하게 꽃이 피어있는 나무와 풀들이 늘어선 오솔길. 순례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멋있는 길입니다.
마침내 오후 2시, 로스 아르코스의 구시가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알베르게는 구시가지를 지나 오드론 강(Rio Odron) 위의 다리를 건너 있습니다. 이름이 Albergue de Peregrinos , Isaac Santiago 입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건물 두개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접수하는 곳은 마당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접수하는 사람이 이쪽 건물엔 침대가 다 찼으니 건너편 건물에서 자야 한다고 하면서, 그곳엔 주방과 샤워실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아무데서나 자야죠. 체육관 바닥에서도 잤었잖아요.
우리가 잘 침대가 있는 이쪽 건물도 이미 거의 다 찼습니다. 하마터면 침대를 못 구할 뻔 했네요. 배낭이 좀 가벼워지긴 했지만 걸음거리는 여전히 느린 모양입니다.
빨리 배낭을 벗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죠. 아까 로스 아르코스 구시가지를 지나올 때 보니까 성당 앞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던데, 우리도 거기 가서 점심을 먹어야겠습니다. 배낭을 놓고 나오는데, 그동안 자주 봐서 낯이 익은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 친구들이 우릴 보더니, 이곳에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부부가 먼저 와 계신다고 알려줍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 분들한테 우리 얘기를 했더니 그 분들이 우리를 아는 것 처럼 말하더라면서, 우릴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하네요.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는데 승현이 엄마가 파리에서 만났던 그 부부가 아닐까하고 말합니다. 아, 그 부부...
그 부부는 우리보다 이틀 먼저 파리를 떠났으니 4월30일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몽파르나스 호텔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너무 일찍 내려와서 식사손님이 우리 둘 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있으려니 한국사람처럼 보이는 우리 또래의 부부가 배낭을 메고 식당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더군요. 부부가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걸 보고 한국사람임을 알게된 승현이 엄마가, 부페 테이블로 음식을 가지러 가면서 그쪽 여자분에게 "한국에서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들도 우리처럼 산티아고 순례를 가기로 하고 파리에 와서 며칠 머물다가, 드디어 오늘 아침 7시28분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출발한다는 겁니다. 파리에 있는 동안 줄곧 이 호텔에 묵었다는군요. 우리하고 똑같은 계획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우리보다 이틀 먼저 출발하는 겁니다. 생장으로 가는 기차시간도 똑같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나... 승현이 엄마와 그쪽 여자분은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며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파리를 떠날 때, 그분들한테 우리도 출발한다고 통화도 했었죠.
지금 이 젊은이들이 말하는 부부가 바로 그 사람들일거라고 확신하고는 젊은이들한테 그 분들 있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해서 그분들 침대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가보니 남자분만 있고 여자분은 어디 갔다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그 남자분을 우리한테 소개해줍니다. 파리에서 만났을 때, 여자들끼리 만났으니 남자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잖아요? 승현이 엄마는 그 남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그 남자와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야 하니까 저녁때 다시 보기로 하고, 알베르게를 나서서 로스 아르코스 구시가지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 반쯤 되었네요.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Meson Gargantua 식당입니다. 성당 앞 광장에 있습니다.
식당 밖 광장에 있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메뉴는 스페인식 쌀요리인 빠에야(Paella) 와 스테이크입니다. 둘 다 먹을만 했습니다. 뭐, 시장이 반찬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식사에 빠질 수 없는 포도주- 정말 맛있는 점심입니다. 이 사진은 이 식당 웨이트리스 아가씨가 찍은 겁니다. 이 스페인 아가씨, 엄청 쾌활하고 쉴 새 없이 뭐라고 떠들어 댑니다.
점심을 거의 다 먹고 있는데, 아까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그 남자분이 우릴 찾아왔습니다. 부인은 몸살 기운이 있어서 같이 못왔다네요. 웨이트리스 아가씨한테 다시 한 번 사진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결국 이것저것 따져 본 뒤에야 우리하고는파리에서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분들은 우리보다 오히려 하루 늦게 생장을 출발한 분들입니다. 이들 부부가 걸음이 빨라서 오늘 우리하고 같은 날 이곳에 도착한 것이지요. 우리가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경상도 부부였는데, 이분들은 두 분 모두 전라도 분들이랍니다. 어쨌거나 순례길에서 만난 우리 또래의 한국인 부부이니 반갑습니다.
광장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려니 지나가면서 인사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한국인 아가씨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우리 부부가 순례중인 한국 젊은이들한테는 잘 알려진 모양입니다.
이곳에서 점심도 먹고, 여러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알펜(Alfen) 씨 부부가 광장을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태국 출신 사위를 두었다는 그 독일부부 말입니다. 그들은, 전에도 얘기했지만, 알베르게를 이용하지 않고 펜션이나 호텔을 이용하는데, 이곳에도 미리 호텔을 예약하고 왔기에 지금 그 호텔을 찾아가는 중이랍니다. 이들은 내일 로그로뇨(Logrono) 까지 가서 이번 순례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답니다. 다음번에 휴가를 내게 되면 로그로뇨에서부터 다시 순례길을 걷는거죠. 우리도 내일 로그로뇨까지 간다고 하니까 거기서 만나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합니다. 당연히 그러자고 했지요. 이 부부와의 대화는 늘 즐겁습니다. 테도(Thedo, 남편 이름입니다.)가 산티아고 안내책자를 뒤져본 후, 내일 오후 6시에 로그로뇨의 Santa Maria 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동네를 둘러 보기로 했는데, 뭐 둘러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성당 주위를 한바퀴 돌아서 골목길을 몇개 걸으니 구시가지 동네가 끝납니다. 로스 아르코스는 생각보다 작은 곳인 모양입니다. 저녁도 이곳 광장에 와서 먹기로 하고 저녁미사 시간을 알아본 후 알베르게로 돌아갔습니다. 로스 아르코스에 와서 아직 샤워도 못했잖아요.
알베르게 쪽에서 다리 건너 구시가지와 통하는 아치가 보이고 그 아치 뒤로 점심을 먹었던 광장이 보입니다. 아치 오른쪽은 산타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de Los Arcos)과 붙어있습니다.
6시 넘어서 다시 광장으로 나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Salada Mixta 와 Risotto 를 포도주와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 후에 Santa Maria 대성당에서 8시에 시작하는 저녁미사를 드렸습니다. 저녁미사에 참석한 사람이 꽤 많더군요. 성당도 크고 화려했는데,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미사 후에 밖에서 어떤 사람이 스케치북에 미사장면을 그린 것을 보여주네요. 이 스케치를 사진 대신 올립니다.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들어서는데, 마당 한 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어제 만났던 일본사람이 혼자서 포도주와 함께 뭔가를 먹고 있더군요. 내친 김에 그 친구 앞에 앉아서 포도주를 한 잔 얻어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일어났습니다. 이제 가서 자야죠.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이나라는 아직 사방이 훤합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 시각 현재 TV에선 소치 올림픽 폐회식이 막 시작되고 있군요. 지금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스떼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오는데 꼬박 2주일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첫댓글 우와~ 밤사이에 조회수가 126 인기짱이에요
걸었던 길을 다시 회상하시면서 그 추억에 빠지는 맛도 쏠쏠하실것 같아요~
아름다운 꽃길~ 밀밭길~ 포도밭길~ 아주 좋아요
여행하면서 모르는사람들과의 만남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나중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기억에 남아있어 미소짓게 되네요~
아침에 즐겁게 읽고 ~ 어디 포도쥬스 라도 마셔야 ......땡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