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주소가 전면 시행되면서 그동안 한자어 행정지명에 가려졌던 예쁜 토속 길이름이 차츰 빛을 보고 있다.
순 우리말로 된 마을이름 중에는 옛 조상의 생활상을 짐작해볼 수 있어 더욱 정감있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이름이 험상궂은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2리 소도둑놈 마을은 태백산맥 줄기가 면면히 이어지는 평창 오대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숲 속에 숨어 있던 산적들이 겨울철에 이곳 마을로 내려와 소를 잡아다 먹곤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산적들은 예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악한 자들을 혼내준 의적이었다고 하니 마을 이름이 되레 친근하게 느껴진다.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 마을은 지금으로 치면 '국도 1번지'에 해당하는 한양가는 길목의 작은 동네였다.
마을 안에는 사람들이 소똥령이라고 부르는 고개가 있는데 이름에 얽힌 설은 두 가지다.
괘나리 봇짐 메고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탓에 그만 산 생김새가 소똥모양이 되어버려 소똥령이 됐다는 설도 있고, 고개 정상에 주막이 있었는데 원통시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주막 앞에다 똥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횡성군 횡성읍 반곡리 밤두둑마을은 마을에 밤나무가 무척 많아 밤나무 열매가 늘 두둑하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지금은 그 자리에 논이 드넓게 펼쳐져 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깨끗하고 맑은 자연환경을 간직한 곳이다.
강원지역 마을 이름 중에는 사투리를 그대로 옮겨온 이름도 꽤 있다.
횡성의 깊은 골짝으로 숨어든 화전민들이 일군 동네 고라데이 마을(횡성군 청일면 봉명리)은 골짜기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인 '고라데이'가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순 한글은 아니지만 해발 1천m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강릉 안반데기 마을(강릉시 왕산면 대기리)도 '안반(案盤)덕'의 강원도 사투리인 '안반데기'가 이름으로 정착됐다.
'안반'은 떡메로 쌀을 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
우묵하면서도 널찍하게 생긴 마을 지형이 꼭 '안반'을 닮았다 하여 여기에 '덕'(고원의 평평한 땅을 뜻하는 우리 말인 '더기'의 준말)자를 붙여 '안반덕'→'안반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짧은 마을이름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의 '뙡'이다.
옛날 이 일대에 도전(道田), 즉 '뙈기밭'이 많아 '뙈밭'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 '뙡'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뙡'은 일제강점기 이후 마을 이름이 도전리(道田里) 개편되면서 요즘은 쓰는 이가 거의 없지만 지금도 고령의 마을노인들은 '뙡'이라는 지명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긴 지명과 두 번째로 긴 지명도 정선에 있다.
가장 긴 것은 무려 13자에 이르는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정선군 북평면 숙암리)는 큰 바위가 많은 험한 지역 특징을 따 만들어졌다. 바위가 많아 두 팔을 벌려 바위를 안고 돌고(안돌이), 등을 지고 돌고(지돌이), 다람쥐도(다래미), 한숨을 쉬는(한숨), 바윗길(바우)이라는 뜻이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지명으로 알려진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은 제주도 출신 제주인민해방군 소속 남로당 지구당 총책이던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한자 인명(人名)을 그대로 살려 이름 지어졌다.
도로명주소가 전국에서 전면 시행되면서 정답게 부르고 싶은 우리말 길 이름들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 개편된 한자어 행정지명에 가려 잊힌 옛 지명을 그대로 살린 토속 이름들이다.
정선에 위치한 새비재길(정선군 신동읍 방제리)은 길이 높고 험해 고개를 이룬 산의 형상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조비치'(鳥飛峙)의 토속 지명을 인용했다.
언뜻 들으면 외래어 같은 졸드루길(정선군 북평면 나전리~북평리)은 작다는 뜻의 '졸'과 평지라는 뜻의 '드루'를 합해 만든 순수 우리말 지명. 하진부에서 정선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만날 수 있다.
가치래미길(원주 가현동)은 원주시의 북쪽에 있는 가현동 마을이 마치 치악산의 꼬리 같다 하며 이름 붙여졌고,
싱근솔길(원주시 수암리)은 심은 소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 등을 심다'라는 뜻의 강원·제주지역 사투리 '싱그다'가 들어가 싱근(심은)+솔(소나무)이 되었다.
주변 환경이 아름다운 굽이길로 이름난 저금어지길(원주시 신평리~가현동)은 산의 형국이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해서 격고무지(擊鼓舞地)라 불리던 것이 사람들의 입을 타면서 비슷한 발음의 '저금어지'가 됐다.
이 밖에 강원지역의 순 한글 길 이름으로는
금베이길(춘천시 동면 만천리·활처럼 굽은 곳이라 불린 옛지명 '굼벵이' 인용)
매네미길(춘천시 동산면 원창리·매가 많이 넘어다닌다는 뜻의 지명 '매네미' 인용)
게구석길(동해시 묵호진동·과거에 게가 많이 서식해서 붙여진 지명을 반영)
자라우새길(춘천시 삼천동~송암동·마을에 있는 자라같이 생긴 바위 이름 '자라우' 인용)
등이 있다.
인제에서 신남휴게소 바로 전에 소양호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동갈보대의 쉼터"라는 휴게소가 있다.
굴참나무와 어린소나무가 많았던 곳으로 60년대만 해도 집 한채 없이 두 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었던 곳이다.
이 지방 사투리로 굴참나무=동갈나무의 "동갈" 글자와 어린소나무=보대기의 "보대"를 합하여 이름을 지었다.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酒飮峙里)는 술마시는 고갯마을이라는 독특한 지명을 갖고 있습니다.
홍천에서 인제로 가는 44번 국도상의 말고개에서 우측으로 진입하는 데, 주음치의 정학한 위치는 화촌면 군업리의 조가터와 연결되는 술음재라는 고개가 됩니다.
지금은 2차선이지만 옛날에는 험하기로 소문난 고개였다고 하네요!
새색시가 고개를 넘어 마을로 시집을 가며 한평생 산골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신세가 한탄스러워 고개정상에서 한 없이 서럽게 울었다하여 그 고개를 설움재로 불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설움재→술음재로 되어 한자어로 주음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