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영향을 받아 <소>라는 책을 써 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책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소를 쓰기 전에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 흉내를 냈거나 냄새를 풍겼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한국적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먹게 된 동기부여는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였는데, 마침내 근접이라도 됐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탈고하여 작년에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동안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이 책을 출간하여 준 데 대하여 이참에 감사를 드린다.) 어쨌든, 그런데 내 코를 꿰어 끌고 갔던 마르께스의 소설이 사실은 바로 여기서 얘기하려는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도도한 강의 근원지를 찾은 기분이었고, 죽은 고조고할아버지의 필답 서간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되었다.
보르헤스의 소설들은 많은 부분이 관념론적 테제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 묻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철학으로 푸는 게 아니라 문학으로 풀어냈다는 데 우선 머리가 숙여진다. 그것도 우리가 아는 전통적 소설작법 형태가 아니라 미학적이고 현상학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나를 몰입시키는 것은 <환상적 사실주의>, 즉 판타지적 사실주의를 그럴 듯하게 픽션화시켜 게임에서 나를 완전히 묵사발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매력이다. 그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으며 이끌려다니다 어느 순간 <추리적 기법>인 반전에 머리를 맞고 나서야 비참하게 나가떨어지는 나를 깨닫게 했다.
예를 들어 <원형의 폐허들>에서 보면 주인공은 꿈을 꾸어 자식을 만드는 도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전에 불이 났는데 아들이 그 불 속에 있었다. 놀란 도인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불속에 들어갔는데 아들도 불에 타지 않고 자신도 불에 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자신은 꿈으로 아들을 만들어 내어 당연히 불에 타지 않는 거였고, 자신은 또한 어느 누군가가 꾸는 꿈에 의해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 문학을 돌아보면 쓸데없이 콧대가 높고(저희들끼리 순수문학 어쩌고 밥말아먹다 독자 다 떨어뜨린 결과를 가져왔지만) 읽기 싫으면 말아, 하는 식으로 지리하고 말장난적이고 쓸데없이 길게 느리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우선 충격을 주어 흥미를 돋구었고, 미학적으로 맛을 내는 양념을 충분히 사용하여 소설을 조리하였고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장치들이 많아 역시 일품이고 명품이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가 숙여졌다. 따라서 미학에 대한 개념은 그만두고라도 어문규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학을 한답시고, 작가라고 으스대는 나로부터 한국의 문인집단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반성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이 책의 특징을 나열할 수 있겠으나 논문집이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끝내고 싶다. 그러면서 아쉬운 점을 토로하자면, 우선 번역이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콧대가 높은데다 또 실제로 좋은 외국 서적 비싼 돈 퍼주고 사다가 번역하여 팔아먹는 장사에 지나지 않아 상당 부분 그러려니 인정은 하고 싶다. 그러나 번역은 대부분 수준 이하다. 물론 외국어에 대해 잘 모르므로 막말을 할 수는 없겠으나 읽기 힘들면 그것은 보나마나 번역이 잘못 됐다고 봐야 한다. 가까운 예로 <카버>의 <대성당> 같은 번역작품을 보면 이건 수준 미달이라도 한창 미달이다. 고등학생 가운데 중상 정도 영어실력을 갖춘 애에게 번역시켜도 이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왜냐하면 영어 실력이 별로 없는 나지만 하도 번역 내용이 그지같아서 영어원본 책을 구해다 봤더니 나도 그보다는 낫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았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고등학생의 영어실력으로 따지만 하위권에 속하니까(수능시험을 풀어보면 하위권이니까)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어쨌든 이런 좋은 책을 우리에게 읽히려고 책을 내준 민음사에게 감사는 해야 한다고 나를 추스리며 이만 끝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