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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일본 불교사
7. 메이지[明治: 1868~1912] 시대 불교
1853년 6월 3일, 미국의 미해군 원정대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는, 4 척의 검은 철선[黒船]을 이끌고, 일본 에도[東京] 외항 우라가[浦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앞 바다에 등장한다. 당시 세계 최대 포경 국가였던 미국은 어업 전진 기지 확보와 더불어 중국 무역을 위한 중간 석탄 보급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태평양에서 작업하는 포경선들의 기항지로서, 또 중국과의 무역 중계지로서 일본의 항구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페리는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편지를 받으라고 요구하였다. 일본 근해에서의 미국 선원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보급 및 정박의 편의 등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이 편지를 받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라도 전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놀란 막부는 나가사키에서 교섭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면서 시간을 끌었으나, 페리의 함대에 대적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대통령의 편지를 받아들인다. 페리는 항구를 떠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측량선을 보내 에도 만을 측량하는 등 12일 까지 머물다 다음 해 봄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듬해 봄 1854년 2월 13일, 이번에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온 페리는 현재의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 앞바다에 정박하고 조약체결을 요구한다. 에도 막부는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함선의 강압에 굴복, 1854년 3월 31일 불평등한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下田, 시즈오카현[静岡県]]와 하코다테[函館, 홋카이도[北海道]] 등 항구를 개항한다. 또 7월 11일에는 오키나와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무렵 일본 해안에 나타나 무역을 요구하는 나라는 미국 이외에도 러시아 · 영국 등이 있었다.
페리 제독은 조약을 체결한 지 4년 만에 죽어 더 이상의 적극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지만, 에도 시민들은 증기기관을 단 거대 검은 철선, 쿠로후네[黒船]의 위력에 압도당한다. 일본은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200년간 유지했던 쇄국의 문을 열어야 했다. 오랜 기간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하던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쇄국鎖國에서 개국開國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차례차례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5개의 항구가 차례차례 추가로 개항되어 서구열강들과의 자유무역이 시작된다.
외국과의 교역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전통적인 시장질서가 파괴되고 커다란 혼란이 야기된다.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었던 생사는 물품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하였고, 쌀을 비롯한 모든 물가가 상승한다. 또한 값싼 면제품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면작농가나 면직물 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의 피해는 그대로 민중들에게 돌아갔고, 어려워진 세태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민란(잇키, 一揆)이나 폭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로 이양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한다는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이 확산된다. 특히 막부의 개항을 끈질기게 반대하였던 초슈번(長州藩, 야마구치켄)은 외국배들을 공격하는 등 존왕양이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의 보복공격을 받고 커다란 타격을 입은 이들은 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양이(攘夷)를 포기하고, 대신 막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천황에게로 되돌리자는 토막운동(討幕運動)을 전개시킨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㉘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탄생과 불교, 신불분리 그리고 폐불훼석)
갑작스런 개항으로 경제 질서가 무너지고 극심한 빈곤 속에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1860년에게 에도 외항 우라가의 수비를 맡았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주도했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암살된다. 서양을 물리칠 수 없음(攘夷)을 인식하게 되면서는 존왕尊王과 함께 막부 타도로 그 운동 방향을 바꾸게 되는데, 무력을 사용해 무능한 막부를 무너뜨리자는 토막운동討幕運動이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무력으로 군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정권 이양을 이루자는 도막운동倒幕運動 또한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결국 무기력한 에도 막부를 내쫒고 신정부 수립을 하자는 것으로, 강경파면 토막討幕이고 온건파면 도막倒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67년 11월 9일, 제15대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려 줌으로서(大政奉還), 250여 년간 이어졌던 에도시대가 막을 내린다. 700년이 넘게 이어온 봉건적 무사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중세 봉건 사회에서 현대적인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 에도시대의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일신하여 서양과 같은 근대 국민국가로 새롭게 태어나자는 운동은 메이지[明治] 유신維新의 원동력이 되었다. 1868년 9월, 신정부는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바꾼다.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고, 국가체제 및 사회제도 등 국가 사회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이 일어나 서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산업화, 군사력 증강 등이 추진된다. 1873년, 20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병역의 의무가 지워졌고, 조선소, 군사공장, 광산개발, 섬유산업 관련의 관영공장의 건설 등이 진행되었다.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시작된 메이지 시대는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 44년간 지속된다. 220년간 막혀 있던 일본의 문이 열리고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일본은, 1875년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 운요[雲揚]호를 보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전에 프랑스, 미국이 그랬듯, 일본도 똑같이 강화도에 나타나 대포를 쏘아대며 항구를 열고 근대적 무역을 하자고 요구하게 된 것이다. 불안하게 시작된 일본의 개항은 50년 만에 일본을 세계열강의 일원이 되게 하였고, 1차 대전 직후에는 세계 3대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신불분리神佛分離와 폐불훼석廃仏毀釈
에도시대 불교는 단가제도 등 사원제도의 제정制定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막부의 말단 기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에도 정권으로 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정권에 종속되게 되었다. 막부와 밀착되어 있던 불교계는 세속적 번영을 구가하였지만 자연스레 부패와 타락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유학자나 국학자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으며, 폐불론廢佛論으로 가는 단초가 되었다.
에도시대 초기의 폐불론에 대한 주장은 임라산(林羅山)등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았는데, 그 논점은 불교의 은둔적이고 해탈적인 교리가 유해무익하다는 것, 신불습합은 국세가 희미해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 등이었다. 에도시대 중기이후에서는 국학의 발흥과 아울러 고신도(古神道)의 부흥을 목표로 한 폐불론이 성행하였다. 특히 평전독윤(平田篤胤)에 의한 폐불론은 격렬했다. 또 막번(幕藩) 경제가 악화됨에 따라 중정죽산(中井竹山) ․ 정사고기(正司考祺) 등의 경제학자는 승려의 기생적 생활로 인한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비난하였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337.)
일본에서 주자학朱子學 등 유학儒學은 무로마치 시대 승려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도[江戶] 초기 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다루기 시작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는 교토 쇼코쿠지[相國寺]로 출가한 승려였고,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 등 초기 유학자들 역시 승려 출신이었다. 일본의 유교 사상은 이들의 활약으로 에도 막부 시대에 형성되었다. 이 시대는 정치·사회적 안정을 토대로 사상, 문화, 예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다.
에도 막부는 엄격한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주자학朱子學에 주목하였는데, 주자학은 현세에서 사람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의무,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 계층인 무사와 피지배 계층인 농민과 상인 사이의 위계질서를 당연시 하게 하여 계층에 따른 의무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주자학을 활용한 것이다. 에도 초기 주자학자하야시 라잔은 주자학으로 막부 체제를 세웠으며, 그의 주자학은 막부의 관학官學으로 채택되면서 일본 유교 사상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또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도神道를 주자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 하였다.『신도전수神道傳授』,『본조신사고本朝神社考』등을 통해 신도에서 기존의 불교적 부분을 배제하고 대신 유교 사상을 도입, 유교화한 신도 사상의 기초를 만든다.
한편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는 에도 후기 일본의 4대 국학자国学者 중 하나다. 그는 원래 주자학을 공부하였지만, 신도로 전향하여 고쿠가쿠[國學], 즉 국학의 선구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제자를 자처하였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일본의 초기 전통과 문화에서 일본의 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반면에 히라타 아쓰타네는 일본의 고전에만 입각 할뿐, 유교, 불교의 설은 섞지 않는다는 복고신도復古神道 설을 주창主唱하고 체계화하였다. 특히 그는 사회, 정치적 행동의 기준이 되는 신학체계를 개발하려 하였는데, 천황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히라타의 사상은 19세기 후반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존왕파尊王派에게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하였다.
국학(國學, こくがく)은 에도 시대 중반인 17세기 말에 생겨난 불교나 유학과 같은 외래 종교와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학문이다. 이들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신토와 천황에 주목했고 이것이 발전해서 현대의 신토와 천황의 모습을 만들어내었다.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주변 국가들을 폄하하여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나무위키에서 인용.)
신토[神道]는 원래 일본인들의 정신생활의 기반이 되어 내려온 토착신앙이자 민족 신앙이다. 원시공동체 사회 전반에 걸친 중요 행사 또는 제사 등에서 발생한 것으로, 고대로부터 기원하는 토테미즘, 애니미즘을 근간으로 하는 다신교 형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교학적 전통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광범위한 정신현상, 사회, 문화 현상 등과 관련되어 있어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신토란 일본 민족의 신 관념에 입각, 일본에서 발생하여 주로 일본인 사이에 전개된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과 그 배경을 이루는 생활태도 및 이념 등의 총체를 가리킨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나 신토는 교조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종교이며, 주로 일본인이 담지자인 민족 종교이다. 각 시대별로 다양한 신토론이 있기는 하지만, 확정적인 도그마는 없다. 신토는 정비된 신학이라든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체계, 사유형식, 행동양식으로서 일본인의 생활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일본의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
1868년 명치유신이 일어나고 사회전반에 걸쳐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정부는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신도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한다. 문제는 신도는 불교전래이래로 신불습합神佛習合, 즉 불교와 습합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정부는 신도를 일본 자생의 순수한 일본의 정신, 내지는 종교로 규정하면서, 국가권력을 통해 신도와 불교를 나누는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을 시행한다. 1868년 3월, 신사에서는 불교적 요소를 일소하라는 행정조치인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도 시대 폐불론이 주장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존황양이尊皇攘夷나 복고사상 등을 배경으로 한 구체적인 시책으로 가시화 된 것이다.
신불분리정책은 우선 전국의 신사에서 불교적 색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868년 3월 신불습합의 오랜 관습으로 존재하였던 사승(社僧, 신사의 승려)에 대해 모두 환속하여 신관(神官, 신도 성직자)이 될 것을 명한다. 즉, 승려→환속→신관의 코스가 정책적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사의 명칭으로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에 대해 신도식으로 개명할 것을 명하고, 주신(神体)이 불상인 경우 이를 없애며, 범종과 같은 불교식 의식구를 제거할 것을 명한다. 또한 신관이나 그의 가족들은 모두 불교식의 장례 대신 신도식 장례를 행할 것을 의무시함으로써, 에도시대 이후 지속되었던 테라우케제도(寺請制度)를 공식적으로 부정한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㉘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탄생과 불교, 신불분리 그리고 폐불훼석.)
불교와 민족 신앙인 신도와의 평화적 공존을 깨고 신불분리가 전국의 신사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그 흐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 그동안 승려에 비해 하층으로 여겨져 천대받던 신관들이 주축이 되고, 사찰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민중들이 이에 가세하면서 폐불훼석廢佛毁釋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불교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전통적 특권집단이었던 불교는 국교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고, 배불론자들에 의한 폐불훼석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때 스스로가 아닌 메이지 정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의 대처帶妻 또한 일반화되었다.
신도의 국교화 정책과 표리관계로 행해진 것이 신불판연(神佛判然)이었다. 신사에서는 불교적 요소를 일소하기 위하여, 경응4년(慶應; 1868) 3월에 신사에서 봉사하는 사승(社僧) ․ 별당(別當)의 환속, 신체(神體)의 불상 사용, 신명(神名)에 보살과 불호 사용의 금지 등이 명령되었다.
원래 이 포령(布令)의 취지는 신불의 구별을 확연하게 하려는 것으로 폐불훼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사의 실권을 사승(社僧)이나 별당에 빼앗겼던 신관은 신사에 소장된 불상 ․ 불구 ․ 경전 등을 파기 소각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341.)
당시 폐불훼석의 상황을 보면, 후쿠야마번(福山藩, 히로시마켄 동부)의 경우 영내에 8개 사찰을 제외한 1627개의 사찰의 정리가 결정되었고, 이세(伊勢, 미에켄)에서는 이세신궁 주변의 사찰 196개를 전부 폐사하였다. 시가켄(滋賀県)의 히요시신사(日吉神社)에서는 수많은 국보급 불상, 불구, 경전 등을 소각하였고, 나라(奈良)의 코후쿠지(興福寺)에서는 소속 승려 전원이 인근의 카스가신사(春日神社)의 신관이 되었고, 식당이 파괴되는 한편 현재 국보로 지정된 5층 목탑도 땔감용으로 25엔(현재 기준으로 보면 약 100만원)의 매물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에기번(苗木藩, 기후켄 나카츠가와시)에서는 영내의 모든 사원과 불상, 불단이 파괴되어 현재에도 거의 대부분이 신도식 장례를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폐불훼석은 1868년부터 1877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로 인한 사찰측의 피해정도는 조사·연구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에 정확하게 합산할 수는 없지만, 당시 존재하였던 전국 사찰 절반가량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하며, 이를 두고 ‘일본판 분서갱유’라고까지도 표현한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㉘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탄생과 불교, 신불분리 그리고 폐불훼석.)
불교 사원 측의 강한 반발을 받은 정부는 신불분리神佛分離가 폐불廢佛 정책은 아님을 강조하였지만, 그때까지 불교에게 천대받던 집단들은 한풀이하듯 폐불훼석을 멈추지 않았다. 불교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게 되었고 신정부와의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게오(慶應) 4년(1868) 3월 28일, 메이지 유신정부는 신불혼효를 금지하고 사원과 신사를 분리하도록 명하는 신불판연령을 내린다. 메이지 초년 종교를 둘러싼 큰 변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는 일반적으로 그것은 국민국가 형성에 필요하고도 동시에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일본적 성향에 의한 개혁이었다고 정리 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 중의 하나로 메이지 초년의 신불판연령은 그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유신정부에 따른 일련의 종교정책은 국민 국가형성에 동반한 종교적 합리화의 전형적 사례로 파악해야 할 부분이며 신불판연령도 그러한 조치의 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인 연구자 중에는 신불판연령은 일본의 종교문화의 혁명을 위한 기본적인 측면으로 보는 이도 있다. 또한 신불분리를 중대한 문화혁명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결론은 신불판연령과 같은 일련의 메이지 초년의 종교행정은 실책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은 가장 일본적일 수 있었던 신불사상의 교류중단과 문화사의 부정을 의미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감영희, 메이지정부의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고찰 -배경과 경과를 중심으로-ZINBUTSUHANZENREI of MEIZI Government Consideration -with background, progress as the central figure-한국일본근대학회 2012.08, 일본근대학연구 37권 225-244(20pages). 초록에서 일부 인용.)
2) 불교계의 전쟁협력과 개혁운동
앞서 보았던 대로 에도시대 불교는 테라우케[寺請] 제도 등 막부의 말단 조직의 집행자로서 에도 정권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렇게 백성 위에 군림하며 특권을 누리던 불교는 에도 막부의 몰락과 함께 졸지에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사상적으로도 부국강병을 내세우던 제국주의 신정부가 염세적이고 부정적이며 탈속적인 성격의 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다만 에도 불교를 신정부에 맞는 메이지 불교로 재편再編하여 정권에 유용하게 쓰려고 하였다.
에도시대 불교계는 테라우케제도(寺請制度)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막부권력의 하부집행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백성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종언과 함께 그러한 특권이 사라지고, 불교계에는 근대 제국주의국가의 질서체재에 부합하는 새로운 불교로의 개혁이 요청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메이지시대(1869-1912)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불교개혁운동들이 일어난다. 먼저 후루카와 로센(古河老川:1871-1899)과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의 반성회(反省會)를 필두로, 키요자와 만시(清沢満之:1863-1903)의 정신주의, 사카이노 코요(境野黄洋:1871-1933)·타카시마 베이호우(高嶋米峰:1875-1949) 등이 중심이 된 신불교운동 등이 일어난다. 키요자와의 정신주의가 인간 내면의 신앙형성과 확립을 중시하는 성격이었다면, 신종교운동은 불교의 대사회적인 역할, 즉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㉙ 일본불교의 근대화와 전쟁협력, “군자금 모금하고 군국주의에 협력”)
정치권력으로부터 외면을 받던 불교계는 일련의 불교개혁운동과 함께 신정부와의 관계개선에 나선다.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진호국가 등 호국護國 교설을 앞세워 신불일치神佛一致를 강조하였다. 대동아大東亞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찬양하였는가 하면, 천황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동일시하는 등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다.
일본불교계의 전쟁협력양상은 크게 3가지 형태로 정리된다. 첫째는 종군승을 직접 참전시켜 병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사상자의 장례 등을 담당하는 직접참여, 둘째는 후방에서 전쟁자금이나 물자의 모금활동 및 전쟁찬미의 교육활동 등을 통해 전쟁 수행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후방지원사업, 셋째는 일본군 점령지의 일본인 보호와 현지인들에 대한 교육 등의 역할을 통해 일본의 점령지정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㉙ 일본불교의 근대화와 전쟁협력, “군자금 모금하고 군국주의에 협력”)
일본불교계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등 전쟁에 다양한 방법으로 가담하였다. 전투기, 군함 등의 무기 헌납과 신도들에 대한 참전권장, 조선, 타이완, 만주국 등에서의 점령지정책 수행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전시교학戰時敎學의 전개 등 적극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에 협력한 결과 불교는 그 위상을 어느 정도 되찾는다.
군국주의 일본의 폐망과 함께 일본불교계의 전쟁협력도 끝이 났지만, 불교 본래의 평화정신을 저버리고 스스로의 이권을 위해 침략전쟁에 동조했다는 비난은 아직까지도 일본불교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불교대학 교수이자 선불교 승려인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가 쓰고, 개신교 목사가 번역한『전쟁과 선(2009년)』에 잘 드러나 있다.
폐전이후, 불교계의 전쟁참여에 대한 평가와 책임의 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전쟁참여를 주도하였던 종단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게다가 일본불교학계 역시 종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종립학교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도 있어서 불교의 전쟁참여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나 연구역시 부진한 것이 현실이다. 즉, 현재 일본불교계에서 근대는 들추고 싶지 않은 치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쟁참여 세대들이 대부분 죽고, 양심적인 학자나 승려들의 자발적인 연구의 결과들이 축적되고 있어서, 근대일본불교의 전쟁참여의 구체적 실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어 고무적이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㉙ 일본불교의 근대화와 전쟁협력, “군자금 모금하고 군국주의에 협력”)
3) 엘리트 일본 불교
일본은 근대에 접어들어 폐불훼석이 이루어져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잃고 한때 위기를 맞았지만, 스님들의 개혁 노력과 메이지 정부의 정책변경이 어우러져 위기를 벗어난다. 일본불교는 전반적으로 종파적 성격이 강하고 종파의 개조開祖에 대한 숭배가 성하여 다양한 종파불교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계율준수의 전통이 사라지면서 대부분 승려들은 결혼을 하고 대다수 사찰들 역시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무로마치 시대에 완전히 확립됐는데, 최징을 조사로 하는 천태종, 공해의 진언종,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신종, 도원의 선종, 일련의 일련종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종파가 다르면 본존불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가람배치 양식,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의 음률까지 틀린다.
이 같은 종파는 1945년 이전까지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은 법상종·천태종·임제종·조동종·황벽종·일련종·시종時宗 등이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아함종 등 신흥종파가 더 생겨났다. 일본의『종교총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의 불교종파는 7개 계통의 1백 8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法華)계가 36파, 기타 33파 등이다. 이중 전국에 4천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진언·일련·임제·정토진종 등 8개 종파로 알려지고 있다. (「한일 불교의 전반적인 비교」 (웹문서))
근대 일본 불교는 폐불훼석을 겪었지만 신앙쇄신운동으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서고 동시에 서유럽의 근대적 연구 방법을 받아들여 불전 연구와 불교사 연구에 몰두 하였다. 그 결과 현재 일본은 불교 종주국의 지위를 획득하였고 세계 불교계를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폐불훼석이 너무 일찍 이루어졌을 뿐 만 아니라 500년간 지속되는 바람에,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에 길을 걷게 된다. 고려 시대 불교는 종교이었을 뿐만 아니라 찬란한 우리의 문화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화려했던 불교의 인적 물적 자원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우리 불교는 명맥을 잇는데 급급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불교는 화석화 되면서 교와 선 모두에서 불교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해방 후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고 있지만 전통을 다시 새우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