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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물안개
속리산 초입에 자리한 정2품송...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법주사 올라가는길..
일주문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시대적용 기타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계곡의 물은 낙엽으로 가득 덮어있다.
부도 (새로 단장되어서인지 설명이 없었다.)
금오 대선사(金烏大禪師) 부도
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음력 8월 17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스님의 법을 이은 상좌로는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주 스님 등 한국불교 현대사의 큰획을 그으신 분들이 많이 있고,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
속리산사실기비
1989년 12월 8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法住寺)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 사람들도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1653)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벽암대사비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조선중기의 스님. 승병장.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성은 김(金). 1575년(선조 8) 12월23일 보은에서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암(華山庵)의 설묵(雪黙)에게 공부했으며, 1588년(선조 21) 스님이 되었다.
부휴 선수(浮休善修)를 만난 후 줄곧 선수를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을 유력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산중에 피란해서도 공부를 쉬지 않다가, 이듬해 사명 유정(四溟惟政)이 선수를 천거하여 전장의 진두에 나서게 하자 그는 선수를 대신해서 전장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전(海戰)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남한산성을 쌓게 했을 때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3년만에 완성했다. 이 공으로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 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그 뒤 화엄사를 수리하고 교화 활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만났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3천명의 승병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북상했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했다. 그 후 법주사에 주석하며 전쟁 중에 의병의 본거지라고 불태워버린 법주사의 대웅보전, 팔상전, 원통전 등을 복원하여 법주사를 중창하고, 송광사· 해인사· 백운사(白雲寺)· 상선암(上仙庵)· 보개산(寶蓋山)· 묘향산 등으로 옮겨다니며 교화 활동을 펴다가 화엄사로 돌아가서 1660년(현종 1) 1월12일 나이 86세, 법랍 72년으로 입적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에 벽암대사비(지방유형문화재 71호)가 남아있어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당간지주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
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철확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쇠솥은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로서 철확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람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확내부
통일호국금동미륵대불
절 왼편으로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석연지
능인전 앞에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높이는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半球形)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인다. 즉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香爐)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으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여 재질이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공덕비
석조
마애여래의상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을 비롯해서 이 두 가지 설화를 담고 있는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의 설화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 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 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보살은 지옥세계의 구세주이지만 미륵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진표 율사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지장 보살에게서 인가를 받고 법을 전해 받지만, 스님은 궁극의 뜻이 미륵에 있어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진표 율사의 경우 신앙의 중심은 지장이 아니라 미륵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행담이 암각화로 표현되면서 미륵불은 정면에 크게 새기고, 지장보살은 구석에 작게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감로수
천왕문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범종각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운판
법고
범종
목어
쌍사자석등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이다.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 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다시 그 위의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냈다. 이곳에 구멍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법주사의 역사에 있어서 영심 대사의 중창 이후 즉 8, 9세기의 사정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처럼 뛰어난 석탑이 있어 8세기 번성하던 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약사전
약사전(藥師殿)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약사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약사 신앙은 대표적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 두 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우리 나라의 약사 신앙은 대체로 8세기 이후에 번성하였다. 삼국유사에 약사 신앙의 영험이 많이 전한다.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고, 통일신라 때 경주에 위치한 신라의 대표적 사찰 중의 하나인 분황사(芬皇寺)에는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있었다.
또한 경주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약사신앙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 준다. 법주사에 약사전이 들어선 것은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조선 중기의 가람이나 18세기 중엽의 배치도에도 약사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지금의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작은 규모의 약사전이 비로소 등장하였다.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인데, 안에는 약사여래좌상과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원통보전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관음보살을 달리 원통대사(圓通大師)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통이란 널리 통하여 두루 막힘이 없는 것, 즉 궁극적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듣고서 그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보살인 것이다.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보관을 썼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하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다.
희견보살상
청동 미륵대불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이 서 있다. 흔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라 부르는 이 보살상은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이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보살상의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 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이 보살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 존자에 가깝다고 한다. 가섭 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두고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 보살이 아닌 가섭 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명칭은 가섭봉발가사탑(迦葉奉鉢袈裟塔)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이러한 이견도 주목할 만하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미륵신앙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진영각
진영각(眞影閣)은 명부전과 나란히 서 있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명부전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다.
명부전에는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쩸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지장 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에게서 정계(淨戒)를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 그리고 계본(戒本) 등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마침내 미륵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금산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에 입각한 점찰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법주사 지장신앙의 전통은 다시 제자 영심에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지금의 명부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절에는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 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안에는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과 그 협시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하였다.
다시 그 좌우로는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시왕상마다 모두 동자상을 대동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이 벽화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일으켜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준다.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 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였던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 있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안에 봉안된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이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한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 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석등
대웅보전 앞에 높이 3.9m에 이르는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이 있다.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부른다. 전체적으로 팔각이 기본 구조를 이룬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네 개의 돌로 구성했다. 그 위의 하대석은 2단인데 하단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부조하였다. 상단은 그릇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면을 줄이고 8개의 복련을 나타냈다. 중대석 즉 팔각의 간주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늘씬하게 올라갔고 윗부분에만 8개의 앙련을 새겼다.
간주석의 위아래로는 각각 3단,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서 각 면에는 화창과 사천왕을 번갈아 두었다.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쌍사자석등과 같이 구멍이 남아 있다. 사천왕의 조각은 매우 역동적이다. 화강암으로 이 정도의 사실적 조각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신라인의 예술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고 끝에서 약한 전각(轉角)을 두었다.
위에는 둥근 보주가 있으나 새로 보수한 것이다. 이 사천왕 석등에서 우리는 신라 석등의 전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장식성이나 조각 기법으로 보면 쌍사자 석등과 같은 8세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