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래는 좀 전에 카톡 받은 내용이다. "오늘 하프 연주자 이름이 뭐예요?" "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예요..." 오후 3시부터 장장 6시간동안 그의 이름을 수차례 되뇌었다. 그때마다 여인들의 눈커플은 하나같이 파르르 떨리곤 했는데, 그건 마치 입가심으로 달짝지근한 마카롱을 음미한 뒤, 디저트의 이름을 알아낼 때의 들뜬 희열과도 같았다. 금빛 하프를 쓰다듬는 금발의 젊은 남성....정말이지 살아있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였다. 그는 스메타나의 볼타바(몰다우의 체코식 명칭)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짐슴과도 같은 야성마저도 깊이 감동된 듯 싶었다.
거리의 가로등을 손으로 살짝만 가려도 바로 18세기 혹은 19세기가 되는 프라하는 실로 매혹적이다. 아름다운 건물로 둘러쌓인 도시의 공원에서 프라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발의 노익장 라파엘 쿠벨릭은 볼타바를 지휘한다. 하벨 대통령이 눈물을 훔칠 땐 참으로 애틋했다고 과거는 전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중에서-
스메타나 이후로 볼타강은 체코인들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 사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오직 턱 아랫부분의 희미한 멍자국과 납작한 손가락 끝 만이 허망한 유적처럼 때로는 유령친구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영광이 무섭도록 그리운 날에는 바이올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뇌사상태의 바이올린....한때 왼팔의 일부가 절단된 채 그렇게 놓여있었다. 그것은 딱딱한 시체, 그 자체였다.
무대 위 하얀 조명 속에서 턱으로 바이올린을 고정시킨 뒤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거머쥐고 오른손으로 활을 잡는다. 이 모든 동작은 몸의 기억력으로 극히 자연스럽다. 5년간 빳빳하고 차갑던 신체에 일순간 뜨거운 피가 흐른다. 첫음을 낼 때 지금껏 참고 있던 눈물이 여윈 두 뺨 위로 또르르 흐른다. 입술엔 미세한 경련이 이는 가운데 수없는 감사가 머문다. 욥의 기도처럼.... 고난 뒤에 더더욱 풍성히 채워주신 신께 바치는 감사와 오늘밤 그녀의 연주를 들으러 모여든 청중들에게 전하는 고마움이리라....
칠순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음반 제의가 들어왔다. 어떤 작품이 좋을까? 고민끝에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선택했다. 신 앞에 언제나 겸손하던 J.S 바흐, 더구나 이 곡은 바이올린의 성서 아니던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김현승 시인 가을의 기도중에서-
감사가 넘치는 정경화씨의 연주, 겸허한 J.S 바흐의 음악으로 나를 채우는 시간
3. 지난 목요일 저녁 음감회 직후 신청곡 하나가 접수되었다. 본 윌리암스의 토마스 탈리스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었다.
본 윌리암스라.... 푸른 옷소매가 귀가에 맴돌고 이어서 여느 소녀들과 다를바없던 지난 날의 학창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엄마가 싸준 정성어린 도시락은 언제나 점심시간 이전에 종적을 감추고...교실 안엔 다음 수업시간을 알리는 푸른 옷소매의 나른한 멜로디가 도시락 냄새로 얼룩진 채 들려왔었지...
무대위에는 소규모의 현악기군과 대규모의 현악 오케스트라로 나뉘어 있었다. 그야말로 금빛 물결의 향연이었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유입구를 터 주어 한층 더 풍성해졌다. 석양무렵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유람하는 기분이란......
이제 바야흐로 줄기 위에 떨며 꽃송이 하나하나 향로처럼 향기를 뿜고 소리와 향기 저녁 하늘에 감돈다 -샤를르 보들레르, 저녁의 조화(Harmonie du soir)-
저녁볕을 닮은 현악의 따스한 울림
4. 일전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은 적이 있다.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 다른 여인과 연애를 하는 그녀의 남자친구 로제, 그리고 폴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스물다섯 살의 청년 시몽. 콘서트홀 안에서 폴은 말한다.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에대한 시몽의 대답은 이렇다.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중략...........................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확신할 순 없지만 그들 각각에게 새 이름을 부여했다. 폴에게 클라라 슈만을, 로제에게 로베르토 슈만을, 그리고 시몽에게 요하네스 브람스를... 슈만과 클라라, 클라라와 브람스. 일찍이 서양 음악사상 클라라처럼 두명의 대작곡가에게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여인네도 없었다.
영화 비투스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 소년이 발소리를 죽여가며 경비행기에 접근한다. 그는 정비사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시동을 거는데, 뒤늦게 눈치 챈 정비사가 저지하려 달려올 즈음엔 비행기는 벌써 창공을 날고 있다. 차창 가득 들어오는 햇살의 따스한 온기,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마을들... 이 모든 장면이 슈만의 피아노 콘체르토 a단조 1악장이 흐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지나간다.
앳된 피아니스트 얀 리치예츠키, 슈만부부를 찾아왔을 그 무렵의 미소년 브람스를 떠올리게 된다. 여러 명의 아이를 거느린 연상녀 클라라 슈만에게 연정을 품었을 법한 브람스....아마도 그 시작은 모성애였을텐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중에서-
슈만에게나 브람스에게나 클라라는 영원히 사랑스런 뮤즈이리라...
5. 중학교 2학년 음악수업시간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지휘를 전공하신 분이었는데 다혈질에 상당히 괴팍했다. 라벨의 볼레로를 감상해보자고 하시더니 돌연 맨 앞쪽에 앉아있는, 존재감 없는 나에게 lp판을 주시며 틀어보라는 거다. 그분의 입꼬리가 짓궂게 말려 올라가는 걸 은연중에 본 듯도한데.... 시작이 아주 아주 아주 미약하기에 뒷자리 앉은 애들까지 다 들을 수 있도록 볼륨을 최고조로 올렸다. 매우 매우 매우 미약하던 소리가 나중에 어찌되었는지는......반 애들이 어땠을지는....한편 옆 교실 선생님들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달려오셨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두겠다. "다들 알았지? 라벨의 볼레로를 처음부터 크게 들어서는 절대 안돼!"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욥기 7장 8절-
악기들이 차례차례 가세하면서 최후의 한방을 노리는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 갔다. 유일한 솔리스트인 드러머만이 시시각각 무거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응답의 때"를 고집스레 기다리고 있었다. 일순간 대낮보다 환한 번뜩임! 무시무시한 우레! 그리고 무(無) 그뿐이었다.
커다란 천둥소리가 내 머릿속의 깊은 잠을 깨웠고,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벌떡 일어선 나는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며,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제4곡 중에서-
들끓는 열정, 죽음의 단말마 그리고 영원한 침묵
6. 끝으로 회원들의 말!말!말! "(음감회 시작 전)뵈젠도르프 피아노군요!! 죄송한데 사진 한컷 부탁드려요.^^" "오늘 슈만 피아노콘체르토 가을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거 같았어요. 기분 업 되서 왔어요." "신청곡 받는다 했죠?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부탁드려요." "(음감회 오늘자 포스터 정경화씨 사진보고) 혹시 정경화씨 오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