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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정국이 계속 된다면 부득이 2021년도에는 지맥 중에 100km 전후에 있는,
1.수도지맥, 2.금오지맥, 3.보현지맥, 4.팔공지맥, 5.비슬지맥, 6.춘천지맥, 7.영월지맥, 8.주왕지맥, 9.호미지맥, 10.문수지맥, 11.덕산지맥, 12.여수지맥, 13.고흥지맥, 14.도솔지맥, 15.화원지맥을 마음에 올려 놓도록 해보겠습니다.
*고흥지맥[호남정맥]: 모암재 적지봉~지죽대교(녹동, 104km)
*화원지맥[땅끝기맥]: 첨봉~목포구등대(83.5km)
*수도지맥[백두대간]: 초점산~합천군 청덕면 적포리(황강, 105.8km)
*여수지맥[호남정맥]: 안치봉~힛도마을(81.1km)
*비슬지맥[낙동정맥]: 사룡산~밀양 종남산 오우진나루(밀양강, 146.5km)
*영월지맥[한강기맥]: 삼계봉~태화산 각동리 샘골(남한강, 136km)
*춘천지맥[한강기맥]: 청량봉~춘성대교(북한강, 127.4km)
*보현지맥[낙동정맥]: 가사봉~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낙동강, 166.8km)
*호미지맥[낙동정맥]: 백운산~호미곶(98km)
*팔공지맥[보현지맥]: 석심산~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 우물교(낙동강, 120.7km)
*금오지맥[수도지맥]: 수도산~김천시 고아읍 오로리 선주교(낙동강, 81.4km)
*도솔지맥[백두대간]: 돌산령~소양2교(소양강, 88km)
*주왕지맥[한강기맥]: 계방산~영월읍 하송리(동강, 86km)
*덕산지맥[낙동정맥]: 새신고개~안동시 용상동 법흥교(낙동강, 83.1km)
*문수지맥[백두대간]: 옥돌봉~예천군 용궁면 삼강리 삼강다리(낙동강, 11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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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해남을 옛날에는 바다 기슭의 후미진 구부렁이란 뜻으로 새금(塞琴, 변방 새(塞) 거문고 금(琴))이라 불리우기도 했고, 바닷물에 잠기는 땅이란 뜻으로 침명(浸溟, 적실 침(浸), 어두울 명(溟))이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물가에 버려진 땅이라는 투빈(投濱, 던질 투(投), 물가 빈(濱))이라 불리우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초 침명현(浸溟縣)이 해남현(海南縣)으로 바뀌면서 비로서 해남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해남반도·화원반도와 65개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토양은 화강암·반암·응회암 등의 충적층이 잘 풍화되어 있어 토양층이 깊다. 북쪽의 월출산(月出山)에서 뻗은 줄기가 두억봉(斗億峰, 529m)·흑석산(黑石山, 650m)을 이루고, 강진군과의 경계에 서기산(西基山, 515m)·석문산(石門山, 272m), 남쪽에 두륜산(頭輪山, 703m)·대둔산(大屯山, 672m)·도솔봉(兜率峰, 421m)·달마산(達摩山, 481m), 중북부에 금강산(金剛山, 481m) 등이 있다. 특히 군의 남쪽 끝에는 사자봉(獅子峰, 110m)이 있는데 일명 갈두산(葛頭山)이라고도 한다. 사자봉의 남사면 해안이 우리나라 육지부의 가장 남쪽 끝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보길도(甫吉島)·어룡도(魚龍島)·흑일도(黑日島)·백일도(白日島)·당인도 등의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북쪽의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일명 해남천)이 해남읍을 가로질러 복평만(垘坪灣)에 이르고, 두륜산에서 발원한 삼산천(三山川, 일명 어성천)이 삼산평야를 지나 화산면 해창만(海倉灣)에 이른다. 북쪽에는 옥천천(玉泉川)·계곡천(溪谷川)이, 남쪽에는 고현천(古縣川)·구산천(九山川) 등이 흐르고 있다.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뒤로는 새금현(塞琴縣)과 황술현(黃述縣), 고서이현(古西伊縣)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새금현은 침명현(浸溟縣, 또는 投濱縣)으로, 고서이현은 고안현(固安縣, 또는 同安縣)으로, 황술현은 황원현(黃原縣)으로 개칭되어 양무군(陽武郡: 지금의 강진)의 영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대흥사(大興寺)와 미황사(美黃寺)가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유탁되면서 두륜산 일대가 조선조 불교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 초에 침명현은 해남현(海南縣)으로, 고안현은 죽산현(竹山縣)으로,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개칭되어 영암군의 임내가 되었으며 뒤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제주도와의 내왕은 물론 송나라와의 무역항으로서 관두량(館頭梁: 지금의 화산면 관동리)이 이용되었다. 1409년(태종 9)에 왜구 때문에 육지부로 옮겨온 진도현(珍島縣)과 병합해 해진군(海珍郡)으로 개편되었다. 1412년에 읍치를 당악(棠岳: 지금의 현산면 고현리)에서 영암군의 임내인 옥산현(玉山縣)으로 옮겼다. 1437년(세종 19)에 진도와 분리되어 현감이 부임하였다. 1440년에 무안 대굴포(大掘浦)에 있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황원곶(黃原串: 지금의 문내면 선두리)으로 옮겨와 전라우수영이 되었다. 1448년에 황원현(黃原縣)과 옥산현·죽산현 등 영암의 임내지역이 해남으로 이속되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이곳 달량진(達梁鎭: 지금의 북평면 남창리)에 왜구가 내습했으나 격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곳 주민 정운(鄭運)·이유길(李有吉) 등은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윤현(尹俔)·윤검(尹儉) 등의 의병은 강진 병치(兵峙)싸움과 장흥 석대(石臺)싸움에서 적을 물리쳤다. 또한 대흥사의 승려들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승군에 참여해 크게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12척의 전함으로 130여 척의 왜군선단을 격파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있었으며, 1688년(숙종 14)에 명량대첩비가 우수영에 세워졌다. 1895년에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고 1896년에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에 진도군 삼촌면과 영암군 옥천면·송지면·북평면 등을 병합하였다.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도군·강진군·영암군의 일부 지역을 조절해 13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0일 해남 장날을 기해 김동훈(金東勳)·김흥봉(金興鳳)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주도로 4월 6일과 4월 22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21년에 완도군 군외면 어불도를 송지면에 병합시켰다. 1942년에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명량대첩비를 철거해 경복궁 뜰에 옮겨놓았다. 1947년에 철거된 적이 있는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비각을 세우고 옮겨놓았다. 1948년 11월 1일에는 대구폭동의 영향을 받은 해남폭동이 발생해 큰 피해를 끼쳤다. 1955년 7월 1일에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육지의 최남단이라는 뜻을 가진 토말비(土末碑)가 세워졌다. 1983년 2월 15일에 북평면이 북평면과 북일면으로 나눠졌고, 마산면 맹진리 일부가 계곡면 덕정리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옥천면 봉황리가 강진군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2015년 1월 1일에 화산면 중마리가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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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재-2.1km-노승봉-0.7km-만일재-3.3km-대둔산-3.1km-410m봉-3.3km-닭골재-3.9km-관음봉삼거리-1.2km-달마산-1.3km-대밭삼거리-1.1km-하숙골재-1km-떡봉
떡봉-1.7km-도솔봉-2.1km-마련고개-5.7km-땅끝호텔-1.4km-땅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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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답자님들께서 해남 방문시 베이스캠프로 활용한 장소입니다만 현재는 코비드-19로 21~06시는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 오소재 쉼터에 오기택노래비가 있네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박달재 노래가 70데시벨이라면 여긴 20데시벨 정도입니다.^^
해남 북일면이 고향인 가수 오기택씨의 "고향무정"에 나오는 구름도 울고넘는 그 고개가 바로 오소재였군요.^^
- 고향무정 - (오기택 노래)
1.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2.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있고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너덜을 만나는데 처음부터 너덜을 타고넘는게 아니라 옆길로 올라가서 너덜 상단부만 잠깐 통과합니다. 우측 봉우리는 두륜산 8봉 중에 하나인 고계봉입니다. 대흥사 입구 구림리 사하촌 마을에서 저리로 케이블카가 올라다니네요.
♤ 오소재(烏所峙, 164m)/ 오시미재/ 삼면경계면(해남군 북일면, 옥천면 → 삼산면)
해남군 삼산면과 북일면을 가로 지르는 827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예전에 오시미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산적들의 행패가 하도 심해서 50명이상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넘어야 했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또다른 설은 주작산의 암릉들이 까마귀의 집처럼 생겼다고 해서 오소재(烏所峙)라 부른다고 하며, 우측으로 오소재 약수터가 있고 좌측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오소재 쉼터가 있다. 이곳 약수터는 주말에 줄을 서서 물을 받을 정도로 물맛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오소재쉼터에서 출발한 기맥길은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올라서면 오심재에서 올라오는 일반등산로와 계단에서 만나게 됩니다. 너덜지대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상부쪽 너덜은 직접 가로지릅니다.
♤ 오심재/ 오십치(五十峙)
오심재는 옛날 산이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산적들이 숨어서 지나는 과객들을 괴롭히므로 50명의 사람이 모여서 함께 넘었다고 하여 오십치(五十峙)라고도 불렀는데 마치 백두대간길의 육십령과 비슷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오심재 뒤로 보이는 고계봉 정상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는데 고계봉(高髻峰, 638m)의 계(髻)는 상투를 뜻하는 단어로 높은 상투봉 쯤으로 해석된다.
♤ 대흥사(大興寺)
대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로, 누가 언제 지은 사찰인지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신라 눌지왕 10년(426) 정관(淨觀)스님이 창건했다는 만일암 기원설을 비롯, 신라 진흥왕 5년(544)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신라 무열왕 8년(508) 무명의 비구승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설은 신라 진흥왕의 어머니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아도화상(阿道和尙)으로 하여금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의 총본영이었던 곳이고,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도량이기도 하다.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 역할을 한 사찰이며, 풍담스님에서 초의스님에 이르는 13인의 총사와 만화스님에서 범해스님까지 13인의 강사(불교 경론을 강의하는 승려)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대흥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40년 동안 수행한 일지암(一枝庵)이 있는데,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 일대에 한국 고유의 차와 다도로 유명하고 유자 산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경내에는 서산대사 의발을 비롯, 국보 제30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천불전, 천불상, 표충사 등 국가지정문화재 7점과 시도지정문화재 6점, 그리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지나온 주작-덕룡의 능선입니다. 아래로는 오소재 도로가 넘어가는군요.
가야할 대둔산 통신소가 보이네요. 저 길을 걸었다니 꿈만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바라보기만 한지라...^^
노승봉에 올라서니 양쪽이 다 바다네요 어?? 뭐야??? 잠시동안 이해를 못하고 멘붕상태였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서해의 진도가 보입니다.
왼쪽은 아직 완도가 보이지 않네요. 남해바다 신지도쪽입니다. 우측 멀리 보이는게 청산도 입니다. 그리고 날이 맑으면 그 뒤로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네요.
♤ 노승봉(老僧峰, 685m)/ 능허대(凌虛臺)
두룬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봉우리로, 해남군 북일면과 삼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으며, 정상은 넓고 편편한 암반으로 되어있으며 한켠에는 오석으로 된 자그만 표시석이 있다. 노승봉을 능허대(凌虛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늘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중국의 경승지나 건물에도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지명에도 많이 보이는데 황해도 해주, 강원도 고성, 경북 울진의 지명에서도 보인다. 허공을 가른다, 승천하다, 비상하다의 뜻의 관용화된 표현으로 중국과 조선시대에 보편화되어 해변 절경지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라고 한다.
♤ 두륜산 가련봉(迦蓮峰, 703m)
두륜산도립공원 중의 최고봉으로 해남군 삼산면과 북일면의 경계 능선에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682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두륜8봉)가 능선을 이루며 8개 암봉이 둥근 원형으로 천상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땅에서 연꽃이 솟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서산대사는 두륜산의 地勢를 말하기를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괴는 기둥이 되고, 남으로는 달마산이 있어 지축이 튼튼히 연결되어 있고, 동의 천관산, 서의 선은산이 홀연히 마주 솟아있다. 바다가 둘러 싸 지키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불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 예언에 따라 산내의 고찰 대둔사와 산림은 임진왜란 때와 한국동란 때도 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거북이 보이시죠. 신기방기한 두륜봉의 모습입니다.^^
왼쪽 만일재와 오른쪽 천년수를 한꺼번에 잡아보았습니다.
♤ 만일재(挽日峙, 549m)
해남군 북일면과 삼산면을 잇는 두륜산 내에 있는 고개로,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에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과 이정표가 있다. 지명유래는 만일암지(挽日庵址)에서 따온 듯 하며 ‘해를 당겨 놓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가을이면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 억새천국을 이루는 곳이다. 만일재(挽日峙)는 천년수 설화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옛날 天童과 天女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지상으로 내려가 불상을 조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낮동안 불상을 조성하지 못하면 다시는 천상으로 갈 수 없게된 두 사람은 꾀를 내어 천년수에 해를 묶어 해가 지지 못하게 하고, 天童은 남암에서 天女는 북암에서 각각 불상을 조각했다. 그러나 천동보다 일찍 조각을 끝낸 천녀가 빨리 천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해를 묶어 놓은 줄을 끊어버려서 천동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실제로 북암과 남암을 가보면 이 전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북암에는 마애여래좌상이 남암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륵불입상이 있다고 한다.
♤ 천년수(千年樹)
만일암터 이정표 갈림길에 '천년수'는 물(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만일암 터에 있는 천년묵은 느티나무(樹)를 말한다. 만일암의 만일(挽日)은 해를 잡아 맨다는 뜻으로 북미륵과 남미륵의 조성 전설과 관련하여 천년수(千年樹)에 해를 매달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며 만일암터에는 오층석탑이 서있다.
대둔산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배낭을 놓아두고 구름다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진불암삼거리에서 약 100m 다녀와야 합니다.
♤ 두륜봉(頭輪峰, 630m)
두륜산도립공원 봉우리 중 4번째로 높은 봉우리이지만, 두륜산의 주산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봉우리다. 원래는 커다란 바위덩어리란 뜻으로 “한듬산”으로 불리다가 그 이후 한듬, 대듬, 대둔으로 변해 대둔산(大芚山)으로 불리다가 백두산의‘두(頭)’와 중국 곤륜산의 ‘륜(輪)’을 따 두륜산(頭輪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석 아래 누워있는 烏石에 해남 청년 사랑회에서 “산은 오르되 이름은 없고 천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젊은 피땀으로 세웠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주봉(胄峰)갈림길/ 삼면봉(삼산면, 북일면 → 북평면)
기맥에서 약간 떨어진 두륜봉을 다녀와 다시 기맥길에 복귀하여 100여 미터 낭떠러지를 건너 대둔산으로 향하며 삼면봉인 주봉 갈림길을 지난다. 직진은 땅끝기맥 띠밭재로 향하며, 좌측으로 주봉 쇠노재로 향한다.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노안으로 인한 오독의 결과인지... 비슷한 한문을 착각하는 현상... 왕왕 보입니다.
♤ 주봉(胄峰, 530m)
해남군 북일면 용산리에 있는 두륜산 투구봉은 마치 장군의 투구모양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위봉으로 잘못 알려져 부른다. 지도상에도 산꾼들의 산행기에도 대다수가 위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봉은 한문으로 '투구 주(胄)를 밥통 위(胃)로 오역하여 지도 표기에 위봉으로 해놓은듯 하다. 1918년 지형도(일제발행)에 한자표기가 胃(밥통위)가 아니라 胄(투구주)字이다. 매년 겨울이면 이 투구봉에 비친 햇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가 마치 옆으로 뉘어진 우리나라 지도처럼 그려지며, 특히 투구봉에 지도가 그려지는 것은 매년 11월 말쯤에서 2월 말정도까지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시간도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 그 중 8시 30분 정도가 가장 정확하게 지도 모양이 그려지며, 용산리 마을입구에서 약 3백미터 지점에서 가장 잘 보인다고 한다.
봉우리도 아닌것 같은데 명패가 있습니다..ㅎㅎ
왼쪽은 아름다운강산대선배님, 오른쪽은 일전에 가입인사 올려주신 이재구선배님이십니다.
띠밭재입니다. 대흥사로 탈출하는 도로가 아주 가까이(0.4km)에 있습니다.
도솔봉 오름길에 뒤돌아 보고....
남쪽은 북평면 동해리에서 남창리로 향합니다. 주봉 아래 동해저수지도 보이고, 신지도와 우편 완도가 보입니다.
왼편으로 띠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나무가 선은지맥분기점입니다.
♤ 대둔산 도솔봉(兜率峰, 672m)/ 삼면봉(해남군 북평면, 삼산면 → 현산면)/ 컨테이너시설물/ 선은지맥분기점
해남군 삼산면과 현산면, 북평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도솔봉 정상은 여기서 조금 더 가서 통신탑이 있는 곳인데, 그곳은 갈 수 없으니 이곳에다가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우측으로는 연화봉, 혈망봉, 향로봉으로 이어지고 기맥길은 통신탑이 있는 직진으로 이어진다. 도솔이란 도솔천을 말하며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인 잇수의 단위, 40리에 해당함.)이 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 여기에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이 있고 수많은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다음 구간에도 달마5봉의 마지막 봉우리인 도솔봉이 있는데, 그 곳 정상에도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선은지맥이 향하는 저 끝에 보이는 봉우리가 연화봉입니다.
♤ 선은지맥(仙隱枝脈)이란
땅끝기맥의 두륜산(700m)을 지나 대둔산(671.5m) 직전의 도솔봉(667m)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해서 연화봉(612.5m), 혈망봉(376.2m), 오도치, 향로봉(467.5m), 백도치, 병풍산(315.7m), 태양산(308m), 감투봉(223.3m), 오십치, 삼면봉(171.7m), 장고개, 선은산(281.7m), 서재재, 돌탑봉(123.1m)을 거쳐 해남군 화산면 평호리 송평항선착장에서 남해바다에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0.2 km인 산줄기 이다.
♤ 선은지맥 개념도
대둔산 통신소를 우측 임도로 따르는 분도 계시고, 좌측 울타리를 따르는 분도 계십니다. 좌측이 더 빠릅니다.^^
울타리 바깥쪽으로 길이 없는 곳을 지나왔습니다. 선답자님 띠지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 대둔산(大屯山, 673.2m)/ 삼면봉(북평면, 삼산면 → 현산면)
전남 해남군 북평면, 삼산면, 현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북동쪽의 두륜산과 자매봉의 관계이다. 정상부는 방송국 중계소시설(KBS, MBC, KT) 등 여러 기관의 시설이 점령하고 있다.
가야할 능선이 펼쳐져 있네요. 앞에 410m봉을 넘어서 닭골재로 내리고 다시 저 멀리 달마5봉을 넘어서야 합니다.
대둔산 정상부를 내려서며 눈에 담아둡니다.
- 대둔산 정상부 부터 닭목재에 이르기까지 엉켜붙은 대팻집나무 가지와 산죽과 콜라보를 이룬 청미래덩굴 등 가시나무와 잡목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구간이다. 엄청난 잡목과 위험한 암릉이 도사리고 있고 희미한 족적을 따라 등로를 찾아야 하므로 여름에는 마의 구간으로 통한다.
완도대교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동해저수지와 주봉이 뒤쪽에 있습니다.
대둔산이 조금 멀어졌습니다.
완도가 완전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410m봉과 417m봉이 가까이 있던데 410은 지나오고 417m봉 아닌가도 싶었습니다.
불썬봉(달마봉)의 모습이 보입니다.
410m봉도 내려섰습니다.
철탑 하나를 지나고 마지막 철탑 있는 곳에 닭골재도로가 내려다 보입니다.
남창리에서 완도 들어가는 13번국도가 정면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스퍼트,,, 게거품을 물고 헤드랜턴을 켜지않고 다 내려왔습니다.^^ 완도에서 현산면으로 가는 4차선 포장도로입니다.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 요리로 나오게 되네요.
♤ 닥골재/ 저동치
닭골재는 해남군 현산면 구산리와 북평면 남창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 새로 생긴 4차선 포장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그 옆에 구13번국도는 지역주민이나 땅끝기맥을 이어가는 산꾼들이나 찾는 잊혀진 고개가 되었다. 다음 구간 달마산 방향 들머리는 지하터널을 통과해 구13번 국도변에 있다. 고개 아래에 딱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딱골은 닥나무가 많은 동네란 뜻으로 저동(楮洞)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저동치(楮洞峙), 즉 "닥골치"인데 변음이 되어 닭골재로 불리운다고 한다.
♤ 월송여객터미널
지하도를 통해 월송여객터미널까지 구도로를 따라 걸어나갑니다. 이내 삼거리가 나오면 좌측으로 100m 더 가야 됩니다. 우측으로 방향을 잡았더니 해남까지 걸어갈 뻔 했습니다.^^
15분 소요되네요. 해남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는 19시가 막차고 이후 완도에서 나가는 직행이 있습니다. 월송여객터미널 바로 앞이 개인택시 기사님 집입니다. 군내버스는 해남까지 40분(1,000원) 소요되고, 택시비는 25,000원 정도 나온답니다. 저는 18:20분 버스를 타고 나왔습니다.
해남에 나가서 쉬고, 아침에는 문을 연 곳이 없어 편의점에서 라면에 밥말아 먹고, 해남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군내버스 첫차(06시 출발)를 타고 월송에서 걸어왔습니다. 어제 내려선 도로의 반대쪽 들입구 모습인데, 울타리를 따라 가다보면 진입로(묘지 가는 길)가 나옵니다.
30분도 안 되어 금새 날이 밝아옵니다. 닭골재에서 올라서서 우측 대형 양돈 축사를 바라보며 능선을 따르는데 좌측으로 완도로 들어가는 남창리 일대가 환하게 조망됩니다. 장보고대대에서 군생활을 한 후배에게 보여주니 엄청 좋아라 하네요.^^
이진리 바닷가로 넘어다니는 작은닭골재입니다. 키가 높다란게 가로등 같은 이정표네요.
♤ 이진진(梨津鎭)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는 이진성지(전라도 기념물 제120호)가 있는데, 이진리 마을 뒷쪽에 있는 이진산성은 정유재란 이후인 1598년(선조21년)에 진(鎭)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5년)에 수군 만호(종4품)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성의 축성년대가 이때 쯤으로 추정된다. 이진성 남쪽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으며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에서 배로 떠난다는 기록이 있다. "해남읍지"에 전선 1척, 사후선 2척과 대변군관 12명, 진리 18명, 사령 6명, 군뢰 2명, 방군 271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진리(梨津里)는 본래 영암군 북평종면이었으나 지금은 해남군 북평면이 되었으며 지형이 배(梨)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는데, 서전리를 일부 병합하여 이진리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 남창리에 있던 ‘달랑진’이라는 수군 기지가 조선조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와서 이진진(梨津鎭)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임진년에 침범하지 못했던 이곳 전라도 땅으로 침범을 하였었다 한다.
첨봉에서 덕룡산 가는 삼거리에 도착한 이후 줄곧 완도를 빙 둘러보며 땅끝까지 진행하게 되네요. 원없이 보게 됩니다.^^
♤ 북평면 남창리와 달도
해남군 북평면과 남창리와 완도 사이에 있는 섬 ‘달도’는 배의 닻을 닮아 ‘닻도’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사람들이 부르기 좋게 ‘달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남창리에는 조선 중기까지 ‘달랑진’이라 불리운 수군 기지가 있었으며, 수군기지가 조선조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가고, 달랑진 남쪽에는 조운창을 지어 남창(南倉)이라 불렀는데, 남창은 조세로 거둔 대동미를 싣고 한양으로 가거나 먹거리가 부족했던 제주도로 식량을 공급했던 창고이다. 려말선초 왜구의 침략이 유난히도 많았던 이곳 해남, 특히 조선조 명종 때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불렸던 달랑진사변(을묘왜변)이 터졌던 곳으로, 왜구의 침략으로 해남, 강진, 영암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었다고 한다.
고개에 올라서면 우측으로 송지면 해원리에 위치한 가공산(334.8m)이 보입니다. 우리나라 8,000여개 산 이름 중에 가나다 순으로 맨처음 나열되는 산이라죠.
달마봉 지나 문바위재에서 바라본 가공산 사진입니다.
♤ 가공산(334.8m)
가공산은 해남군 송지면과 현산면 경게에 자리한 야트막한 산이다. 남북한을 망라한 우리나라의 산은 무려 8,000개(박성태 저 <신산경표> 참조). 가나다 순으로 된 그 많은 산의 목록을 살펴보면 맨 처음 등장하는 산이 바로 가공산이다.
작은바람재와 큰바람재가 있습니다. 지도상 작은 바람재로 표시된 곳에는 준희선생님 푯말이 있네요.
처음 만나는 송촌마을 분기점입니다. 이후 송촌마을 분기점이 또 나옵니다.
달마산 첫 봉우리 관음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드디어 달마5봉(관음봉, 불썬봉, 귀래봉, 떡봉, 도솔봉)의 바위 절경이 시작되네요.
여기가 큰바람재인가 봅니다. 관음봉을 사이에 두고 바람재가 두 곳입니다.
♤ 바람재/ 달마산 정상 2.45km, 송촌마을 1.95km
작은닭골재를 지나 만나는 227m봉(관음봉) 전후로 바람재가 있다. 관음봉을 지나 이정목이 서있는 안부로 우측은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이진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달마산 정상까지 오르는 일반 등산객이 주로 송촌마을에서 이곳 바람재로 오른다.
뒤돌아서 내려다본 관음봉의 모습입니다. 바람재를 지나는 도로와 지나온 능선길도 죽 펼쳐집니다.
드디어 불썬봉이 살짝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네요.
잠시 지리산의 연하선경을 닮은 곳도 지나갑니다.
마치 양파껍질 같습니다. 한고비 올라서면 또 한고비가 나옵니다. 불썬봉 다가가기 쉽지 않네요.
연화봉과 대둔산 통신소 그리고 가련봉 주봉의 모습은 변함없습니다. 강진만 건너 천관산도 계속 바라보입니다.
- 땅끝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내륙 최남단의 산이라고 불리는 달마산 달마5봉((관음봉, 불썬봉, 귀래봉, 떡봉, 도솔봉)은 수려한 산세와 시원한 조망을 자랑하는 화려한 산이다. 해남의 산 하면 일반적으로 두륜산이나 주작산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남에서 산 좀 탄다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달마산이 해남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저없이 말한다. 달마산은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어 마치 금강산을 길게 펼쳐 놓은 듯하다 하여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매우 공감합니다. 주작-덕룡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달마5봉 능선도 뒤지지않게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스틱을 먼저 위로 던지고 줄을 잡고 오르는 곳에서 그만 바위에 박치기를 했습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네요. 머리숫이라도 많으니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습니다. 아고고~ 불썬봉 가기 디게 어렵네요.ㅠㅠ
♤ 땅끝천년숲 옛길
땅끝천년숲옛길은 총52km에 이르며, 땅끝길(16,5km), 미황사역사길(20km), 다산초의교류길(15,5km)등 3코스의 테마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체 노선은 땅끝마을 땅끝 맴섬~땅끝탑~땅끝호텔~도솔암~미황사~송촌1제~ 현산면 봉동계곡~덕흥리~대흥사~삼산 구림리~용전리~산림리~나범리~중리~상가리저수지~옥천 용삼 삼거리~옥천면 청룡제~탑동(5층석탑)~세곡재로 이어진다. 도란도란 옛 이야기가 떠오르는 ‘땅끝천년숲옛길’은 국토순례 1번지로 수많은 관광객 및 순례객이 출발 혹은 도착지점으로 인식되는 땅끝마을 갈두항 맴섬 앞에서 시작하여 강진 세곡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다양한 해남의 역사와 문화재를 탐방할 수 있는 코스로 작은 오솔길을 활용해 자연스러운 숲길을 조성한 길이다. 또 ‘땅끝천년숲옛길’은 국토순례 및 도보여행을 위한 신개념 이동로를 조성함으로써 지역의 새로운 명소를 창출하고 자연보전, 생태환경교육과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여 군민과 관광객들에게 친환경적인 옛길을 복원하여 옛 선조들의 숨결과 쾌적하고 편안한 노선을 제공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옛길을 걷는 동안 마을에는 장승과 만나는 안내판을 설치했으며 스토리텔링형 안내판은 해남의 대표 관광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땅끝 마을 사자포에는 인도에서 돌배(石船)가 들어와 미황사가 창건됐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길은 갈두항을 지나 해안 나무데크가 깔린 목넘개를 따라 옛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땅끝 사재 끝을 지나 땅끝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댈기미 해안길을 따라 가는 코스는 왼쪽에 남도의 쪽빛 바다를 끼고 파도소리와 함께 걷는다. 이 길은 역사와 문화와 자연을 만나는 코스로 땅끝탑과 송호해변, 도솔암, 미황사 등으로 이어져 땅끝 해남의 느낌을 새롭게 한다. 특히 땅끝천년숲옛길은 두륜산대흥사, 명품 숲과 다양한 난대 숲을 아우르고 있어 힐링하기에도 좋은 코스이며 명승 미황사 등의 천년고찰에서는 사찰 템플스테이체험과, 두륜산대흥사 주변의 정보화마을의 농촌체험, 매정리 행복마을 한옥 민박체험, 대흥사 주변의 웰빙 먹거리음식촌, 토종닭 코스요리를 전문으로 한 맛집 등을 경유할 수 있는 코스이다.
달마봉 정상에서 바라본 완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완도5봉(심봉, 상황봉, 백운봉, 업진봉, 숙승봉)의 모습을 그려보는 분이 계시다면 더 행복하실 것입니다.^^
♤ 완도(莞島)
전남 완도군에 속한 섬이자 완도군의 주도이며 군청소재지이기도 하다. 201개(유인도 54, 무인도 147)의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완도·고금도·청산도·보길도·신지도 등의 섬들은 모두 지질시대에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빙기(後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여러 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섬이 되었다. 신라시대인 829년(흥덕왕 3) 완도읍 죽청리에 청해진이 설치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동·서 지역이 각각 강진현과 해남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인 1521년에는 현재 읍소재지인 군내리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치되었다. 1896년 완도군의 신설로 군내면이 되었다가 1922년 완도면으로 개칭, 1943년에는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내면의 대야리를 포함하면서 섬의 북부는 군외면, 남부는 완도읍으로 관할구역이 나누어졌다.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육지와는 달도를 사이에 두고 남창교와 완도대교로 해남과 연결되는 국도가 동쪽 해안을 따라 나 있다. 남동쪽에 있는 완도항은 연안도서의 생활필수품 수송기항지이며, 제주도의 관광지원항이다. 섬 중앙의 상황봉(象皇峰, 644m)이 최고봉이며, 북쪽에는 숙승봉(宿僧峰, 432m)·백운봉(白雲峰, 600m) 등 기복이 심한 산들이 솟아 있고, 남동쪽에는 100m 내외의 구릉과 평지가 있다.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라죠. 처음으로 대여섯 명의 등산객과 마주합니다. 미황사로 내려가시네요.
역광이라 정상석 글자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리를 표시한 정상에 이정표를 바라보며 도솔봉주차장까지 5.9km라니 두시 간 반이면 갈 수 있겠지 하고 대충 거리감을 잡습니다.
♤ 달마산(達馬山, 498.8m)/ 삼면봉(해남군 북평면, 현산면 → 송지면), 봉수대, 돌탑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 송지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땅끝을 향해 펼처져 있는 암릉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불썬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서 ‘불을 사용하다’라는 남도 사투리에서 ‘불쓴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썬봉이라 부른것을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佛禪峰)이라 부르는 바람에 불선봉이 되었다 한다. 돌탑이 있는 달마산의 주봉으로 불썬봉이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불을 써는("써다"는 "켜다"의 전라도 방언) 봉우리라 하여 "불썬봉" 이라 불리웠는데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이라 부르면서 불선봉(佛仙峰)이 되었다고도 한다. 봉수대에선 밤이면 횃불, 낮에는 연기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긴급함을 알렸다. 이곳 달마산의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으로 연결하던 봉수대다.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한다. 봉수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느 학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어느 학자는 12세기 중반인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불썬봉 대신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470m쯤 떨어진 곳에 '달마산'으로 오기했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 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른다.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으로 쓴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인 ‘다르마’에서 유래되어 ‘경전’ 또는 ‘진리’를 의미하며,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禪)을 전한 후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동의 바닷가 달마산에 머물렀다는 설로 이 산의 이름을 달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인도의 스님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 선맥(禪脈)을 이어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이어지는 스님이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번이나 독약을 받았다.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달마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상에서 미황사가 내려다 보입니다. 사세가 확장되어 당우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일전에 뉴스를 보니 미황사 금강 주지스님이란 분이 오랜동안 수고해 주셨고 다 버리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니 해남의 주민들이 떠나지 말라는 청을 넣고 있답니다. 보기 좋은 현상입니다.^^
♤ 미황사(美黃寺)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인도 우전국국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義照) 화상이 100여명의 향도와 함께 쇠등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봉안할 곳을 찾아가다가 소가 크게 한번 울면서 누운 자리에 절을 세워 통교사(通敎寺)라 하였으며, 소가 마지막 멈춘 곳에 절을 세우니 미황사였다. 그때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하여 아름다울 ‘미(美)’, 금인(金人)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기려 누를 ‘황(黃)’이라 미황사(美黃寺)라 하였다. 위의 설화를 볼 때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중국(당나라)이 아닌 바다를 통해서 인도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화를 뒷받침하는 부분이 미황사 초입에 있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미황사 입구에 있는 우분(牛墳)마을이다. 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바닷길 불교 전래를 추측케 하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다. 한국 불교의 해로유입설(海路流入說)을 입증하는 미황사의 문화유적과 더불어 도솔봉~달마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섬들이 달마산과 어우러진 뛰어난 경승지이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삼황(三黃)으로 꼽는다. 미황사는 한반도 내륙의 위도상 가장 끝에 자리잡은 사찰로서, 신령스런 달마산의 기슭에 있는데 달마산은 미황사의 불상과 석양빛, 암릉이 조화를 이뤄 달마산의 삼황(三黃)이라 부른다고 한다. 미황사 주변으로는 동백꽃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은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위 능선과 억새풀, 상록수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특히 산등성이에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흰색의 수직 암봉들은 풍화(風化)에 매우 강한 규암층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여기서 미황사로 빠지는게 더 가깝군요. 여름에는 구경차 물뜨러 미황사에 다녀와야 하는 지점입니다. ㅋ~
도솔봉으로 가는 바위 봉우리들이 아름답습니다. 길이 너무 멋집니다.
♤ 문바위 통천문
문바위 아래에는 통천문이 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빠져나갈 만큼의 구멍으로 등로가 이어진다. 문바위를 통과한 후 다시 능선위로 올라가면 도솔봉으로 이이지는 암릉위에 다시 서게되고 바로 작은금샘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 달마산은 특이하게도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바위틈에 여러 개의 샘이 존재하고 있다. 산의 신령함인지 달마산의 특이한 지질 탓인지 돌산의 정상부에 샘이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금샘을 비롯하여 용담은 대표적인 샘이고 금샘 또한 큰 금샘과 작은 금샘이 있으며 금샘이라는 이름처럼 찾기가 쉽지않다. 달마산 문바위재 정상 부근에 작은금샘이 있는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작은 구멍이 뜷린 것처럼 있기 때문에 바위투성이 속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금샘을 찾아야 한다.
요 부근에서 작은금샘을 찾아야 합니다.
등로길을 버리고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서 찾으면 작은금샘이 있는가 봅니다.^^
바위지대를 힘겹게 지나는데 뜻밖에 다류대장님을 만납니다. 밤을 세워 내려오셨다네요. 바람 소리와 함께 쒹~ 하며 사라집니다.
♤ 작은 금샘/ 높이 1m 높이의 바위벽에 구멍이 뚫려있다.
작은금샘은 금서동굴 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금샘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으며, 해남군에서는 금샘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달마산에서 문바위를 지나 작은금샘표지판이 나온다. 우측은 미황사가는 길이고 직진하는 능선길이 원기맥길인데 능선위로는 길이 희미하고 왼쪽으로 우회를 하게 된다. 왼쪽 홈통같은 바윗길로 7~80미터를 내려서면 큰 동백나무(?)가 한그루 있고 여기서 우측길과 직진하는 두갈래 길이 나오는데, 우측 큰 바위밑으로(비박터인지 기도처인지 그을린 흔적있음) 가는 길이 원기맥길로 우회로이고, 동백나무 있는 곳에서 직진하는 내림길로 30여미터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꺽어지며 10여미터 거리에 작은금샘이 있다. 기맥길을 이어 갈려면 되돌아 나올 필요없이 직진해 나가서 우측 위로 올라가면 기도처(?)쪽에서 오는 원길과 만나고 조금 더 올라가서 좌측으로 서서히 돌아오르면 주능선위로 올라간다.(박종율대선배님 산경표를 따라서 카페에서 펌)
대밭삼거리에 있는 이정표입니다.
이렇게 석문도 있고, 쉬어가라며 벤치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름 대로 주변이 산죽밭입니다.
♤ 대밭삼거리, 달마산 1.6km, 부도전 0.7km
벤치가 마련된 휴식공간인 평암마을갈림길 대밭삼거리를 지난다.
도솔봉 군부대 통신탑이 멀리 보입니다. 바다 멀리 보이는게 노화도와 보길도인가 봅니다. 앞에 계단이 보이는게 귀래봉입니다. 다류대장님이 귀래봉에서 기다리고 계시네요. 이후 마지막까지 다류대장님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 큰금샘
계단 암봉이 보이는 봉우리를 넘어서 왼쪽으로 너덜지대를 내려서면 달마산의 숨은 비처인 큰 금샘이다. 데크 계단을 지나 봉우리를 넘고 밧줄을 잡고 내려선후 다시 밧줄을 잡고 올라선다. 작은 석문도 지나며 희미한 길을 따라 간다. 커다란 바위절벽 아래 바위를 깍아서 만든 듯 신비하게 자리한 금샘에 도착한다. 수량도 많고 맑고 깨끗하다. 누군가 돌을 샘 바닥에 깔아서 정비를 해둔것 처럼 보인다. 이 금샘물은 부근 산아래 사람들에 의하면 피부병이나 여러 질병의 치료에 쓰여 왔다고 한다. 귀한 곳이고 소문이 나면 오염이 될것을 우려해 해남군에서는 이정표도 만들어 두지 않았다.
금샘에 대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때 무예라는 스님이 적은 설명이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州)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 있고 삼면은 바다에 닿아 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 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 귀래봉(471.1m)
귀래봉에서 뒤돌아 보면 달마산의 봉수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완도 5봉(심봉,상황봉,백운봉, 업진봉, 숙승봉)의 산들이 지척으로 다가와 보인다.
♤ 진도(珍島)
- 명량대첩공원(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한 명량대첩공원은 임진왜란 3대 수군대첩지의 한곳으로 이순신이 대승리를 이룬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역사성을 지닌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 중 나라의 위태로움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그날로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간신히 12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들은 4백여척에 2만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천안 직산읍)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에 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과제였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때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한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 매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 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름이라. 공들은 살 생각을 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 말라' '나라를 위해 죽기로서 싸워라, 만일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졌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해남 송지면 어란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이를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장군은 적장 마다시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 33척으로 세계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 '이충무공의 고함이 생생' 우수영 명량대첩지
울돌목은 전남 진도와 해남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로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의 격전지이다. 좁은 해협으로 매우 빠른 급류가 흐르고 조류가 갑자기 변하기도 한다. 가장 좁은 부분은 폭이 330m, 수심 19m 미만으로 격류가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명량 또는 울돌목이라 한다.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이순신장군은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격파해 명량대첩을 거뒀다. 또한 수적인 열세를 적군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주민들이 바닷가에서 손을 잡고 돌며 아군이 많아 보이게 했다는 강강수월래의 기원이 있는 곳이다. 충무사에 있는 명량대첩비는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으로 1688년에 이충무공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우수영에 건립했다. 일제는 임진왜란 때 자기네들이 크게 패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1942년 명량대첩비를 강제로 뜯어내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숨겼다. 해방 후 우수영 유지들이 충무공의 유적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갖은 난관 끝에 찾아내 다시 세웠다.
♤ 하수골재/ 도솔봉 주차장 3.1km, 달마산 정상 2.8km
"하수골재"가 정확한 이름이며 좌측 아래 계곡도 하수골이며, 처음 지도를 제작한 사람의 오기로 잘못된 명칭이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도솔봉 주차장 3.1km, 달마산 정상 2.8km 이정표가 있습니다. 암릉구간 오르내림이 많아 불선봉에서 2.8km 진행해 오는데 1시간40분이 소요된다.
떡봉에 있는 이정표인데 누군가 국가지점번호판에 떡봉이라고 친절하게 써놓았습니다.^^
도솔암 요사채가 보입니다.
♤ 떡봉(421.9m), 도솔암 1.7km
정상은 널찍한 공터이다. 등로 좌측으로 북평면 평암리 들판과 남해 바다 그리고 우측 멀리 완도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평암저수지도 발 아래 보이고 비산비야로 이뤄진 바닷가 평암리 들판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다류대장님!
삼성각도 있더군요. 삼성각에서 바라보는 도솔암이 마치 새의 둥지 같아 보인다고 하네요.
자연과의 조화가 멋집니다. 저 석축을 쌓아올린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그림 같은 모습이에요.
♤ 도솔암(兜率庵)/ 기맥길에서 우측으로 50m
흔히 달마산 도솔암을 소개할 때 하늘에 맞닿은 암자, 땅끝에서 만나는 하늘끝, 남도의 금강산인 달마산에 핀 연꽃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에 수행하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암자로 조선조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대패한 왜군들이 해상 퇴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중, 암자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소실되었는데,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깍아지른 듯한 암릉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암자,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도솔암, 미황사의 12번째 부속 암자로 해남 8경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도솔암의 풍광이 마치 금강산에 온 것처럼 착각을 느끼니 왜 이곳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달마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로 원효성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스님들의 기도처로도 사용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法身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드라마 ‘추노’ , ‘각시탈’,‘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가 촬영된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암자이기도 하다.
도솔암 좁은 마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면의 바위봉우리들입니다. 도솔암 아래 바위벽에 용담이 자리한답니다.
♤ 용담(龍潭)샘
바위틈 사이에 있는 용담샘은 굴 천정에 드러난 물길에서 물이 굴바닥에 떨어져 샘이 생기는데, 이러한 샘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몇 곳이 안 된다고 한다. 이 굴은 ‘용굴’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굴에서 두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 받아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용담물은 가끔 누런 빛을 띄는데 이는 하늘로 올라가던 황룡이 아쉬움에 자신의 몸에난 가루를 샘의 벽에 묻혀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금샘과 마찬가지로 석질의 영향으로 금색이 된듯한 이야기다.
- 송지면과 북평면과의 경계를 따르다 도솔봉 군부대를 지나고 도솔암주차장에 내려선 이후 완전하게 땅끝에 이르는 마지막 송지면으로 접어듭니다. 국통사에서 군생활을 마쳤는데 예하대대인 57대 통신대 도솔봉을 만나니 반갑더라는...
군부대를 지나고 저 아래 보이는 도솔암 주차장으로 내렸다가 이리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도솔봉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정상석을 여기 405m봉에다 세워두었군요.
♤ 도솔봉(兜率峰, 417m)
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있으며 달마산 5봉(관음봉, 불썬봉, 귀래봉, 떡봉, 도솔봉)중에 가장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은 군부대(9353부대)가 자라잡고 있어 오를 수가 없기에 그 옆 봉우리에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도솔봉의 지명은 소백산의 도솔봉, 불갑산의 도솔봉. 선운산의 도솔암 등 우리나라 산봉우리 중에 꽤나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다. 도솔(兜率)은 도솔천에서 유래하며 범어(梵語) 듀스타(Tusita)의 음역으로서, 의역하여 지족천(知足天)이라고 한다. 즉, 이곳에 사는 무리들은 오욕(五欲)을 만족하고 있음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는 욕계(欲界) 6천 중 제4천인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원은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른다. 이 내원궁은 석가모니가 인도에 태어나기 직전까지 머무르면서 중생교화를 위한 하생(下生)의 때를 기다렸던 곳이다.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은 현재 이 내원궁에서 설법하면서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하여 성불(成佛)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 정토(淨土)로서, 정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미륵보살 신앙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삼국시대에 크게 융성하였으며, 신라시대 원효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하였고 특히 백제 무왕은 미륵보살이 인간세상에 하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도솔봉 정상석에서 전술도로로 내려서는 중입니다. 드디어 가야할 땅끝마을의 사자산 전망대가 바라보입니다.
내리막길에 다류대장님 길옆에 삐져나온 커다란 차돌바위에 정강이가 까입니다. 어휴~~ 한참을 절뚝거리시네요.
전술도로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약 220m 내려가면 왼쪽으로 땅끝마을 가는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진하면 마봉리로 알바~
- 도솔봉으로 오르는 임도와 내려서는 임도가 북평면과 해남군 마지막 면인 송지면과의 경계이다. 임도주차장으로 우회하여 임도를 조금 따르다 좌측으로 보이는 몰골이재 들머리가 해남군 마지막 면인 송지면 집입부이다. 임도를 계속 따르면 마봉리이다. 이제부터는 송지면 마봉리를 지나 송호리와 통호리를 나누며 진행한다.
최근 만들어졌다는 남파랑길도 합류합니다.
조선시대 삼남길이 지나는 불골이재 이정표입니다. 가볍게 둘레길을 하시는 사람들이 쉬고 있네요.
♤ 불골이재/ 몰고리재, 땅끝 전망대 8.2km, 땅끝마을 10.3km
고개 좌측 해남군 송지면 통호리(통호저수지)에서 우측 도솔봉약수터가 있는 마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사거리안부에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다. 땅끝천년숲옛길, 달마고도길, 남도오백리역사숲길 등 세개의 둘레길이 만나는 곳이고 삼남대로도 이 재를 넘어 서울로 간다.
삼남길이란 제주도 관덕정(觀德亭)에서 해로로 이진항에 도착하여 해남 땅끝마을 이진리 이진항에서 부터 육로로 석제원(성전)-영암-나주-광주-장성 등 전남의 도시들을 지나 전북 갈재-정읍-태인-왼주-삼례-익산-여산, 그리고 충남의 은진-논산-노성-공주-차령-천안-성환역을 통과하여 경기의 평택(진위)-수원(청호역)-유천을 거쳐 과천 남태령-동작나루를 넘어 남대문까지 천리가 넘는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 우리나라에서 최장거리 도보코스이며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은 임지로 파견되고 진상품을 이동했으며,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나 장사를 하는 보부상들도 이 길을 걸었으며 또 제주도나 남도 지방으로 유배를 왔던 선배들이 걷던 길이기도 하다. 여기부터 땅끝까지는 둘레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양회임도입니다. 우측 마련마을에서 올라오네요.
다류대장님과 함께한 이후로 속도가 엄청 빨라졌습니다. 후반부인데도 평속 2.1이던게 오히려 2.4로 올라와 있습니다.^^
다류대장님은 저를 생각하시느라 일부러 속력을 늦춰 천천히 가주시고,
저는 마지막 구간 3(달마봉)-3(도솔봉)-4(땅끝)로 10시간을 잡고 4시에 도착하는 예상을 했는데 앞에서 끌어주시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님쪽 해안가로 사구미해수욕장인가 봅니다. 갈두리 땅끝마을에서 군내버스가 사구미를 들어갔다 나오더군요.
♤ 마련고개, 해남땅끝 5.71km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와 통호리 넓골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헬기장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봉분이 있는 넓은 공터를 지나 우측에서 고개 정상까지 올라와 있는 양회임도와 만난다. 기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언제나봉입니다. 아무런 표시나 특징이 없어요. 돌무데기 몇 개 널려 있네요.
사자봉 전망대와 사자포 갈두리 마을이 보입니다.
♤ 언제나봉(230.7m)
해남군 송지면에 있는 땅끝기맥 상의 산이다. 송호리와 통호리 경계에 있으며 이후 해남군 송지면 마지막 행정구역인 송호리로 진입한다. 커다란 묘역이 있는 양회임도 공터에서 바위 너덜 지대의 등로를 올라서면 큰 바위들이 정상을 차지한 언제나봉이다. 이름의 유래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기맥은 왼쪽으로 살짝 휘어서 진행된다.
갈두재 직전에 이렇게 양회임도가 올라와 있습니다. 저 납골묘 때문에 길을 만든 것인지...
다류대장님! 대단하시네요. 어플도 세개(오룩스, 산길샘, 트랭글)를 운영하며 진행하신답니다.
젊은 사람이 무릎관절이 아프다면 먼가가 잘못 된 것이죠. 과체중이라던가, 배낭이 무겁다던가... 배낭 무게도 경량이고 가벼운 운동화에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튼튼한 파워와 체력을 바탕으로 빠른 속력으로 기지맥을 질주하고 계십니다. 무도 지맥팀이 묶음으로 지맥을 진행하는 데는 그만한 노하우가 받쳐주니 가능한 것이겠지요.
♤ 갈두재(葛頭峙)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의 송호(松湖)해수욕장과 갈두(葛頭)리 사이를 잇는 고개다. 송호해수욕장이 우리나라에서 최남단의 해수욕장이고, 갈두리가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을이라고 보면, 이 재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남단의 재라고 해야 하겠다. 규모로 보아서 재라고 하기보다는 고개이다. 우리나라 최남단을 통과하는 77번 국도가 지나가고 예전에는 도로를 건넜다는데 다리 건너 우측으로 해남땅끝테마호텔이 생기면서 나무데크 아치로 연결된 구름다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다 와갑니다. 갈두리 땅끝마을에서 보는 전망대가 돌고래 모양이라는데 여기서 보니 로켓모양인데요.^^
갈두리항으로 보길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이 분주하게 오고갑니다.
갈무리 능선을 걸으며 가까이 보이는 흑일도와 백일도 뒤로 바다 멀리 노화도와 보길도가 보입니다. 완도 뒤로 청산도도 보이고....
삼단으로 되어 있는 긴 계단을 올라 망집봉입니다. 전망은 당근 좋을 수밖에...
지나온 길인데 맨 뒤가 통신탑이 서있는 도솔봉입니다. 도솔봉에 가려 달마봉은 보이지 않네요.
사자산전망대가 눈 앞에 있습니다. 뒤쪽으로 보길도 들어가는 노화도....
♤ 망집봉(168m)/ 팔각정자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와 갈두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오르는 길은 데크목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멋있는 팔각정자가 설치되어 있고, 지나온 도솔봉과 가야할 땅끝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사자산에 이르는 마지막 사거리입니다. 직진하면 전망대, 우측으로 우회하면 땅끝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사자산 오르는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전망대 운영이 잠정 폐쇄되었습니다. 관광상품과 음료를 파는 매점은 문을 열고 있네요.
댜류대장님! 보성에 아버님 산소에 들렸다가 상경해야 한다며 서둘르시고(괜히 저 때문에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운전때문이라도 맥주 한잔, 소주 한잔 기울일 시간이 안 되네요. 반갑기도 하고 고마워서라도 제가 회 한사라 사야 하는건데... 기회가 되지 못합니다.
국가 행정시스템이 방역차원에서 전시 상황을 상정하고 살아 움직이니 모노레일도 멈추고, 전망대도 운행이 멈춰져 있습니다. 올라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해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아요.
♤ 사자산(獅子山, 156.2m)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며, 예전에는 칡이 많이 난다고 해서 갈두산(葛頭山)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사자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땅끝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산 전체가 공원화 되어 버려 마치 서울 남산이나 부산의 용두산처럼 되어있다.
저기가 노화도이고, 아마도 전망대 위로 올라가서 본다면 그 뒤로 보길도도 보이겠지요.
가까이 갈두리항 외곽에 흑일도와 백일도가 있습니다.
♤ 갈두산(葛頭山, 156.2m)/ 봉수대(烽燧臺)
이곳은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이다. 갈두산 봉수는 광무(光武) 10년(1906) 영암군에 속하였던 송지면(松旨面)이 해남군에 이속(移屬)됨에 따라 편입된 지역이다. 이곳 갈두산 봉수대는『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에 “동쪽으로 강진현 좌곡산(佐谷山, 현 북일면 봉태산), 서쪽으로 해진군(海珍郡) 화산(花山, 현 해남 화산면 관두산(館頭山))에 준하여 설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조선초에 설치되어 고종(高宗)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 세종(世宗)의 4군6진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국가의 급한 소식을 왕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지역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군사통신방법으로 그 수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평상시에는 1개의 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범하면 4홰, 접전하면 5홰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만약에 적이 침입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나 각성 또는 기(旗)로써 알리거나 봉수군(烽燧軍)이 직접 달려가 알리도록 했다. 갈두산 봉수대는 당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파괴되어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로 쌓았으며 봉수의 직경은 4.5m 내외이다. 봉수대의 하부는 바위돌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사자산에도 저렇게 봉수대가 있었구요.
♤ 사자산 전망대 앞에 있는 땅끝지명 유래비
땅끝의 유래는 한반도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인 해남군 송지면이다.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 깃점을 이곳 해남현에서 잡고, 북으로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라 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고 있다.
마지막 땅끝탑으로 내려서는 계단입니다. 다류대장님이 앞에서 팍!팍!팍!팍!^^
다류대장님 축하를 받으며 1대간9정맥6기맥을 완주한 순간입니다.
전에 왔을땐 요런 뱃머리가 없었는데... 땅끝에서 바다를 향하는 포토포인트로 잘 만들어 놓았네요.
조고문님 바다에 발 담그지 않으면 무효라고 하실까봐 저리로 내려가서 물 젖셨습니다. ㅎㅎ^^
♤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전망
전망대에 오르면 북으로는 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망집봉, 개재봉, 언제나봉 등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동으로는 흰 물살을 가로지르며 보길도, 백일도 등을 오가는 유람선이 드나드는 갈두항과 마을이 장난감처림 내려다 보인다. 멀리로는 마치 수만 위의 수석처럼 바다 위에 있는 백일도, 동화도, 완도군 상황봉이 바라보인다. 남으로는 흑일도 오른쪽 뒤로 노화도, 보길도, 넙도 등이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양도, 어룡도. 장구도 등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 땅끝탑(土末塔)
땅끝 끝자락 토말탑이 있는 바닷가 갯바위가 위도(북위 34도)상으로 한반도의 끝이다.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사자봉 아래 바닷가에 있는 땅끝탑... 이젠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의 깃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을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를 잡아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다류대장님 속이 안 좋으신지 화장실을 먼저 찾으시고.... 아쉽지만 서둘러 닭골재로 향하신다기에 술 한잔은 고흥지맥에서 나누기로 하고 맴섬횟집에서 작별인사를 합니다. 저는 땅끝마을을 둘러보러 내려가고....
저 건물 모양은 득랑만 벌교에서도 본거 같은데... 남해안에 저런 건물이 많나봐요. 해양자연사박물관이라고 나와 있어요.
♤ 맴섬
땅끝탑에서 바다에 손을 담그고 갈두항으로 걸어나가다 여객선착장 입구에 있는 두개의 섬이 한쌍의 매미처럼 보인다는 맴섬을 찾아봅니다. 동해 추암 촛대바위 맹키로 저 맴섬 바위틈새로 해뜨는 일출 모습을 잡아 애국가 배경으로 내보내 더 유명세를 탔다는군요.
동네를 약간 거닐며 구경하다가 회덮밥을 시켜먹고 마무리를 합니다.
♤ 땅끝기맥 종착지
땅끝기맥의 최남단인 이곳 위도상으로는 34도 17분 21초로 더 이상 갈곳이 없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을 땅끝 또는
‘흙 토(土)’ ‘끝 말(末)’을 토말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상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이다.
양쪽으로 서해와 남해바다를 끼고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땅끝마을로 향하는 땅끝기맥의 힘찬 모습입니다.
두륜산 8봉, 달마산 5봉을 힘겹게 넘어서야 비로소 북위 34도 땅끝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어렵고 힘든 길이네요.^^
땅끝기맥을 1구간 68.48km, 2구간 40.24km, 3구간 36.83km 합계 145.55km로 끝냅니다. 접속구간 6.94km 포함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풍라라님...
까칠한 땅끝기맥 졸업 수고 많으셨읍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땅끝에는 눈이 없네요 ^^
늘...즐거운 맥길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맛점하시고
즐거운 한주 되십시오 ^^
무영객형님 감사합니다.^^
저도 혹시 몰라 체인젠과 롱스패츠를 지참했는데 눈이 없어서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습니다.
대둔산을 내려서며 어디서 잡아 뜯겼는지 왼손가락에서 찐득한 피가 흘렀습니다.
관음봉에서 달마봉 다가가면서는 줄잡고 바위에 올라서다 박치기를 해서 머리도 깨지고... ㅠㅠ
해를 넘기지 않고 목표한 여섯개 기맥을 마치게 되어 시원합니다.^^
에구..
부상까지..
한동안 몸조리 잘하세요^^
맛점 하시구요^^
날씨가 좋으니 그림이 기가 막힙니다.
땅끝이 쎄긴쎈가 봄니다.
두번으로 할줄 알았는데 세번으로 하신걸보니 우리는 7구간이나 했거든요.
땅끝기맥 완주 축하드림니다.
네 부뜰이운영자님!
핸드폰 겔9쓰고 있는데 3년이 되어가 신형으로 교체할까 싶습니다. 요즘 핸드폰 화질이 기가 막히더군요. ^^
2구간으로 끝내기에는 정보도 부족했구요
요즘 운동도 안하고 빈둥대니 살만 쪄서 두번에 하기가 버거웠습니다.^^
땅끝의 바윗길이 짐을 가지고 두번에 넘기는 역부족이었고요.^^
해남을 두번 방문하게 된걸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만 보길도 다녀올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운 마음 숨길 수 없네요.
무박 2구간으로 밤늦게 땅끝에 도착해 하룻밤 자고 다음날 보길도에 들어갔다 나오는게 원안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퐁라라님의 땅끝기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2년 7개월 여만의 대간, 9정맥, 6기맥 마무리도 축하드려요.~(두번)
암튼 대단하신 발자취를 남기셨네요.
그 체력과 마루금을 향한 열정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긴 여정의 파노라마를 일단락 지으셨으니 잠시 쉬어가셔도 되겠네요. ㅠ
달마봉 지난 작은금샘 부근에서는 다류님과의 반가운 조우있으셨구요.
이어지는 본격 지맥 탐사길도 기대해 봅니다.^^
화이팅!
감사합니다. 방장님!
항상 카페를 편안하게 이끌어주시니 모든게 가능한게 아닌가 합니다.^^
스포츠클라이밍 하던 분들이 운동을 못하게 되니 난리가 아닙니다.
저는 목디스크로 조기 이직하여 장거리 종주에 자리를 잡았네요. ㅋㅋ
하지만 장거리 종주는 살이 빠지지 않습니다. 근육운동을 해야 하는데 난감하네요.
학교 운동장이라도 나가 몇 바퀴 돌아야 하겠습니다.
남도쪽에 가시잡목이 많다하니 지맥 우선순위를 고흥과 화원으로 잡았고요.
비슬지맥은 철쭉에 맞춰 지나갈까 합니다. 한여름에는 강원도 주왕지맥을 할까 하고요.
나머지 지맥은 어떻게 순서를 세워야 할지 조언을 구하러 사무실에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풍라라 아저씨 땅끝기맥에 데에서 할아버지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호남정맥 할때 여기가 땅끝기맥 분기점이라고하쎴어요 그런데 저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말쓰에는 언첨 힘들다고 했어요 대전에 한겨레 산악회 똥벼락 아저씨와 한께 하셨데요 유일하게 산악회는 거기밖에없다고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완주 축하드려요 풍라라아저씨 제 산행기는 네일 올릴게요
원균아!
아저씨 성이 풍(ㅍ ㅜ ㅇ)이 아니라 퐁(ㅍ ㅗㅇ)이란다~~ ㅎㅎ
할아버지한테 대간과 기지맥을 표시한 지도 큰거 없니?
교육 보조재로 지도를 옆에 두고 수시로 살펴보면 좋을텐데...
원균이가 땅끝기맥을 하기에는 조금 버겁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똥벼락아저씨 후기는 가끔씩 읽어보고 참고하곤 한단다...
원균이 산행기가 얼마만큼 발전되고 변화가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네~^^
원균이는 커서 뭐가 될까?
장래 희망을 정하고 차근차근 목표에 접근했음 싶은데.... 댓글 고마버!!^^
땅끝기맥 졸업을 축하축하 드립니다~
항상 안산을 발원드립니다~()()()
법광선배님! 발원 감사합니다.
축하 말씀으로도 감사하지만 모임에서 소주 한잔 주신다면 더더욱 영광이겠습니다.
지맥이 쌓여갈수록 주량도 느는거 아닌지 염려되네요.ㅋㅋ
축하드립니다.
그 까칠한 땅끝기맥을 드디어 졸업하셨군요...
산행기 초반 업적(?)을 읽어보니 대단하십니다. 그저 기죽어서 읽어보다가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백과사전 책 읽듯 새로운 형태의 산행기를 읽어가며
잘 모르는 것도 많지만 욕심내지않고 편안히 봤네요....
앞으로도 여유로운 산행 계속 이어져가기를 응원합니다.
속도와 거리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편히 누리며 걸으시기를~~ 홧팅입니다 ^^
부케님!
보는 것과 실제는 천양지차이네요. 매번 부족하다는 한계에 직면합니다.^^
이번 구간 포인트는 대승봉 아래 너덜이 나오면서부터 스틱을 접어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구간 스틱이 불필요 하더군요.
조금만 더 가면 험한 길이 끝나겠지 하며 끝까지 들고 갔더니 정말 걸치적 거리데요.
달마5봉 구간 머리에 빵구가 난것도 다 스틱 때문이었습니다. ㅠㅠ
마지막 도솔봉에서 전술도로에 내려서면서 피면 되겠더군요.
기지맥은 목표를 내세우는 산행이라 여유를 갖기가 힘이 들고,
여유로운 산행은 중간중간 테마 산행을 혼합해서 해보겠습니다.
자주 출정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그러질 못하니 한번 갈때마다 장거리로 욕심을 내게 됩니다.
속도는 욕심을 내지 못하니 밤을 세워 가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고요.
그래서 1월에 고흥지맥은 무한에서 속도로 하고,
여유로운 산행으로 지맥에서 벗어나 있는 팔영산을 산악회버스로 다녀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매번 성의있는 댓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멋진 기맥 땅끝기맥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두륜산 달마산 땅끝마을 환상의 기맥길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님이 댓글을 왜 안 주시나 하고 많이 기다렸습니다. ㅋㅋㅋ
그게 좋은거 아닐까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세파에 물들지 않고...
가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곰처럼 우직해 보입니다.
이번 구간에서는 세르파님 띠지를 못 본것 같네요.
촌놈이 주작-덕룡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달마5봉을 넘다보니 세상이 다시 보였습니다.^^
항상 응원하는 댓글 감사합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산 월출산 주작산 덕룡산 두륜산 달마산 명품산행입니다 띠지를 천으로 하여 친자연적으로 하여 세월이 가면 자동 소멸됩니다 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
아하!! 친자연적인 띠지라는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띠지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 비슷한 것을 세르파님 띠지로 착각하기도 했답니다.^^
나좀 알아봐주쇼 하는 띠지는 왠지 생짜인듯 해서 거부감도 있습니다.
게다가 나무의 생장을 목조르는듯 해서 느슨하게 풀어주는 경우도 있고, 가녀린 가지로 옮겨주기도 한답니다.
색이 바래 충분히 익은 오래된 띠지가 정겹더군요.
모든건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띠지는 본래 목적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신주단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안내 역할의 임무를 다하면 후답자에 의해 교체되는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운명이죠.^^
세르파님도 흰소 해에 힘 많이 받으세요.^^
1대간 9정맥 6기맥 마무리 하심을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닭골재에서 출발하는 순간 누군가 지난 흔적이 희미하게
보여 누군가 지나갔나?
내가 잘못 본것일까?
하며 지났더랬습니다.
이후 달마봉을 지나 암릉구간을 내려서는데 앞에서 보이는
홀대모시그널...
누구실까?
궁굼하던차에 돌아 보시는 퐁라라님...
멀고도 먼 해남의 땅끝에서의 조우 참 반가웠습니다.
탄력받아 가던 길이라 조금더 진행해서 기다리게 되었네요.
코로나-19로 인해 봉쇄 되어버린 땅끝탑...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언제 또 오겠냐 싶어 휘리릭...
미리 빡빡한 일정을 잡지 않았다면 함께 하며 축하를 해드렸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다음을 기약 하게 되었네요.
함께 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고흥지맥에서 반갑게 뵐수 있기를요 ^^
네~ 다대장님!
홀대모시그널 11장 가져가서 아홉장 달았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누가 뒤에 따라올 줄은 몰랐네요.
오소재~닭골재에 5장 달고, 이후로 4장 달았습니다.
홀대모라 홀로 졸업을 맞이하는데 익숙합니다만 생각지도 않게 다대장님 축하를 받아 영광이었습니다.^^
앞에서 끌어주신 덕분에 여유있게 마무리 하였답니다.
이후 해남으로 나가 목포에서 서울로 환승했습니다.
감사드리고 고흥에서 뵙겠습니다.^^
6기맥 완주하심을 축하합니다. 땅끝을 한 지가 오래전인데도, 기억은 새록하군요. 항상 안산하시고요..^^
감사합니다 현상선배님!
땅끝기맥을 한번이라도 하게되면 그 기억이 영원히 각인될듯 합니다.
바다를 양쪽에 두고 암릉을 오르내리는 경험은 땅끝기맥이 아니고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특히나 완도의 장보고, 진도의 이순신장군이 양쪽에서 호위를 하고 계십니다.^^
지역에선 아침고개(조령)의 전설이 말해주듯,
해남윤씨와 더불어 연안이씨와 여흥민씨의 위세가 상당했던가 봅니다.
우슬고개와 대흥사 입구 구림리에 매장된 동학도의 원한도 아직 씻겨내리지 않았다고 하네요.
벌써, 6기맥까지 완주하군순요. 대단하십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길운영자님!^^
고흥지맥을 열공하고 있습니다.
이후 2월달엔 화원지맥으로 갈까했는데 서해안에 눈이 많이 오는군요.
3월로 변경해야 할듯합니다. 2월엔 어디로 가야할지 벌써 고민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