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롱에서 세시간 정도 걸어서 맞은 편 게스트 하우스에서 촘롱 고개를 보면서 찍은 사진
트레커들의 짐을 옮기는 포터드로 이들은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취사도구를 옮기는 중임
하루의 품싻은 우리나라 돈으로 만원정도라고 함.
점심을 먹기 위해서 쉬는 게스트 하우스 햇빝이 좋아서 그런지 꽃의 색갈이 너무 선명하여 조화로 느껴질 정도....
네팔트레킹에 대한 간단한 소감은 기독교의 게시가 끝날 때쯤 해서 올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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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발생해서 성장하고 정착하는 과정은 우리교회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모의(摸疑)자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현상들과 우리교회의 지금 되어지는 과정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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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4) - 초기기독교 교리의 뼈대를 세우다
주마간산격의 일람(一覽)이라고 해도 안보는 것 보다는 나을터....
종교싸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의 절반이상은 무늬만 종교인이거나 아니면 조그만 관심을 가지고 이 친구들은 무슨 소리들을 하는가 하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취미는 호기심 차원에서 끝낼 수 있으나 종교는 취미가 아니다.
종교는 결국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취미로 끝날 수 없는 법.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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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세워지는 과정이다.
아래는 빌려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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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박해와 발전
로마 교회의 등장과 박해
예루살렘 교회가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말미암아 없어진 다음 로마 제국 내의 큰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마 등의 교회가 중요한 교회로 등장하였다. 그 중에도 여러 가지 정치, 문화 종교적 이유로 로마 교회가 가장 중요한 교회로 인정받았고, 로마 교회 주교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여 드디어는 교황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그만큼 박해도 커졌다. 박해를 받은 이유는 주로 그리스도교인이 당시 여러 신을 위시하여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절하는 '무신론자'라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지하 무덤 같은 데서 성찬식에 쓸 것을 넣은 바구니를 가지고 모여서 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눈다고 하니 바구니에 담아온 아이를 먹는 식인종이 아닌가, 밤중에 비밀 장소에서 남녀가 한데 모여 '애찬'이니 하는 것을 보면 성적으로 문란한 짓을 하는 패륜아가 아닌가, 세금이나 병역 의무도 기피하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이야기나 하니 '제국 속에 제국을 건설하려고 혁명을 꾸미는 불순분자가 아닌가 하는 등의 의심을 받았다.
64년, 네로 황제 때의 박해를 비롯하여 대규모 박해만 해도 95년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황제의 박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황제의 박해 등 박해의 물결이 휩쓸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커져만 갔다.
그리스도교 공인
드디어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 황제가 등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어머니와 부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로마 교외에서 있을 아주 중요한 전투를 앞둔 전날 밤 꿈에 '이 표시를 가지고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라는 그리스어를 보았다.
그 말의 처음 두 글자 "Xp"를 그린 깃발을 들고 나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할 자유를 허락했다. 그 자신은 죽을 때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그 몇몇 황제가 전통적인 로마종교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379-395) 황제 때 그릭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언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보니 그리스도교 분파 중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상충하는 이론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을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황제에게 이렇게 서로 다른 이론이 싸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325년 그는 약 300명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를 니케아에 모이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이다.
여기서 크게 두 파로 나뉘어서 대결을 벌였다. 한 쪽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리우스가 이끄는 파로서 예수가 피조된 존재로서 진정 인간도 아니고 진정으로 신도 아닌 그 중간 제3의 존재라고 보았다. 이 파의 생각이 득세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비서로 있던 젊은 신학자 아타나시우스가 나타나 예수는 독생자로 "태어났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동일한 존재'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호모우시아(homo-ousia)'라고 하는데, 이 이론이 결국 승리를 했다.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을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신조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381년 교회의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니케아 신조'로 공표된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예수에 대한 교리를 확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는데, 451년 소아시아 칼케돈 회의에서 예수는 '진정으로 신이면서 진정으로 인간(vero deus vero homo)'이라는 이른바 양성(兩性)론을 포함한 공식 교리를 다시 확정했다. 이에 반대하는 파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분리되어 나갔다.
한편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도 나중 네스토리아라는 이름으로 동쪽으로 퍼져나가 페르시아,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퍼졌다. 781년 서안에 비석을 세우는 등 8세기 당나라에 흥했던 경교(景敎)가 바로 그 파였고, 이 파가 신라에도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인도 남쪽과 이란 북서쪽에 이 파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2-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호교론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대표자가 알렉산드리아이 크레멘트(150-220),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185-251), 라틴 신학의 대부 터툴리아누스(150-222) 등이다.
그러나 당시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유명한 자서전적 『고백록(Confession)』 첫 부분에 "오 주님,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저희를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쉼이 없사옵니다." 하였는데, 그의 삶은 실로 고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비 그리스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서 어릴 때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지만 곧 그리스도와 조로아스터교의 혼합 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에 심취하였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와 호소 때문인지,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북아프리카로 가서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둥을 세웠다. 그가 쓴 많은 책 중 『신의 도성』은 역사를 신의 도성(都城)과 세상 도성의 투쟁사로 보고 인간은 거기서 훈련을 받으므로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통해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의 '역사 철학'이 된 셈이다.
그는 또 세상에는 하나의 교회가 있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영육 이원론에 기초해서 육을 악으로 보는 마니교의 영향으로 인간의 성욕이 바로 아담과 해와의 타락 때문에 인간에게 씌워진 원죄라고 주장하고, 이렇게 내려오는 원죄 때문에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이 미리 정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이론은 원죄를 부인하고 자유 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 영국 출신 펠라기우스와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카톨릭 신학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종교 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계통의 신학자로서 둘 다 신플라톤 철학 계통에 속했던 사람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은 장 칼뱅에 의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