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신학강의를 20강정도 들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30년 독학하는 동안
접하지 못했던 '편집비평'이나 '케리그마'같은 신학용어들에 대하여 교통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반박 글'을 쓰면서 동양철학자 도올 선생님이
고전이나 쓰시지 웬 신학 강의냐며 속으로 들이댄 것이 못내 부끄러워 용서를
구하는 차원으로 오늘은 칭송하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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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집비평의 성과에 힘입어 그리고 나의 영적 교감에 의하여 마가의
예수 상을 명료하게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이 새로운 예수를 조선의 민중에게
전하고 자 하는 것이다.” 영적교감은 뭐요? 성령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텍스트를 마주할 대상을 “조선 민중에게”라고 특정지은 것에 대하여 동북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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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조선(세계)인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쓴 것이라고 알아들었고요.
도올이 말한 안병무의 민중 신학은 무엇일까? 안 병무는 서구신학에서 예술을
조명하되 종교, 문화사적 관점에서만 비춤으로써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1차원
적인 또 다른 맥락, 즉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놓쳐버린 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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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 것, 말하자면 서양 신학자들은 무대에서 배우를 비추는 서치라이트 중에
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서치라이트를 꺼버린 것이고 안병무의 민중
신학은 그것을 켜자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예수가 누구고 기독교가 뭐고 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출현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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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병무는 민중 신학의 태동계기를 전태일 분신 사건을 민중 신학의 태동으로
보는 것 같아요. 불교 용어를 빌리면 소신봉양을 한 것입니다. 안 병무는 불의한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종교권력의 실체를 한 몸으로 경험한 인물
입니다. 그는 서양에서 불트만 제자들에게 10년간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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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던 마가복음의 진면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소위 갈릴리의 기적과 무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도올의 다소 거침없는 발언에 대하여 기존 학자들의 반발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로이드존스나 에라스무스도 평신도이니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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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텍스트로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본질
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항상 그렇게 대립적 관계,
양자택일의 관계이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성서학자는 정직하고 사실적이고 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신앙의 그리스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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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신학자는 신화적, 교리적 산물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얼마든지 상호
비판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적 예수의 관계’를
나누는 부분에 대하여 인간 예수(역사적, 하나님의 인간화)로 대변하는
진보의 ‘연속성‘입장(역사적 예수)이나, 보수의’불연속성’입장(케리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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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 도올 자신은 '연속성' 입장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멋져 불었어요.
'나는 자유주의자다' 이렇게 멋진 자유주의자라면 저도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어요. 자유주이자인 칼 바르트를 '불연속성'의 선두 주자로서 설명하는데
불트만까지 덤으로 주서들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직도 잘모르겠어요.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면서도 케리그마(보수, 불연속성)의 노선을 따르는
도올 신학의 정체가 뭘까요?
2022.11.29.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