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이 지은 『현산어보』에 기록된 홍어 부분이다. 우리에게 『자산어보』로 더욱 익숙하지만 『현산어보』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더욱 공감하고 있다.
정약전은 책 머리말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이 들었으므로 집안사람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黑山)을 현산(玆山)이라 쓰곤 했다. 현은 흑과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집안사람’은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9일 보은산 정상에 올라 우이도[흑산도]를 바라보며>라는 시에 “흑산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내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서신을 쓸 때마다 ‘현산’으로 고쳐 썼는데 ‘현’이란 검다는 뜻이다”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손암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1758년 3월 1일, 경기도 광주 마현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공재 윤두서의 손녀 해남 윤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정약전은 자신의 신변에 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신 아우 정약용의 문집에 그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다. “형님은 어려서부터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도 사나운 말이 길들지 않은 듯했지만, ……성호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를 거쳐서 공맹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오르기 위하여 열심히 갈고 닦으며 서로 권면하여 덕업을 쌓았다.”
자유롭고 활달한 배움에 있어서도 자유분방했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성호 이익의 저서들을 탐독하며 새롭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약용은 “나의 형님은 재질로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낫다. 머리가 좋아서 수학책을 보면 금방 이해하곤 했다”고 했을 정도로 머리도 뛰어났다.
정약전 형제는 성호 이익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늘과 땅의 큼과 해와 달의 밝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호) 선생님의 힘이었습니다.”
성호의 책을 통해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 정약전은 성호의 수제자인 권철신의 문하에서 성호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권철신은 전통적인 경전 해석에서 벗어나 실천 중심의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했던 대학자였다. 그가 바다생물에 관한 책을 저술한 것도 성호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성호사설』에는 성호가 안산 바닷가에 살며 생물을 관찰했던 기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84년 4월 15일은 운명의 날이었다. 이날 정약전은 큰 형수의 장례를 치르고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아우 정약용, 사돈 이벽과 함께 서울로 가고 있었다. 배에서 이벽은 정약전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들려주었다. 서울에 돌아오고서 형제는 이벽이 준 『천주실의』, 『칠극』 등 책을 읽으며 새로운 종교에 심취했다. 그러나 1791년,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을 겪으며 두 사람 모두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
정약전은 1783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대과는 나의 뜻이 아니다”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1789년에 벼슬에 나선 정약용의 설득 탓인지 생각을 바꾸어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공부에 집중하였다. 1791년, 순조 탄생 기념으로 열린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그는 곧 초계문신에 뽑혔고, 1797년에는 병조좌랑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왕명을 받아 『영남인물고』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정약전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반대파들은 한 때 천주교에 몸을 담았고, 과거 답안지에 서양학설을 주장했다는 그의 행적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결국, 그는 1798년에 벼슬을 잃고 낙향하였다. 1799년에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죽고, 1800년에는 개혁 군주 정조마저 죽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던 신유년(1801)은 정약전 형제들에게 죽음의 해였다. 아우 정약종과 스승 권철신이 사교의 괴수로 몰려 사형당한 것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겨우 두 형제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형제를 죽이려던 벽파들도 “형님과 아우를 신자로 인도하지 못한 것이 내 죄”라는 정약종의 증언마저 묵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지도와 장기에서 유배를 살던 이들 형제에게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청나라에 조선을 응징할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황사영이 큰형 정약현의 사위였던 탓에 이들 형제는 다시 의금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고 이번엔 더 험한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열한 살 된 아들 학초가 수원 화성까지 그를 따라나섰다. 수원에서 아들과 이별하고, 전라도 율정에서 아우와 헤어진 그는 험한 바닷길을 따라 흑산도로 들어갔다. 이것이 아들과 아우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키가 9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평소에도 술을 즐겼던 정약전은 한동안 술에 취해 살았다. 그는 이웃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함께 어울렸다. 조정에서 벼슬을 한몸이지만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과 격의 없이 친하게 지냈다.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정약전은 흑산도 바다에 관심을 쏟았다. 때때로 어부들을 따라 고깃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그는 같은 동네 사람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다가 폭풍을 만나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 등지를 떠돌다 돌아온 경험담을 정리하여 『표해시말』이란 책을 엮어내고, 나라에서 시행하는 소나무 정책을 비판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송정사의』를 지었다.
1807년 봄, 우이도의 사정이 나빠지자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여름, 그는 서당을 지어 섬마을 아이 대여섯 명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그는 소년 장덕순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근해의 해양생물을 정리한 『현산어보』를 완성했다.
정약용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현산어보』의 전신으로 보이는 책이름이 등장한다. “책을 저술하는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 기이한 책으로, 이것은 또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도형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정약전은 애초 글과 함께 색칠을 한 그림을 그려 넣을 구상을 했다. 절두산순교박물관에 전시된 <영모도>를 보면 그가 그림을 매우 잘 그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보다 글이 좋겠다는 정약용의 충고를 받아들면서 그림이 빠지게 되었다. 만약 정약용이 형의 처음 구상에 동의했더라면 우리는 천연색의 해양생물도감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물고기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릴 수 있을 만큼 묘사가 세밀한 과학책을 갖게 되었다.
1814년 여름, 정약용은 유배에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흑산도에 들러 형님을 뵙겠다는 사연을 전해왔다. 아우가 험한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염려한 그는 뭍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이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흑산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떠나지 못하게 했다. 결국, 그는 안개 낀 밤에 우이도 사람을 불러 섬을 빠져나왔으나 이를 알아챈 흑산도 사람들이 쫓아가 다시 섬으로 데려갔다. 한 해가 넘도록 섬사람들을 설득하여 겨우 우이도로 갈 수 있었다.
이런 사연을 들은 정약용은 “요즘 세상에 그 고을 수령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고을에 올 때는 백성이 모두 길을 막고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겨가려 하자 본도의 백성이 길을 막고 더 머물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며 형의 인품을 찬양했다. 그런데 해배하라는 의금부 공문을 정적들이 중간에서 빼돌려 정약용은 1818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들 학초마저 요절했기에 아우 정약용은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벗이었다. 정약용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주역심전』을 보내 서문을 맡겼을 때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 책을 읽은 자는 손암(정약전)이요, 이 책을 지은 자는 약용이다.
만약 약용이 편안히 부귀를 누리며 존귀한 자리에 올라 영화롭게 살았더라면 이 책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지은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형 약전에게 보내 도움말을 구했다. 그는 정약용이 보내준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기질로 같은 학문을 닦았기에 생각하는 안목도 비슷할 것이네만 어찌 이토록 똑같을 수가 있는가. ……그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곧바로 자네의 손을 잡고 내 아우야, 내 아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네.”
그토록 사랑하는 아우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정약전은 1816년 여름에 우이도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현산어보』서문에 기록한 그의 호 열수(洌水)는 정약용도 사용하였을 만큼 두 사람은 의가 좋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