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구머리는 본래 진보군 동명지역으로 옛부터 머루가 많이 나서 구머리, 또는 포산(葡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영양군 석보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역시 노래산 신자촌과 같이 태백산맥 줄기인 포도산(538m) 꼭대기에 있는 심산유곡의 마을로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며, 신유박해(1801년) 후에 충청도의 홍주, 예산 등 여러 곳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서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산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다래와 머루를 따먹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 청송 노래산 신자들이 체포된 지 며칠 후에 포졸들이 이 곳까지 덮쳐서 모든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안동 진영으로 끌고 갔다. 그때 붙잡혀간 신자들 중에는 용감히 신앙을 증거한 신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일성록」의 기록에 의하면 박사행 등 20명은 즉시 석방되었고 김시우, 최윤금, 심환, 김광억, 김흥금, 김헌동, 김광억의 처 분령(分令) 및 그의 아들 종건, 김홍금의 자녀인 김장복과 딸 작단, 김헌동의 아들인 갑득, 딸 시임, 정임 등 13명은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였다고 한다(「일성록」순조 을해년 6월 19일 條).
김강이(시몬)는 머루산에서 이들과 함께 살다가 따로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신자촌을 이루어 살았고, 그 뒤에 강원도 울진 고을에 가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1815년 을해박해 때 그의 집 하인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붙잡혀 안동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는 그해 5월에 그의 아우 김 타데오와 함께 자기가 살던 원주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6, 7명의 신자들과 함께 옥중생활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지 8개월 만인 1815년 11월 5일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1815년에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붙들려간 후 이곳 머루산 신자촌은 완전히 없어지고 남아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이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곳 머루산에는 동학교도가 성행했고, 구한말에는 의병활동이 성행해서 신돌석 의병대장이 이곳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0년 초에는 이곳에 살던 이건초의 주선으로 한씨, 안씨, 노씨 가정 등이 영덕군 지품면에 있던 장로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여 이곳 장구 메기에 교회를 짓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10년에 한일한방이 되고 1919년 3.1독립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자 이 곳의 주민들과 신자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시대 때는 왜경들의 탄압으로 교회의 예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 후에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6.25 전후에는 공비들의 발동으로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결국 이들은 넓은 산비탈의 개간지에 담배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