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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미술과 수시 날입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개하고 성경을 펼쳤더니
땅 나누기 본문인데(수 14:1-15) 아낙 사람의 땅을 일부러 요구하는 당찬
갈렙의 모습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 늘 2인자로 살아갔지만,
개의치 않고 충성하는 갈렙입니다. 좋은 땅 비옥한 땅을 요구할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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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면서도 정복하기 어려운 헤브론 산지(아낙 자손)를 취하겠다는
본문입니다. "주님, 갈렙이 온전해지자 전쟁이 그쳤다고 했는데 아직도 내
주변엔 전쟁과 아우성이 있는 것은 내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인 것을 고백합니다.
성도는 매사 공정하고, 충성스러워야 하오니 저도 갈렙과 같이 젊을 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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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나, 흔들리지 않고 앞장서서 하나님의 평강을 전달하는 통로로 살게
하옵소서. 무미과 시험을 치르는 예에공에게 열정을 주시고, 공정하게 시험이
치러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수랩의 선생님들의 수고를 보듬어 주옵소서.
특별히 학생들에게 담담히 지문을 해석하게 하시고, 구성할 때 명철을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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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오브제가 낯설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태풍이 회오리치는 바람에 계획했던 일정을 일부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젯밤 집 앞 공터(지침리)에 차를 세워놓고 갔다가 아침 일찍 고증 찾기에 들어
갔습니다. 남초등학교 사거리에 성신이 누나 피아노 학원이 그대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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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기옥, 공옥, 일성이네 골목길부터 앵비집 살던 우리 집은 도시계획에
비켜갔는지 40년 동안이나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특한지고. 우리 집
낮은 담벼락을 30cm쯤 올린 흔적이 있고, 기옥이네와 우리 집 경제 선의
유실수들이 저를 알아봐 주는 듯했어요. 오메 반갑던 그. 무화과, 피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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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저건 사과나무일 것입니다. 벽을 안고 빙 돌아 앵비집을 내다보았어요.
우리가 살던 왼쪽 방, 영택이 형이 살던 오른 편 방에 모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사람이 사는 모양입니다. 부엌도 그대로 있었어요. 저 부엌에서 모닥불을 펴놓고
날을 하얗게 샌 것은 둘 만의 비밀입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서 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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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앤딩 장면을 소환해보시라. "미안해, 너무 늦었지" "지금도 예뻐요
보고 싶었어요" 앞집 순옥이네 집이랑 방의 도랑까지 전부 도로로 변해버렸어요.
40년 잠깐 같은데 강산이 4번이나 바뀐 셈입니다. 조금은 센티해진 마음을 가지고
남초 등 쪽으로 길을 잡았어요. 골목길 커브가 광천이 형네 자개 농 방인데 텃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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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홍신이네 이발소 자리인 피아노 학원은 아직도 잘나가는 모양입니다.
이발소부터 남학교 방향으로 50m쯤이 제가 초등학교 1학년까지 살았던 지침리
69번지입니다. 6가구40명이면 완전 연립주택입니다. 이 길도 비포장도로 양쪽으로
실개천이 흘렀어요. 우리 집 토방 마루에서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도랑이니,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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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온 날은 집 안으로 물이 차 들어왔어요. 허리까지 물이 찬 날은 형들이 길에서
메기를 양동이에 마구 주워 담은 적도 있었어요. 소금쟁이 버들치 같은 1급수들 뿐
아니라 가재도 살았다고요. 정말이에요. 봉창을 열고 상여 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어요.
제가 있다 금씩 철학적인 데에는 어려서 상여 나가는 것을 봐서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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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에 석가모니의 '석'자가 있잖아요. 아, 문방구입니다. 내 친구 지행이네
문방구는 젊은 과부였던 지행이 엄마가 했어요. 우리 육남매 모두 담남 출신이니
이곳에 무조건 6년씩은 들락거렸을 것입니다. 이거 보통 인연은 아니지요.
지행이가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불 꺼진 문방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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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쓸쓸할 수가 없습니다. 지행이네 문방구 옆으로 형용이네 집, 연주네,
은영이네, 배 기술 선생님댁 그리고 300m를 가면 지침리79번지 빨간 별돌
수곤 씨 저택이 나옵니다. 우리 옆에 양철 대문은 갑진이 스님, 유진숙 셈이
살았어요. 이곳은 중2이후의 역사이니 패스하겠습니다. 우리 집 앞에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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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가 있었고 홍신이네 이발소까지 200m 길이의 도로가 초등학교 사거리와
만납니다. 물론 이곳도 양쪽에 개천이 흘렀는데 꽤나 폭이 넓어서 고기가 많았어요.
도효형네 집은 마트로 변했고 우리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아쉬워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확실해요. 어릴 적에는 꽤 먼 길 같았던 '중앙교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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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상회' 바로 뒤에 있었어요. 대성 상회가 담양에서는 '칠칠 상회'와 함께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어요. 이 길로 쭉 가면 관방 천이 나옵니다. 이 길은 내 친구
기환이네 빨간 벽돌 하우스입니다. 담양에 문화재급 집이 3개(수성병원, 석유 집,
기완이네)가 있는데 그중 하나이지요. 예장 '중앙교회를' 들어가 보았어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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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네요. 제가 5살 무렵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들어온 예배당입니다.
한집 살던 창의 엄마 손잡고 여름성경학교를 왔을 것입니다. 성경 큐즈 대회를
하였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6)" 아-싸, 제가 외우고 있는 유일한 성경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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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종탑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교회 연역이 목사님 브론즈와 함께 있어서
모바일에 담아왔어요. 내일 만약 시간이 된다면 주일 예배를 이곳에서 볼 생각이에요.
제가 보기에 중앙교회는 보기 드문 성경 중심의 교회같습니다. 길을 돌려 담양 읍 교회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남초등 사거리부터 우리 약국까지는 등하굣길에 가장 많이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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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입니다. 남교 앞에 살 때부터 '해동 주조장'에 막걸리 심부름을 다녔는데 천변리로
이사를 가고서도 1 되짜리 노랑 주전자를 들고 중1 때까지 다녔을 것입니다. 가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막걸리 한 됫박에 20원이나 30원쯤 했을 것입니다. 50원짜리
동전을 주면 거스름돈을 갖는 재미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절대로 거스름돈을 안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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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손님이 잔돈을 주면 애 버릇 나빠진다면서 못 주게 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저는 딸 둘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고 공주처럼 대우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 오지 않으셨던 부모님을 원망한 것은 아니지만, 한이 되었던지
예에 공을 키울 때는 입학부터 환경정리, 체육대회, 각종 행사 바자회까지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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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일으키며 열라 쫓아다녔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초중고까지는 부모의 교육
열이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조국 장관을 비롯하여 제가 아는
단 한 사람도 부모덕을 안 보고 용이 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절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자녀교육 하나는 성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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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초등학교 때는 해동주조장과 수성 병원 안집 길이 담양에서
가장 넓은 고샅이었어요. 옛날 집이었던 수성 병원 안집 쪽 실개천이 맞은편 쪽보다
수심이 더 깊어서 자전거를 탈 때는 왠지 피하거나 조심해서 다녔어요. 수성 병원
안집은 늘 닫혀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고, 중학생 때 김 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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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집 쪽에서 거꾸로 들어가 서너 번 단감을 서리해 먹었어요. 육담이 형님이 가끔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개천을 띔 짝으로 막고 품었는데 수성 병원 바로 앞은 한 번도
미꾸라지 잡는 것을 못 보았네요. 그곳이 깊어서 그랬을까요? 수성 병원 원장이
무서워서 못 잡았을까요? 그 형님은 완전 어부거든요, 한 번은 유심히 고기 잡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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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어요. 네모 삽과 타원형 삽을 가지고 개천의 물을 1차로
차단하는 둑을 쌓고 물이 많을 때는 둑 3개를 쌓을 때도 있었어요. 목표지점을 정한
다음 10-15m 정도를 막고 양동이로 물을 품어내더라고요. 물이 빠지면서 고기들이
하얀 배를 내밀며 파닥거리면 세숫대야나 양동이에 주워 담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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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이물을 땅 밖에 쏟을 때가 있어요. 피라미나 붕어가 튀나 했는데 글쎄 자라가
기어가는 거예요. 와 대박. 고기를 완전히 다 잡은 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미꾸라지를
잡아야 하니까요. 진흙을 일일이 손으로 파헤치면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가 노란 배를
내밀고 나오면 또 집어 담습니다. 보통 이 작업은 반나절이 걸리는데 바께스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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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은 것을 보면 그땐 여기저기 고기가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육 남이 형님은 읍 교회
쪽 정확히 노인정 앞에 포장마차를 깔고 어묵과 덴뿌라를 튀겨서 팔았어요. 제가 고
3때까지 했으니까 얼추 10년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담양 토박이 중에 육 남이 형님을
모르면 간첩일 것입니다. 그 집 덴뿌라는 고구마와 오징어로 튀겼는데 100원에 11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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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으니 하나에 10원입니다. 그 형은 100원짜리를 미니로 10원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기분 좋은 날은 개평을 3개도 줍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해동 주조장 쪽 개천에서 팽이
치기를 하고 썰매를 탔던 추억이 있어요. 물론 그때도 수성 병원 쪽 개천은 들어가지
않았어요. 빠질까봐서. 우리 집은 제가 중2가 되면서 천변리에서 김 수곤 씨네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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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했고 다시 번지수만 지침리79번지가 되었습니다. 큰누나가 서울로 돈 벌러 간
후 중풍으로 몸소 누우신 할머니가 중3 때 이곳에서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복 순이
아버지가 치러주셨고, 아버지 허리가 삐끗 한 일이 생기면서 퇴직을 하시자,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정읍에 여관을 하신답니다. 당시 고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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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을 키워야 되는 부담감이 컸을 것입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제가 본격적으로 껄렁
거리기 시작했어요. 3년 만에 다시 우리 집은 앵비 집으로 이사를 했고 제가 우리 집
대장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없는 우리 집은 아지트로 안성맞춤입니다. 이때 저는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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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를 다녔기 때문에 3년을 다시 해동주조장-성당-터미널을 경유한, 등 학교를 했어요.
밤에는 할 일도 없이 쏟아 다니면서 육 남이 형님을 괴롭혔어요. "포장마차 문안
닫을래?" 제가 3년 전에 담양을 들렸을 땐 없었던 '해동 문화예술촌'을 보고 기절할
뻔했어요, 너무 잘 만들어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이 주조장을 1968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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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락거렸으니 무조건 반 백 년 역사의 증인인 셈입니다. 주조장 건물 상량문에
SINCE1966으로 표기된 것은 수정이 필요합니다. 제가 들락거리기 시작한 때가
1966년이니까 최소한 10년 정도는 비-포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18살 무렵
담양의 부자는 성림 택시, 김 만수 씨, 해동 주조장 조 인훈 씨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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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림 택시나 김 만수 씨는 동창 승희나 은미가 있었는데, 조인훈 씨는 제 또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남 조 영규 씨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담양에는 대표적인
교회가 '담양 읍 교회'와 '중앙교회'일 것입니다. 저는 라면 땅 타먹으러 크리스마스
때나 여름성경학교 때 아주 가끔 읍 교회를 나갔어요. 절친 일도네 패밀리가 김 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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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삼촌 박 금호 목사, 어머니 권사, 성신이 누나 피아노 반주, 안신이, 성도,
형도, 이름만 봐도 은혜롭지 않습니까? 칠칠 상회를 하던 일도 어머니께서 제가
교회를 간다고 하면 헌금 내라며 50원이나 백 원을 손에 쥐어주셨어요. 서너 번
헌금을 안 내고 까먹긴 했어도 찜찜해서 예배를 참석하곤 했어요. 어느 날 사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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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졌어요. 중3 때로 기억하는데 여름성경학교에 참석해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손뼉 치며 따라 불렀는데 오후에 일도랑 둘이 나와서 특 송을 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아는 찬송가도 없고 해서 '쿵따라닥다 삐약삐약'을 하고 내려왔어요. 그 후로
창피해서 1년에 한두 번 가는 교회를 아주 끊어버렸습니다. 일도가 소년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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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혼자서 질풍노도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는데 내 동생 진호가 교회에다가 아주
살림을 차렸어요. 내 동생은 이곳에서 아내 김 0실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이 교회 다니는 이 0운, 고 0환, 갑0, 0권, 상묵, 서 권사님 정도를 알고 있네요
내 동생 진호와 저는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모험심은 제가 많았고 뭐든 생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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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반면, 진호는 훨씬 신중했던 것 같습니다. 진호는 내 비서면서
친구였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어째 거꾸로 내가 진호의 꼬붕이 된 느낌입니다. 어느 날
진호가 나를 교회 수련회에 데리고 갔다 오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고, 그 후로 진호의
존재감은 내 장자 방을 넘어 형 같은 아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자위를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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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짓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동생 놈이 형에게 알려줬습니다.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1981 여름 수련회로 기억합니다. 오다가다 교회 관계자들을 만나면 꼭 수련회에 오랍니다.
특히나 진호 친구 갑수, 성환, 광수, 상묵이가 하도 강청을 하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 갔습니다.
제 생각에 3000원인가 하는 회비를 진호 아니면 광호 형이 내줬을 것입니다. 교회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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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는 누군가가 대신 회비를 내주는 수련회가 전도차원에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엔테이션 할 때 전도사님인지 누난지 하는 분이 저더러 잘생긴 형제님이라고 불러줘서
약간은 부끄럽기도 하고 뭔가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담배를 나만 아는 장소에다 감춰두고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열라 따라 불렀습니다. 라면 땅 받아먹으러 다닐 때의 동심과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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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이 묘한 케미를 일으키면서 율동을 따라하게 합니다. 확실히 오순절이나 경배와 찬양
같은 뉴 에이지 음악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1981' 입 암 산상 수련회'의 기억은 이후 내 신앙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석교회가 대한예수교 장로교인데 거의 담양 읍 교회와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은 걸보면 담양 읍 교회도 통합 측 교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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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도회하면 내 동생 진호, 영숙이 누나, 용석이 형네 형수, 혜란이 그리고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주를 찬양합니다.'가 자동으로 세팅됩니다. 고 삐리들에게는 퀴즈 대회가
먹히는데 느닷없이 밥줄을 외우랍니다. “아-싸 그럴 줄 알고 다 외워뒀습니다. 밥 먹고 점심
시간에 가마솥 누룽지를 긁어서 먹었어요. 어찌나 꼬들꼬들하고 파삭파삭한지 그 맛을 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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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없네요. 2박3일의 마지막 날 기대했던 캠프파이어 대신에 촛불 집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동생들 무리들에 끼어 들판에 앉아 있는데 노 상채 장로님이 특강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저 양반이 우리 학교 문 광 례 선생님 남편이란 말은 들었지만 직접 대면하긴 처음입니다.
무슨 애기를 하나 하고 잘 들어봤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걸보면 내 친구 안 홍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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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하는 강의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촛불이 꺼질까봐 조심조심하고 있었고 만 다들
통성기도를 하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회중이 초상집에서 깽판 치는 목소리를 하고
초상 집이 되었습입니다. 원 매, 이것이 뭐다냐? 갑수는 자기 아버지가 죽었고, 상묵 이는 지
누나 연옥 이가 집을 나간 모양입니다. 동생친구들이 다 미쳤으니 믿을 놈은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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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입니다. 진호에게 가야겠습니다. 근데 진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자식은 어데 갔어?”
사방 천지에 내가 숨을 곳도 갈 곳도 없습니다. 나는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몇 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꼼짝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동생
친구들이 내 주위로 몰려왔습니다. 당시엔 창피하고 쪽팔린 상황 속에서 내게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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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는지 궁금했습니다. 성령파인 갑수가 내 안에 자아가 깨지는 체험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필시 이 놈은 지금 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 천을 경험했다고 하고,
입신에 방언을 한 사람을 수없이 보았고 만났지만, 저는 지금도 그때 왜 내 다리가 풀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신앙생활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방언을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신학을 해서 오순절을 비롯한 빈야드 식 신 사도운동을 기겁하지만, 개별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이 제게는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복음을 받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렸는데 수련회를 다녀온
후로 3-4년 선배인 광호 형이 지속적으로 내게 이웃사랑을 베풀려고 애를 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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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일도 모친께 픽업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일도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강호
형과 면회실에서 한 번 만났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걸어서 귀가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냐고”물어봅니다. 나도 모르게 은혜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진호 친구들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내려오는데 이런 기분이 뭐지 했습니다. 야구 모자를 쓴 복순이 자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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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게 웃습니다. 당시 제가 담양여고 칠 공주들하고 어울렸기 때문에 객사리 위쪽 여자들은
거의 다 압니다. 복순 이는 3남1녀의 외동딸입니다. 용수, 용만, 성만, 복순 이가 그 집
족보입니다. 용수이 형이 영권이 형 친구 쯤 될 것인데 담양의 기춘이 형 같은 존재입니다.
진흥 고를 다녔던 기춘이 형의 존재감은 태촌 이 형을 능가했습니다. 저는 아직 메이저급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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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깡패는 영곤이 형 같아야 한다고 믿고 그의 비주얼 따라 하기를 군대 가기 전까지 벤치마킹
했습니다. 항상 삐 카 번쩍한 깃도 신발에, 검정색 일자 통바지의 영곤이 형은 나의 우상입니다.
수련회를 기점으로 해서 0순 이가 우리 집을 들락거렸습니다. 담양 태권도장 근처
어딘가에 6개월 정도 산 적이 있었는데 애들끼리만 사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밥도 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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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도 만들어 주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보로 덮여진 단초한 밥상위에 메모지가
예쁘게 접혀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나랑 사귀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그 애가 싫지 않았지만 왠지 그 애를 건드리면 죄받을 것 같았습니다. “꼬맹이
아가씨,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요. 조금 더 크면 사귀자” 18살 촌놈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필시 수련회 때 내 다리가 후들 린 이후 내가 착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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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 이후로 10년 정도가 지나서 나는 진짜 성령체험을 하는
사건을 만납니다. 돈키호테 성향이 강한 난 18세부터(고2) 유원지 장사를 하고, 사춘기에
가장이 되어 식구들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내 뜻과 상관없이 광주항쟁, 순화 교육대를
거치다보니 환경에 떠밀려 학생 깡패를 하다가 지방대 응용미술과 한 학기를 채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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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체 국가의 부름에 응했고 헌병대로 차출되었습니다. 남들도 다 하는 군 생활이 제겐
얼마나 긴지 전출에, 영창에, 나라 지키려 간 것이 아니라 사고 치러 군대 온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나이 스물 셋에 만기 전역을 하고 악의 경쟁력을 거의 다
갖춘 나는 범 단(범죄조직단체)에 적을 두진 않았지만 독고다이로 전국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아, 나는 이대로 무엇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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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드나들던 그 예배당 건물과 해동주조장을 합쳐 해동문화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신기해서 교회 쪽으로 먼저 들어갔어요. 심상치 않은 조형물 두 개가 있었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들어갔더니 완전 박물관입니다. 제가 그래도 미술인인데 작품들이 예사롭지가
않았어요. 업사이클링은 처음보았고요. 추억 찾기에 아트까지 합쳐지면서 소확행이
더블입니다.이게 뭐야 막걸리를 실어 나르던 짐바리 자전거가 아닙니까? 저는 이 짐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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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잘 압니다. 당시 이 짐바리는 두 분이 타고 다니셨는데 한 분은 동창 박 금0
부친이고, 또 한 분은 중학교 절친 박 0태 네 아버지입니다. 0태가 중학교 때인가,
잠깐 이곳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 친구랑 화약총을 만들어 사냥을 다녔어요.
종종 이곳에서 놀다 갔는데 한 번도 밥을 주지 않았고, 어머니를 본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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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셔서 우리는 진0 아버지를 무서워했습니다. 그 앞마당에 제가
서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네요. 저기 토방 마루는 아마도 제가 앉았던 곳인지도
모르겠어요. 해동주조장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 아이디어인지 과연 리스펙트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섹션 별로 작품을 공감하고 싶었지만 아쉽습니다.(계속)
2019.9.25.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