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한강 지류(支流)를 건너 맞은 편 여인숙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침에 40리 길을 왔고, 오후에 갈 길은 가까운 30리이다. 10리쯤 남겨 두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5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뮈텔 주교 1910년 일기 중에서).
원주교구 대안리 공소(원주시 흥업면 대안 1리 659) 초창기 역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1910년 11월에 공소 축복식을 가졌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공소가 설립된 연도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공소 신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대안리 공소는 1892년께 설립됐고, 지금의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세워졌다. 뮈텔 주교가 ‘진짜 성당’이라고 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성당이라고 할 만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원주교구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 본당밖에 없다. 어째서 이 시골 마을에 그토록 일찍 공소가 설립됐을까.
초기 한국교회사에 밝은 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대안리 일대는 교우촌이었다. 신자가 많은 곳에 성당이 세워지기 마련. 박해 시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대안리 근처 덕가산에 숨어 살다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그럼 이제 공소를 둘러보자. 건평 23평 규모 공소 건물은 특이하게도 한옥 형태다. 문화재청은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공소를 등록문화재 제140호로 지정하면서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목조 가구식 한옥 성당 건축물로,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공소 마당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건물의 완성도는 높지 않으나 지역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으며, 건립 당시 원주 지역에 있던 공소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소이다. 1900년대 한옥 공소의 희소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공소는 1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었다.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1950년대에 초가를 걷어내고 기와를 얹었다. 그러나 나무 기둥에 흙으로 벽을 바른 공소가 견디기에는 기와지붕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1970년대 들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60년경에는 공소를 거의 두 배 가까이 확장했다. 창틀 다섯 개 중에서 입구 쪽 두 개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 때 늘어난 공간이다.
1986년에도 대대적 보수가 있었다. 창틀을 전부 알루미늄으로 교체하고, 내부 흙벽에는 합판을 덧댔다. 그리고 비를 피해 신발 벗을 공간이라도 있어야겠기에 입구에 현관을 따로 만들었다. 미관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탓에 멋은 없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실내는 마룻바닥이다. 바깥은 봄 날씨였지만 발끝으로 다가오는 마룻바닥의 촉감은 싸늘했다. 의자를 놓기도 했었는데, 불편한 점이 더 많아 맨바닥에 그냥 앉는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전통 한옥이 그렇듯 건물 뼈대인 나무 기둥이 그대로 드러난다. 천장이 높아 여름에는 시원할 것 같다. 제대 뒤편에는 제대와 연결된 사제 방이 따로 있다. 과거 1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주러 오는 사제가 묵는 곳이었다.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원동 본당 신부가 미사를 드리러 오는데, 예전처럼 자고 갈 일은 없어 제의방 역할만 하고 있다. 공소 마당에는 성모상과 종탑이 있다.
대안리 공소 최고령 신자인 김종현(베네딕토, 81)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공소를 빙 둘러싼 담이 있었고, 마당에는 사제가 타고 오는 말을 묶어두는 마구간이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씨는 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공소를 지을 당시 마당에서 얼쩡거리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딴 데 가서 놀라고 쫓겨났던 어릴 적 추억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100여 년 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위대한 기억의 끈이 아닐 수 없다.
대안리 공소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막사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처가 되기도 했다. 공소도 사람처럼 그동안 숱한 풍파를 겪었으며, 사람이 아프면 수술을 받듯 수차례 보수 공사를 받았다. 지금도 많이 아픈 상태다. 헤진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나무 기둥도 많이 썩었다.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공소예절이나 미사 때 50-60명이 참례하는 대안리 공소는 그 어느 공소보다도 단단한 결속력과 우애를 자랑한다. 여느 공소나 마찬가지로 젊은이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행사가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자기 일처럼 해내는 끈끈한 유대감은 다른 데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대안리 공소의 자랑이다. 최근에는 무농약,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공소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도시 본당과 교류가 활발할 뿐 아니라 농민주일 행사 등을 통해 외지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소 가운데 하나가 됐다.
2009년 9월 9일 원동 성당에서 흥업 성당이 분리 · 신설되면서 대안리 공소는 흥업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2010년 11월 12일 대안리 공소는 공소 축복 100주년을 맞아 원주 교구장 김지석 주교와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축하식을 갖고 공소 맞은편에 새로 건립한 교육관에 대한 축복식도 함께 가졌다. 연면적 132.7㎡의 교육관은 1층에 화장실과 창고, 2층에 교육실, 주방 등을 갖췄다. 공소 교우는 물론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될 계획이다. [출처 : 평화신문, 2007년 3월 11일, 남정률 기자,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4일)]
원주시 일산동에 위치한 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는 원주시 제2청사로 사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기도 했지만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과 정문인 포정루(布政樓) 등 당시의 건물이 원래의 위치에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시 제2청사가 철거되고 강원 감영지에 대한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다.
이에 따라 원주 일대의 죄인들은 감원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처형되었다.
전국적으로 박해가 회오리처럼 몰아치던 당시에 전국 각 지방의 감영은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여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래서 어느 감영이든 대부분 그 때 흘린 순교자들의 피와 고통의 역사가 구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지곤 한다.
강원감영이 품고 있는 슬픈 역사 역시 동네 어른들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때로는 아예 잊히기도 하지만 그 순수하고 굳건했던 신앙의 정신만은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다.
강원감영으로 들어서는 정문인 포정루를 지나면 선화당이 눈에 들어온다. 우아하게 뻗어 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기만 하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단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피를 흘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네 군데 처마 끝에 기와로 구운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 선화당은 관찰사의 집무처로 쓰였으며, 포정루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는 1660년(현종 1년)에 목사(牧使) 이후(李候)가 다시 건립하였고, 6.25 전쟁 때도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구하였다. 선화당은 1667년에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시대 감영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명칭은 강원감영(문루 및 선화당)이었으나 2004년 1월 17일 포정루 및 선화당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포정루와 선화당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박해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 중인 원주교구의 ‘하느님의 종’인 김강이(시몬), 최해성(요한), 최 비르지타 등 많은 순교자들이 강원감영의 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 안타까운 것은 감옥 터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