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인데,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습니다.
진성여왕은 3대 여왕이자 51대 임금으로서 남편이자 상대등인 위홍과 함께
초기에는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세금을 걷지 않고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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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으나 현대에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888년에 위홍이 죽자 정치에
뜻을 잃은 진성여왕은 어여쁜 미소년들을 뽑아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고 왕권은 이미 힘이 없어 지방귀족
(군수등)들은 중앙 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894년 최치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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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책 10여조를 올리자 최치원에게 아찬(17품계 중 6품)벼슬을 내리고
시무책내용을 시행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되는 견훤과 궁예의 침투 때문에 결국897년에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결국진성여왕은 신라의 멸망을 반보 앞당겨 놓은 여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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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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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
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습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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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894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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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세기의 음녀로 신라 패망의 대명사처럼 말들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여왕이 큰 욕심도 없었고 유혈 충돌로 백성들을 몰살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만 왕재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성군의 반열에 오른데에는
김유신이나 김춘추 같은 참모들이 있었지요. 허나 위홍은 진성여왕의 참모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고 일찍 급사 한 것이 진성여왕의 파멸을 압당긴 것이 아닐까요?
2015.8.23.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