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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전남권역에는 1906~7년 사이에 진도 맹골도 죽도등대, 해남의 시하도등대, 소흑산도 가거도등대가, 1908년 1월에는 화원반도의 목포구(木浦口)등대, 1909년에 진도 하조도 등대, 1910년에 여수 소리도등대, 1913년 암태도등대가 세워졌다.
이 등대들은 대부분 100년이 넘어 우리의 지난 역사를 증명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목포구(木浦口)등대는 수류미등대로 불리던 옛(舊)등대 아래 2003년 범선의 형태를 띤 현대식 등대가 새롭게 건설되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등대 16경에 버금가는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대표적 등대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서북단의 땅끝마을
파도높음! 파도높음! 파랑주의보가 나돌지 않았지만 출렁이는 파도, 검푸른 바다의 춤사위가 거칠다. 이곳에 서면 목포항 구슬픈 남도가락이 바람에 실려 오고, 오래된 등탑(燈塔)하나 외로이 서있는 언덕위로 그리움에 자맥질하는 옛이야기가 스며있다.
춤추는 바다, 뛰노는 바다! 청옥빛깔 정든해의 물살을 거슬러 고요한 등탑 앞으로 포말이 일면 뱃길은 산산이 부서지고 역사는 쓸쓸히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목포의 관문이자 시하의 끝자락, 끝물의 바다. 조사(釣師)들의 손맛 끌리는 갯바위마다 웃음가득 화사한 옷을 입고 강강술래 손잡고 뛰놀 듯 바다는 출렁이며 춤을 춘다.
호화스런 여객선이 윙윙거리며 질주하는 여기는 화원반도, 대한민국 최서북단 땅끝마을. 시하바다는 진도 벽파와 해남 우수영 사이의 울돌목을 거슬러 올라가 화원반도에 이르는 물목의 이름이다. 진도지역의 섬들과 신안의 다도해, 화원반도의 지형을 흐르고 있기에 이곳 바다의 명칭을 두고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래서 시하바다는 때론 씨알 굵은 풍어의 바다가 되고, 물 때 기다리는 바다가 되어 거친 물살을 표류하다가 어느새 타래질 하듯 잔잔한 민심의 바다가 되어 목포구(木浦口) 수로를 유유히 흐르고 있다.
태고부터 부여받은 “다스리고 번성하라”는 임무를 수행이나 하려는 듯 사람들은 이름 짓는 일을 좋아한다. 그것을 자신들의 영역인 양 갖가지 주장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서 시하바다의 이름은 듣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영산호를 따라 내려오는 담수호와 목포 앞바다의 간수가 만나는 지점은 씨알이 굵은 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씨알이 굵다하여 “씨알바다, 씨알바다” 이렇게 부르다가 시하바다가 되었다는 설을 어느 교수가 논문에 실은 적이 있다.
기계선이 없었던 때 돛을 단 풍선(風船)들은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감히 함부로 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물살의 흐름을 기다렸다가 썰물(河), 때(時)에 맞춰 지나다녔다 하여 시하(時河)바다라 부른다.
시하바다가 보이는 화원면 장수리 마을은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장수한다하여 한때 모방송사의 예능프로에 소개되면서 전국에 또 하나의 땅끝마을로 알려지기도 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씨알바다의 유래를 듣더니 모두들 박장대소하며 까르륵 웃는다. “그거는 아니여~, 저기 언덕배기에 가서 봐봐”하며 손짓한다.
바다 가운데 두 개로 나눠진 섬이 보이는데 작은섬은 실을 거는 곳이고 큰섬은 씨아(목화씨를 빼내는 기구)란다. “물레에 실을 걸고 목화씨를 빼내는 ‘씨아’를 닮아서 씨아도라고 했제. 그래서 씨아바다여” 목포 고하도와 해남 화원반도는 옛날부터 목화재배지였다. 화원의 지명(地名)이 목화밭에서 유래된 배경을 보면 주민들의 이야기에 다소 설득력이 실린다.
목포구, 수류미등대와 범선등대
이곳 시하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 시하도(時下島)는 과거 진도 어부들이 풍랑을 피하여 들렸다가 정착하여 오랫동안 몇 가구 살았던 섬마을이다. 1907년 시하도등대가 시하바다에 첫 불을 밝혔다. 한때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고 마을에 6~7세대가 살았던 곳에 시하분교가 들어섰고, 2005년 까지 등대지기 아들을 둔 할머니 한 분이 목포에서 섬마을에 드나들며 생활했다. 이 섬의 등대는 2005년 11월 23일 무인화등대로 바뀌면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거의 같은 시기 목포로 들어가는 입구에 시하도등대와 같은 모양의 목포구(木浦口)등대가 불을 밝혔다. 그 모양이 마치 오징어를 닮았다하여 사람들은 일본말 수루미를 차용해 수류미등대라 불렀다. 식자층들은 ‘물 흐르는 끝자락’을 뜻하는 수류미(水流尾)로 한자 표기했다.
목포구(木浦口)등대는 목포 외달도와 달리도 건너 목포항을 떠난 배가 고하도를 돌아서 만나는 화원반도 끝자락에 서 있다. 행정구역은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에 속한다. 이 바닷길은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관문이었고, 옛 등대인 수류미등탑은 수로미산자락 언덕 위에 따로 서 있다. 1908년 1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 의해 불을 밝힌 수류미등대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수탈을 원활히 하고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세워졌다. 목포구등대(수류미등대)가 불을 밝히면서 ‘제국의 불빛’이라는 오명을 남긴 이유다.
원래 화원 반도 끝인 매월리와 건너편 목포 달리도의 좁은 해역은 600m 밖에 되지 않아서 물살이 거칠다. 물살이 거친 바다는 고기가 없어 물가로 고기가 몰려드는데 이곳 사람들은 뚝방을 치고 그물을 돌려놓아 들어오는 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다.
바다위로 떠있는 산의 행렬은 신안의 암태, 팔금, 안좌, 장산도를 잇고 진도와 화원반도의 물살세기로 유명한 시하바다엔 여러 사연들도 많다. 시하바다는 울돌목의 사나운 물살이 소용돌이치듯 밀려와 곧잘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혀 침몰되기 일쑤였다. 이곳에는 슬픈 사연과 함께 재미난 사연도 전한다.
예전엔 지역별로 국가에 세금을 냈는데, 그때는 모두 세금을 곡물로 내도록 규정되었다. 한 번은 해남 해창포구에서 곡물을 싣고 떠나던 배가 이곳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그만 배가 뒤집혀 버렸다. 당시 해남군수는 어찌할 바 모르고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가 주민들이 진정서를 중앙정부로 보내자고 제안해서 모두가 진정서를 써냈다.
하지만 당시 화원면장 곽선주씨는 묵묵부답 눈을 감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한참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묵필을 가져다가 산지해남(山地海南), 수지나주(水地羅州)라고 일필휘지로 8자를 써냈다. 당국에서 이 글귀를 보고 물길이 속해있는 나주지역에 세금을 대신 내개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화원반도에 위치한 목포구등대
목포구(木浦口)등대는 화원반도 끝자락 매월리에 위치해 있으며 목포구(木浦口) 수로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목포 사람들에게 더 알려졌던 등대다. 목포에서 화가겸 시인으로 활동하는 오형록시인의 <시아바다>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무엇엔가 이끌려 찾아온 곳
북서풍은 없고 거침없이 달리는 파도,
거센 팔뚝에 휩쓸린 자아는
믿기지 않은 속도로 표류한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세상에
벌거벗은 영혼의 자맥질,
잿빛 하늘 누비며 한 줄기 햇살을 찾아
갈매기 너울너울 활개를 친다.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을 박차고
포근하고 안락한 고향을 꿈꾸며
수평선을 향해 치닫던 여객선은
살며시 파도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처얼썩 처얼썩 들썩이는 가슴
무아의 초입에 발길을 멈추면,
주체할 길 없는 감흥이
저 멀리 수평선 까지 곱게 물든다. <오형록의 시 ‘시아바다’ 전문>
당시 등대는 건축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등대가 서 있는 곳 대부분이 벼랑 끝이나 비좁은 곳, 외딴 섬이기에 자재 운반은 물론 건물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보다 잘 보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높이 지어야 했고, 바다의 염분과 거센 파도를 버틸 수 있어야 했다. 20세기 초 등대는 무선전신지국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으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탐지기이기도 했다. 첨단의 건축기법과 첨단 기술이 결합된 건축물이 바로 등대였다.
군산의 어청도 등대, 가거도 등대와 함께 목포구(木浦口)등대는 2008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조화된 외향으로 근대의 변혁기 건축기술이 집약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금은 옛 등대(수류미등대) 아래로 새로이 둥지를 튼 목포구(木浦口)등대가 힘찬 범선의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어 이곳이 서남해의 중요거점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대동문화 95호 [2016 7,8월호]
정지승 프리랜서 webmaster@chkorea.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