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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기도장이 장두원 목사 ①
출생과 성장, 그리고 입신
[785호] 2010년 12월 29일 (수) 17:47:16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webmaster@kehcnews.co.kr
장두원 목사는 성서학원 수양생활 3년에 ‘천둥의 기도장이’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학한 다음 날 새벽부터 신학생들이 다니는 아현교회의 천정이 무너져 내려앉을 듯이 천둥치듯이 고함을 지르고 마루가 부서지도록 두드리며 요란하게 기도했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다.
새벽기도가 끝날 때면 제자리에 앉아있는 법이 없었다. 기도를 시작할 때의 자리가 아니고 딴 자리에 있기가 일쑤였다. 그는 기도할 때 천둥치듯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떼굴떼굴 굴러다녀서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왼편자리에서 오른편자리로 옮겨있었다. 그럴 때마다 같이 기도하던 딴 학생들은 이리저리 밀리다가 쫓겨나가는 수도 있었다.
장두원 목사는 1908년 12월 19일에 충남 부여군 남면 대선리에서 인동 장씨인 아버지 장석범 씨와 어머니 천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감기를 모르고 자랄 정도로 무병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며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유교적 예법과 가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성격은 발랄했고 사물에 대한 처리도 단 1분도 끄는 법이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나라가 어지럽던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개화에 먼저 눈이 뜬 아버지는 서당에서 공부하는 두원을 면내에 있는 신식교육기관인 홍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두원이는 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금천리교회(현 대선교회) 엄경엽 전도사와 나영은 전도부인의 인도를 받아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하여 성경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그는 192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방학이면 본가로 돌아와 부모 곁에서 예의범절을 익히면서 고향교회의 전도사를 도와 봉사했다. 그는 공주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1년여 앞둔 1927년 봄 금천리교회에서 대전교회의 감리목사 전성운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고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전담교역자 없는 금천리교회에서 유진심 전도부인을 도와 교회를 부흥시켜나갔다. 유진심 전도부인은 주로 심방에 주력했고 장두원은 신지식을 갈망하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교육을 시키며 교회를 부흥시켜 나갔던 것이다.
“금천리교회는 점점 부흥되어가는 중 남녀신자들은 자립정신이 왕성하였다. 헌금, 전도, 심방 등이 실로 모범적이며 그 빈핍한 가운데 예배당건축을 목적으로 200원을 헌금하여 금년 안에 건축될 줄로 믿고 기도하는 중이다.(제4회 연회록 p.11.)”
금천리교회는 대전지방 안의 23개 교회 가운데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5개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932년 신년 사무총회에서 김응조 금천리교회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감리목사로부터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로 알고 감사하고 순종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1932년도에 입학이 어렵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때는 조선성결교회가 가장 크게 성장하는 때여서 성서학원 입학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성서학원은 신입생을 입학시험에 의해 뽑지 않고 전국교회의 주임교역자와 지방 감리목사가 추천한 사람을 순서대로 뽑았다. 따라서 신입생 선발은 미리 1년 전에 뽑아놓게 되었던 것이다.
장 집사는 도리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가사의 정리도 안 되었고 또 병고 중인 할아버지의 곁을 갑자기 떠난다고 여쭙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사정을 아셨는지 내 사정대로 1년 뒤인 1933년 봄에 신입생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셔서” 라고 또 한 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
어느덧 1933년이 되었다. 장두원은 자상한 어머니, 다정다감한 누님과 같이 모시던 유진심 전도부인이 들려준 경성성서학원의 건학정신과 교수 학생간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학생 생활분위기를 기억하며 4월 1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1936년 경성성서학원 수학을 마치면서 전도사로 임명되어 만주 무순교회의 주임교역자로 파송 되었다. 이때 만주 전역에 20여개의 성결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성결교회는 1924년에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만주 일대에서 해외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은 남만주 일대에도 성결교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80만의 조선 농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군부의 이간질로 말미암아 중국인과 중국패잔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조선농민을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로 쫓겨나왔다. 동포들은 도시에 수용소를 세워 그들을 수용했다. 이 때 박문익 신원식 두 전도사의 위문활동으로 봉천교회와 북릉교회가 세워졌고, 포하교회와 구련톤교회, 하얼빈교회, 그밖에 몇몇 곳에 기도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동 만주에서 남부만주로 성결운동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순교회는 1932년 4월 20일에 북릉교회가 동쪽 40여리 밖에 세운 기도처였다. 1933년 7월 17~18일에 본부이사회가 파송한 이건 목사가 시찰하고 돌아간 뒤에 정식 설립된 교회다. 장두원 전도사는 성서학원 수양 중에 활천에서 수용소의 지원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읽고 성서학원의 모든 수양생들과 함께 1년 내내 점심을 굶고 기도하며, 헌금을 수용소로 보낼 때부터 만주에 있는 동포 전도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장 전도사는 1936년 7월 1일에 무순교회에 부임했다. 교회가 창립된 지가 4년인데 교세가 약하여 집회인원수가 평균 25명이었고 교회분위기가 냉랭했다. 그는 불과 4개월 만에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기적을 체험했다. 그는 새벽과 밤으로 매일 2차씩 열심히 간구했다. 주위에서는 기도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아셨다. 7월 31일에 8년 동안 목이 곧고 완고하던 아내가 꼬꾸라졌다. 회개의 문이 열려서 모든 죄를 자복했다. 그는 아내의 구원에 대하여 절망까지 했는데 주께서 먼저 아내를 회개시켯고, 이는 부흥의 불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8월이 되자 교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새벽과 밤으로 기도의 불이 일어났고, 낮에도 기도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다.
매일 울음소리가 나자 ‘예배당에 초상이 났느냐?’고 외인들은 비아냥거렸다. 한 부인이 심히 고통스러워 하다가 사발 두 개를 절취한 것을 돌려주고 감정관계로 경원해 오던 이를 찾아가서 회개하고 사과했다. 그 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체험하고 새 힘을 얻어 열심히 기도하여 성신의 불세례까지 받았다.
9월이 되니 성신의 훈기가 뜨거워지고 모든 심령이 은혜를 절정으로 간구했다. 낙심했던 두 가정이 교회로 돌아왔고 타락했던 6명이 돌아왔고 새로운 구도자가 여러 명 나오게 되었다. ‘안’이란 자매는 전도하는 전도부인에게 덤벼들어 “예수를 믿는 것도 자유요,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인데, 뭘 믿어라 말라 하느냐?”고 비방했다가 “아무렴 믿는 것도 자유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지,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때는 자유하지 못하고 멸망 받습니다”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믿기로 결심하고 바로 다음주일부터 교회에 나왔다
10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회개의 불이 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새벽에 한 여자가 나와서 벌벌 떨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 전도부인이 회개를 재촉하고 구원의 도리를 가르쳤다. 그 여인은 자신이 지은 흉악한 죄를 다 토해냈다. 특히 떡 장사할 때 50원을 더 받은 것을 자복하고 즉시 금전을 내놓기도 했다. 회개의 불은 ‘홍’이라는 여자에게 떨어졌다. 이 여자는 남의 소실로 있으면서 2년동안 교회를 다녔다. 이 여자가 죽어가듯 한창 애를 쓰다가 죄를 토한다.
바로 10월 18일 주일이었다. 설교를 한 후에 통성기도를 시켰다. 성신의 역사가 각 사람에게 충만했다. ‘안’이라는 자매는 수년 전에 모 여관에서 고용살이를 할 때 10원을 절취한 일을 자복했다. 갚아야 천당 가고 갚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다. 저녁에 함께 여관주인을 만나 그 사실을 말한 후에 돈과 물품을 내어주고 모자란 금액은 일을 해서 갚겠다며 용서를 청했다. 주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안심하라며 관대히 처분했다.
이날 밤 새벽 3시 신자는 점점 모여들었다. 기도소리는 늘어가고 땅을 치는 소리, 우는 소리로 매우 소란했다. 새벽 4시 반, 어떤 사람이 권총을 들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른다. 너무 요란하니까 무슨 큰 범죄사건이 났는가 하여 들어왔다는 것이다.
‘안’이라는 여자가 아침식사 후에 또 왔다. 아무래도 성신을 받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날 성도들은 방에 모여서 장 목사가 성신 받는 교리를 성경으로 몇 마디 가르친 다음, 기도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철저한 신앙에 섰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내가 죽은 십자가요, 오순절의 성신은 내게 임한 성신”이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믿기 시작한 지 3개월에 중생 성결을 체험하고 넘치는 은혜를 충만히 받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가?
또 신유의 영광도 많이 나타났다. 주일에 여학생 하나가 급성폐렴에 결려서 심히 위독한 것을 눈물로 간구함으로써 나았으며, 남학생 하나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위급을 당했을 때에도 기도함으로 즉석에서 나았다. 위장병으로 2주일 동안이나 몸져누워 앓던 고 2학년 학생이 기도하므로 즉시 나았다.
그는 아플 때 조선으로 나간다고 전보를 쳤는데 낫고 나서는 자기 발로 우체국에 걸어가서 이제는 다 나았으니 아니 간다고 전보를 치고 오기도 했다. 부임한지 불과 4개월 만에 이러한 부흥을 보는 나는 조선내지와 각처 교우들의 열렬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는다. (近代 小復興記 활천 1936. 12. P. 45~49)
무순교회는 장 전도사 부임 이래 4년 만에 예배당을 한인촌에 우뚝하게 세웠다. 남만주의 모교회인 봉천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포하교회, 구련톤교회 등 모두 자력으로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는 만주 벌판에 성결운동이 거셌던 결과이다. 장 전도사는 1941년 4월에 경성성서학원 강당에서 열린 제1회 북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북부연회는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북도, 동만주, 남만주지역 200여 교회로 조직된 연회이다.
장두원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만주성결운동의 전진기지가 될 만주의 수도 신경의 개척자로 파송되었다. 당시 신경은 광활한 만주평야 한복판에 새로 건설된 도시로, 장 목사는 모여든 동포들의 지도자요 이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파송되었던 것이다.
신경교회 개척은 조선성결교회본부의 주력사업이었기 때문에 교회개척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마침 만주제국과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종교 정책에 따라 만주에 있는 조선의 모든 교파들을 조선기독교로 통합되어야만 했다. 결국 1941년 12월에 만주에 있는 성결교회도 조선기독교총회 산하에 합동되고 본국의 교단본부와는 정치와 행정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장 목사는 1942년 봄에 만주조선기독교총회 인사정책에 따라 봉천 근처 사평가시 조선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이 교회는 원래 감리교였는데 만주의 교통요지이며 군사적 요지이기 때문에 일본 군부대에 소속된 조선인 군속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헌병대의 감시를 받는 교회였다.
장 목사는 그런 것에 조심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조선청년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7월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시달림을 받았다. 그렇게 감옥생활을 하다가 그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2년 1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장 목사가 옥중에 있는 동안 가족과 한 번도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으나 충성스러운 교인들은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가족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먹고 자녀들도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음을 보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다.
장 목사는 해방된 조국의 고향이 그리웠다. 교인들도 조국이 독립되었으니 교향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둘 씩 떠나갔다. 그러나 장 목사는 남아있는 교인이 있는 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침 중국의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의 군대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8·15해방 후 삽시간에 공산군이 중국 정부군을 무찌르고 만주일대를 관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예배당이 공산군에게 징발되고 예배중지를 당하면서 장 목사와 가족들은 부득이 그해 11월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 11월 9일에 조선성결교회 재흥총회가 열렸고 일제에 빼앗겼던 성결교회의 문이 다시 열렸다. 장 목사는 그해 조치원교회에서 시무했으나 교단과 조치원교회 등의 자료에 시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다행히 그의 후임자인 오영필 목사 시무 때에 집사로 있었던 김동주 원로목사가 이를 증언한 바 있다.
장 목사는 1946년 7월에 청주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교인들이 모두 인정 많고 순박하고 부지런했다. 특히 금천리교회에서 봉사할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규암교회와 만주 용정교회 창립 신자인 충성스러운 박귀래 장로가 청주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장 목사는 청주교회에서도 만주교회에서와 같이 기도만능신앙을 강조하여 교회에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유의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다. 기도와 신유의 역사가 부흥의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청주가 도청소재지이지만 현대적 의료기관이 적은 도시이며 술과 노름이 만연하여 육신의 병자들도 영혼의 병자 못지않게 많았다. 특히 청주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신유의 역사가 절실했다. 장 목사는 청주 일대에서 귀신들린 병자의 귀신 내쫓는데 능한 목회자로 알려졌다. 청주교회에서는 최병권 장문원 전문규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들이 후일에 목사가 되었다.
장두원 목사는 청주에서 2년 동안 시무하다가 1948년 4월 김응조 목사의 권유로 돈암동교회로 부임했다. 장 목사는 김응조 목사가 대전감리목사로 있을 때 그에게 집사로 임명되고 그의 권유로 복음사역자의 길에 들어선 바 있다.
그의 목회관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그의 부흥관은 조금 달랐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여서였는지, 젊은이들을 많이 불러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청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유능한 청년들을 교계에 진출시킴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문화계, 실업계, 정치계, 관계에 배출시켰다.
이렇게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던 장 목사는 1950년에 돈암동교회를 시무하면서 부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목사가 세속적인 명예를 좇는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다. 그 후 차점으로 낙선했으나 정계인사들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선무역주식회사’의 명의로 당시 7, 80만원의 융자를 받아 현재의 돈암동교회의 터를 계약했다.
최종원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던 돌산 1300평을 계약한 장 목사는 그곳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터진 6·25는 장두원 목사와 성도들의 소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장 목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던 부산피난생활에서 세상의 부를 맛보았다. 그는 전쟁 중에 ‘남선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며 일본에서 비료를 수입하는 무역을 했다. 그러나 주의 종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는 사람이라서 일까? 그 후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고 회한의 가슴을 안고 다시금 돈암동교회를 찾아왔다. 하지만 돈암동교회에서는 한명우 목사가 부임하여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다.(돈암동교회50년사 p.98-102)
장 목사는 1984년에 서울의 신림교회에서 약 5년 동안 시무했다. 그리고 목회일선에서 은퇴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가지 서울의 봉일교회 명예목사로 교회를 섬겼다.
1989년 6개월 동안 일본의 나가노 현 우에다 시의 일본인교회에서 일본 본토 말로 일본정부가 허락한 기간대로 목회를 했다. 그 곳에서 성결교회 교인이었던 최자실 목사를 만나 같이 집회를 인도하고 그의 특청으로 청평 금식기도원 원목으로 1년 동안 시무했다.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영적 회복운동과 신유의 은사로 병자들을 치유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활천에 기고한 ‘목회자와 신유의 은사’라는 글에서 성결교단의 젊은 목회자 중에서 성령의 큰 불을 받고 일어날 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나는 예배 후에 신유의 집회를 가질 것을 제의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찬송 한 장을 부르고 안수기도 한 차례 해주어라. 차차 뜨거워지면서 전력투구하게 되고 기적도 일어날 것이다. 성령의 불이 일어나면 전도 구령운동이 일어나고 부흥의 새바람이 일어날 줄 확신한다. 신유의 큰 은사를 받아서 진면목을 창출하는 부흥의 중흥을 기원한다.” (활천 451호 1991.3. P. 57~58)
그는 향년 92세에 “내가 10일 안에 곧 하나님 앞에 가겠노라”고 자손들과 친지들에게 예언한 대로 1999년 3월 13일 아침에 간호사들에게까지 “수고하였다”고 감사의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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