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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낳는 영성 원리가 출간 되었습니다.
모든 영성의 결정 판입니다.
생명을 낳는 영성 원리
박 솔로몬
하나님 나라
시작 하면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말은 영이라고 성경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좌우가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이 살리고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는 본인은 살리고 죽이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른 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열매를 맺힙니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심각히 고민을 한다면 내가 듣는 영적 말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아울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내가 전한 말이 생명을 낳는지 사망으로 이끄는지를 살펴 봐야합니다. 사역자가 말씀에 자유하다면 말씀으로 진리가운데 있다면 그는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이런 사역자 밑에서 말씀을 듣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생명이란 말씀으로부터 오는데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낳으려면 공식이 있습니다.
그 공식을 행하면 누구든지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 원리는 성경에서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원리에 충실하가 공식을 행하면 당신을 통해서 생명이 나오고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신이 평신도이든 사역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생명을 낳고 살리는 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생명이 나타나고 열매를 맺는 날들을 맞이합니다. 부족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생명을 낳는 원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귀한 원리를 모두와 나누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2012.6.14 익산에서 박 솔로몬
-목 차 -
시작 하면서
목차
생명을 낳는 영성 원리 요약
생명을 낳아라!좋은 설교는 좋은 교인을 낳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종류생명을 낳는 방법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법에 따라 역사한다.
목회자 사명자가 성경의 법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을 다루는 자가 아닌 세상의 법을 다루는 자가 된다.
교인이 변하기를 바라는 목적의 설교
재정이 풍부하여 지기를 바라는 목적의 설교
세상 축복에 관심을 둔 목적의 설교
치유에 우선한 목적의 설교
인간을 두려워하면 인간에게 맞춘 설교를 한다
설교자가 생명을 낳는 설교를 하기 위한 자세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 수 있는 위험성 있는 메시지 연구
목숨을 내놓을 영성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법 기본 공식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은 구원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는 공식이 있다
보증의 성령님이 임하셔야 생명이 나온다
핵은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 한다
먼저 생명의 틀을 만들어라 틀이 없으면 절대 생명을 낳지 못한다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교회를 통한 이스라엘의 거울의 틀
하나님 나라 심령천국을 이루는 법
영적심령 천국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오직 성령 안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의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한 틀 보기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좌의 권세 성경 66권을 통하여 본 하나님의 의도와 틀
시대적으로 보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의 틀
성경에 나온 직분을 통하여 생명의 메시지를 구하는 틀
성막과 성전을 통하여 본 생명의 메시지를 구하는 틀
절기를 통하여 본 생명의 메시지를 구하는 틀
제사법을 통한 생명의 메시지를 구하는 틀
생명의 핵을 폭발시켜라
죄에 대한 해결함의 성경적 개념과 보편적 개념
회개를 통한 조건적 사하심(보편적)
회개의 네 가지
구원 생명의 증거의 세 가지 증거
온전한 구원은 말씀(사상)구원과 마음(심령의 감정) 구원이 합일 되었을 때다
우리가 속는 구원, 말씀은 있는데 심령의 감정은 거듭나지 못함
심령은 보혈로 젖어 있는데 말씀은 없는 것
생명을 얻고자 하는 구원론에서 설교자가 알아야 할 네 가지 복음생명의 메시지는 기능보다 원리가 먼저다
생명을 낳는 영적 에너지를 받는 법
생명의 여러 가지
성령의 힘 생명 출산의 에너지를 받아라
생명을 낳는 힘
영적 예배의 핵심 원리
성령 안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법
영으로 드려지는 묵상기도
영적 감동을 일으키는 찬양 인도 법
찬송의 능력 및 효과
찬양의 기도는 영을 다루는 기도다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첫 단계
생명의 에너지는 음에 있다. 음을 연구하라
은사와 능력으로 성령의 힘을 얻는 방법
생명의 힘을 얻는 기도법 마치면서
생명을 낳는 영성 원리 요약
생명 영성 원리 공식과 핵심
1. 먼저 틀을 짜라 (새 부대)
① 애굽에서 가나안 지성소까지
②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③ 성막과 성전을 통하여
④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⑤ 영적 직분을 통하여
2. 생명을 넣어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
① 완전하신 하나님
②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③ 완전하신 보혜사 성령님
④ 영적 농사법을 통한 인간의 옥토밭 만들기
3. 생명을 낳아라 ( 예배와 기도 그리고 나눔)
① 생명을 낳는 찬양
② 생명을 낳는 기도
③ 생명을 낳는 행함
④ 생명을 낳는 나눔
4. 영의 세계에 대한 계시의 정립 할 때 영적 생명을 낳는다
① 하나님의 영
② 사단의 영
③ 인간의 영
④ 세상의 영
⑤ 천사의 영
5. 영의 신학의 정립을 할 때 영적 생명을 낳는다.
① 은사적인 영
② 기름부음의 영
③ 말씀의 영
생명이란 무엇인가?
날생, 목숨 명, 생명은 살아있는 존재감을 말한다. 생명에는 영적 생명 혼적 생명 육적 생명이 있다. 교회와 신앙은 영적 생명을 말한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 하여도 역사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영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생명을 전하는 자가 생명을 외치지만 내면에 생명이 없기에 그렇고 또 생명을 받을 자가 자세가 되지 않으면 그렇다. 신앙에 생명이 임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교회와 신자는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영적 생명이란 영적인 것이 살아 움직임을 말한다.
영적인 것은 기도와 말씀 찬양 예배 사랑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을 하나로 압축하면 그리스도가 나타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과 용서다. 오늘날 적지 않은 신자들이 사랑과 용서보다는 판단과 정죄가 있고 율법과 도덕에 묶여서 헌신을 한다.
그들은 그것이 생명인줄 착각을 한다. 이런 육적 행위는 영적 생명이 아니다.
이러한 것으로 착각된 생명은 영적 바벨탑을 쌓고 많은 자들을 영성 율법주의로 낳는다. 열심은 있지만 사랑과 용서가 없다.
이러한 이유는 생명의 기본을 알지 못하거나 생명을 낳는 공식이 맞지 않아서이다.
생명을 낳는 영성 원리
목회자와 사명자의 가장 큰 고민은 메시지에 대한 자유함이다.
목회자와 사명자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설교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주일과 공식예배를 위한 설교 고민에 들어간다. 주일 설교시간이 끝이난 저녁의 한가한 시간과 월요일을 사역자들은 평안을 누린다.
이런 사역자들은 메시지에 대한 자유함이 없는 사람들이며 그 고민을 평생 안고 가는 사람들이다.
메시지의 자유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많은 연구와 자료를 보고 작성한 설교법이 설교의 자유함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메시지의 진정한 자유는 믿음에서 온다.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으면 자유함이 있다. 메시지의 자유함이 없는 사람들의 설교 작성은 연구나 자료에 의존하여 어느 정도 조각이 맞으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진정한 은혜는 자신이 먼저 받아야 하고 믿음으로 올 때 교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친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 우리들은 기도의 양을 늘린다. 기도가 많아지면 역시 감정적으로 믿음이 강화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말씀의 논리가 맞을 때 가능하다. 말씀을 깊이 연구한 설교자들은 깊이 연구할수록 논리를 강화시킨다. 그래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믿음의 논리가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죽음과 율법의 논리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생명의 논리를 강화 시키라는 것이다.
생명의 논리는 성삼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함으로 가능하다. 결국 생명 있는 설교는 깊은 묵상과 예수를 체험한 것을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정립이 되어서 나올 때 낳게 된다. 진리와 자유! 메시지를 통한 생명력은 예수를 깊이 체험함이라는 것이 원리다.
목회는 종합예술과 같지만 그중의 핵은 설교다. 다 잘하고 설교를 못하면 영적 열매가 없다.
목회는 마치 종합 예술과 같다. 어느 한쪽만 치우 칠 수 없는 것이 목회며 신앙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취향에 따라 신앙을 선택한다. 어떤 이는 은사에 치중하고 어떤 이는 말씀만 강조한다. 또 제자 훈련이나 선교 전도 쪽에 올인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합하여 나오는 생명이 목회다. 그러나 그중 핵심을 말하라 한다면 영적 생명의 메시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전도와 은사가 활발해도 생명의 메시지가 없으면 영적 열매가 없다. 모든 목회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강단에서 흐르는 메시지의 생명이 필요하다. 모든 출발은 메시지에 있다. 그렇기에 사역자는 메시지가 없이 어떤 달란트나 은사 부분만 가지고 사역을 한다고 할 때 영적 생명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사역자가 메시지에 생명을 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좋은 설교는 좋은 교인을 낳는다.
좋은 교인과 나쁜 교인이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좋은 설교를 들으면 좋은 교인이 되고 좋은 교회가 이루어진다. 나쁜 설교를 들으면 나쁜 교인이 양산이 되고 나쁜 교회가 이루어진다.
좋은 교인 교회와 나쁜 교회 교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외적으로 우리가 판단 할 수 없다. 좋고 나쁨은 역시 좋은 영적 메시지를 가진 자만이 판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2장에서 자신은 남을 판단하나 남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판단 받지 않는 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은 좋은 메시지를 가진 자만이 판단의 특권이 있기에 좋은 메시지를 갖기 전에는 판단도 보류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판단을 들어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판단과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단순히 살아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살아 있고 열심을 다하여도 생명력이 없는 자들이 있다. 율법적인 생명도 생명이지만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 생명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온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이 생명이 들어 갈 때 좋은 교인을 낳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움직임을 말한다. 살아 역사함이다. 영적 생명을 가지면 영적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것을 강제적으로 훈련 한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가 있으면 그 생명은 운동력이 있다. 다만 그 생명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영적 생명력도 생명이고 육적 생명력도 생명이다. 육적 생명력을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들은 육성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육적 생명력이 더 강하다. 그렇기에 육적 생명력을 강조하면 더 열심이며 사람들 보기에 놀랄만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생명의 본질을 알고 영적 생명과 육적 생명에 대한 성경적 정립이 되었을 때 생명을 낳는 일들이 일어난다.
생명의 종류
영의 생명
혼의 생명
육의 생명이 있다.
영의 생명력은 무엇인가?
영의 생명은 육과 혼의 생명과는 다르다. 영의 생명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영원하고 스스로 운동력이 있으며 변질되지 않는다.
영의 생명의 구성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삼위 하나님의 마음이다.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임한 신약에 와서 복음서를 보면 말씀을 전개하기 전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이름으로 시작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이 영이 생명이며
요한복음 6장63절에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리고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씀이 생명임을 강조 하셨다.
그렇다 주님이 전한 말씀이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가? 그것은 살리는 말씀 즉 용서와 조건 없는 사랑의 말씀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 하늘로서 부터 온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생명의 메시지를 만났다는 것은 그 말씀을 만남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먼저 전한 뒤 어떤 조건부 사랑과 용서를 전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말이며 생명이 없는 메시지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꾸 율법과 도덕 훈련을 통해서 이루려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본성이 있는 것은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다는 반증이다. 영의 생명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다.
혼의 생명력은 무엇인가?
혼이란 세상을 지각하는 지혜다. 세상을 보이는 것을 우선하며 지각하는 것이 혼의 능력이다. 혼의 세계는 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영의 세계로 진입 할 수 없고 제한을 받는다.
혼으로는 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고 영의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혼은 생명력은 절대적이다.
혼은 여섯 가지 감각으로 느끼며 반응을 한다. 그중 다섯 가지는 오감을 말하며 눈, 귀, 혀, 촉각, 코 냄새 등을 말한다. 또 한 가지는 육감인데 정신의 세계를 인지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영의 세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느끼고 반응하며 대처하고 누리는 것이 혼의 생명력이다. 혼이 생명력이 있고자 하면 이 여섯 가지 감각에 있어 만족을 시켜 주면 된다.
보기 좋고
먹기 좋고
향기 좋고
촉감 좋고
듣기 좋고
상상력이 좋으면 혼의 생명력이 충만해 진다. 그러나 혼의 생명력은 철저히 외부 감각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원하지도 않고 생명력에 있어서 제한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잡혀 있다. 혼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감각을 깨우치고 보여 지는 일상생활이나 세상적인 감각을 깨우쳐서 만족을 시켜 준다.
육의 생명력은 무엇인가?
육은 세포로 시작되어 뼈와 근육 살로 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내부 기관이 있고 피를 통하여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육적으로 먹는 식품에 영향을 받는 것이 절대적이다.
당신이 아무리 영적으로 깊고 생명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고매하여도 굶으면 육의 생명력은 멈춘다. 그러나 육도 혼과 영의 연결점이 있어서 영과 혼에 반응을 한다. 이처럼 영과 혼과 육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물리적 생명력만 따진다면 육의 생명력은 식품만 먹으면 살 수 있다. 하지만 영과 혼의 지시를 따라 영혼의 영향력을 받으면 육이 행복감, 만족감을 누리며 육의 진정한 생명을 만끽한다.
생명을 낳는 방법은 성경에 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생명을 낳을 수 없다. 그렇다. 어떠한 종교 행위를 할지라도 성경을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생명이 없다. 그가 세상적인 사랑과 헌신 목숨을 내어줄 만한 사랑이 있었다 하여도 그것은 성경으로부터 온 생명이 아니다.
성경으로부터 온 생명은 인간이 부인 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말씀이어야 한다. 어떤 조건이나 도덕 윤리를 조건으로 강조한다면 그는 잠시 변하게 할 수 있으나 영원으로는 연결 되지 못하는 혼적인 생명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완전한 법 생명의 법을 연구하여야 한다.
생명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집중 하며 전 재산을 내놓는 투자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완전하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완전한 예수를 얻기 위해서는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헌신을 하지만 완전한 말씀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부족해 보인다.
성경 그곳에 목숨을 걸면 완전한 예수가 보인다. 완전한 예수란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말씀으로 만남이며 부인 할 수 없는 사랑의 말씀이 내 심령과 머리에 확증되어지고 기록 되어져야 한다.
성경은 법에 따라 역사한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어떤 것에 해당한 규정이며 약속이다. 성경이란 뜻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다 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전이다. 말씀은 법에 따라 역사하고 나타난다. 말씀을 벗어나면 하나님의 역사는 없고 법에 위반이 되는 위법 불법이 된다. 강력한 불법은 지옥불로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성경을 본다는 것은 법을 본다는 것이며 법을 잘 해석해야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뜻이다. 자기 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법을 변개하거나 해석하면 불법이며 그에 대한 형벌과 징계가 있음을 성경은 분명 기록 되어 있다.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법도 있지만 성경 안에는 율법도 있고 도덕법 풍속법도 있다. 알다시피 율법은 사망의 법이라 하였다. 이 율법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셨다. 생명의 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라 하여 그것을 먹기만 하면 사망으로 간다. 시편1편에서는 “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풀어서 율법을 묵상하여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한다면 사망으로 빠진다.
율법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묵상을 통해서 사랑의 법 생명의 법으로 먹으라는 뜻이다.
묵상이 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 드리면 죽음으로 몰아간다. 성경에는 이런 죽음의 법도 있고 살리는 생명의 법도 있기 때문에 무작정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 모두 지키려 한다면 온전한 생명의 법을 얻을 수 없고 생명을 낳을 수도 없다.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여러 가지 법을 알자
먼저 말했듯이 성경은 법전이다. 세상으로 보면 육법전서와 같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그 법을 잘못 해석하여 행한다면 불법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기 전에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법에 대하여 공부를 하여야 하고 법을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여러 가지 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성령의 법, 생명의 법이며
사망의 법
인간의 법
세상의 법등이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법은 서두에 말씀 한 것처럼 영원한 사랑과 무조건적인 용서를 가져다 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한다.
사망의 법은
법을 어겼을 때 받는 형벌을 말한다. 행한 대로 갚아주는 율법이 사망의 법이다. 사망의 법은 반드시 사람의 행위와 행동을 판단한다. 선악 악을 분별하는 선악과이며 심판의 법이다.
성경에서 처음 시작된 저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 되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 정녕 죽으리라 ” 하셨다.
인간은 심판할 자격이 없다. 오직 법을 세우신 하나님만이 심판할 수 있다. 그 심판의 자리에 선 자가 사단이며 적그리스도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는 심판과 판단 속에서 살아왔고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그곳에는 끊임없는 저주와 불행이 존재 하는 이유가 바로 선악과를 먹은 심판자의 불법 때문이다.
인간이 유일하게 심판을 할 수 있는 때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을 때 솔로몬에게 임한 심판권이 주어졌을 때뿐이다.
인간의 법은 무엇인가?
인간의 법은 각기 민족과 나라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그 법 역시 유한하다. 즉 영원성이 없다는 뜻이다. 영원한 사랑과 용서에 대한 보장이 없는 법이 인간법이다. 인간도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다.
역사적으로 헌신하는 위대한 위인들, 성인과 군자 철인은 이런 반열에 들어간 자들이다. 그러나 영원성이 없다. 영원성이 없는데 그 법에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운영한다. 인간 세상에서는 합법이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법에 들어가면 불법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철학을 사람의 속임수라 하였다. 철학의 대가였던 사도 바울도 세상 법 인간 법을 배설물처럼 여기라 하였다.
인간에게 엮여져서 성경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법이 우선되지 않는다. 인간을 대하면서 인간을 배제하는 설교는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이 우선되는 설교는 있어서는 아니 된다.
생명의 메시지란 하늘로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법에 우선하여야 한다. 인간의 감정과 의리에 준하는 설교는 영적 생명력이 없다. 실제 인간을 대하는 설교자는 인간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그것은 오직 하늘의법 온전한 생명이 올 때 가능하다.
세상의 법은 무엇인가?
세상의 주관자는 역시 보이는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가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만 많은 나라를 인간들이 다루기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세상법이 이루어진다. 세상 법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한다. 즉 영원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 법을 버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성경에서는 국가의 법도 지키라 하였다.
그러나 그 법 위에는 상위법이 있어서 하늘의 법이 우선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세상 법은 철저히 환경과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진다.
성경은 생명을 다루는 법전(法典)이다.
사역자와 신자는 성경을 볼 때 다룰 때 가벼이 대하지 않겠지만 더 강조해야 할 것은 생명을 다루는 법전으로 대하여야 한다.
법은 지키면 그 법안에서 평안을 누리지만 지키지 못하면 불법이며 불법에 해당하는 징계와 형벌을 받는다.
사실 성경은 살리는 법을 적어논책이다. 이 살리는 생명의 법전을 가지고 사망의 법을 전하면 불법이며 그 불법은 대가는 반드시 따른다.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각 부분에서 이 말씀을 가감하면 분명히 형벌이 따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가감이란 뜻은 단어나 토씨 하나를 제하거나 더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각 나라에 번역이 되면서 원문에 해당한 단어나 토씨는 끊임없이 가감 되어 왔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개역성경 이후 개역 개정이나 새 번역 공동번역 등을 보면 수없이 단어나 토씨가 가감 되었다.
그런 의미의 가감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의도 생명의 뜻에 의한 가감을 말한다. 생명을 저주로 사망의 법으로 가감하면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생명의 법전이라 함은 생명의 의도를 전하는 책이므로 생명 이외에 다른 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다.
목회자 사명자가 성경의 법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을 다루는 자가 아닌 세상의 법을 다루는 자가 된다.
목회자 사명 자는 하나님의 법을 다루는 자다. 거듭난 영적 신자 역시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주셨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다루는 자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생명의 법을 알지 못하면 결국 세상 법을 전하게 된다. 일단 시작은 하나님 예수로 시작하지만 결국 율법으로 떨어지고 생명이 없는 메시지는 세상법의 재판장이다.
마치 애굽에 있는 애굽 제사장과 같은 역할이다. 세상 기준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강단에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능력 있고 실력 있다고 추앙하기도 한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법으로 잘 풀어주면 실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이것은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이다. 이 사람은 세상의 제사장이지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다.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은 엄격히 다르다. 이것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전하는 자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강단에서 서는 자가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강단은 아무나 서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복음과 성경을 벗어난 자기 간증이나 천국입신 간증 그리고 율법적 강조를 하는 설교 등이다. 강단을 오염 시키면 교회가 오염되고 생명이 살아나지 못한다.
세상법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청춘을 다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얻기 위해서 인생을 다 바쳐라. 보통 신학을 제대로 하면 십년이란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것도 정규 신학대학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나오며 자신이 열심을 다 할 때 가능하다.
목회자 사명자가 하나님의 법을 얻고자 해서 얼마나 많은 집중과 투자를 하였는가! 자신을 살펴 봐야한다.
사실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은 목회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시작하는 가장 기초적 교육에 불과하다. 진짜 교육은 목회와 사역을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난관을 헤쳐 나아가며 얻는 교육이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열심히 했을 때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하고 수준이 오르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나이가 오십 육십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감을 잡는다. 이것은 통계다. 그러한 감을 잡은 사람도 흔치는 않다. 이만큼 하나님의 법은 세상 법을 얻기보다 힘들다. 필자의 경우는 십여 년 세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생명의 법 하나님의 법을 얻기에 몰두한 결과 나름 생명의 법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십여 년 몰두 한 세월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이삼십년의 세월도 어쩌면 포함된다고 본다. 예수 믿은지 사십 오년 만에 얻은 법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얻은 자로써 살펴보자면 과연 이 생명의 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집중하고 투자 하여야 하나 생각해보면 정말 이 생명의 법을 얻기 위해 인생을 투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세상법속에 살아가는 것과 세상 법을 가진 자와의 차이는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세상법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 법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검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등 법을 아는 몇몇 부류들뿐이다.
부동산 법을 잘 아는 자가 부동산을 소유한다. 증권과 주식 법을 아는 자가 주식으로 혜택을 받는다. 이처럼 법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생의 형편이 달라진다.
우리는 하늘의 법이 있는 교회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늘의법을 주관하여서 쓰는 하늘 법을 가진 자가 많지 않음을 안다.
하늘의 법이 내게 주어지려면 법을 알기 위해 청춘을 바쳐야 하고 인생을 거기에 투자 하여야 한다. 사실 하늘의 법을 집행하는 자가 교회 안에 담임목사나 중직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법을 잘 알지 못하는데 법집행을 강단에서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다.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날 살펴보면 열심을 다하여 목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하여도 과연 하늘의 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집중 하였는가 묻고 싶다.
열심을 다해 사역을 하지만 주어진 일정 속에서 심방, 기도회 인도. 예배 인도, 전도 등을 통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 목회자의 일상이다.
제대로 깊은 생명의 법을 연구하거나 말씀을 정립하기위해 기도 하거나 배우러 간다든지 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많다.
그러나 결국은 본인이 투자하고 집중하여 법을 얻는데 전념을 다하여야 한다. 더도 덜도 말고 사법 고시 준비생이 공부 하는 것만큼만 하라.
젊음을 청춘을 시간과 돈을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법 얻는데 올 인하라. 그러면 얻어질 것이다. 이것이 최우선 되지 않으면 평생 하나님의 법을 완성 보지 못하고 세상법이나 인간의 법이 혼합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전하다 가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법대로 행하지 않는 자를 불법을 행하는 자라 하였다.
불법을 행하는 자에 대한 형벌은 엄청나다. 사도 바울은 법대로 경기를 하라고 하였다. 설교와 메시지 신앙생활은 법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산다고 모두 삶이 아니라 법대로 사는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된 삶이다.
법대로 살려면 법을 알아야 하고 법을 이해해야 하며 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예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법을 지킨다. 성경의 법은 영적인 법이다.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지 않음에 대한 추궁이 있다.
목회자와 사명자 신자는 반드시 법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법을 지켜야 한다. 그 법은 성경에서 나오며 생명의 법이다. 생명의 법이 아닌 사망과 율법은 반드시 형벌이 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강조하였다. 푯대는 목적을 말한다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천국에 대한 목적이며 두 번째는 삶속의 천국을 누리는 목적이다. 둘 다 영적인 것이지만 혼과 육도 관장을 한다. 하늘로부터 영으로부터 온 것이 우선된 목적이 있을 때 설교자도 신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 속에 들어간다.
설교자와 신자가 목적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주님의 목적과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주님이 천국의 삶을 주고자 하여도 어긋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확실한 뜻을 아는 설교자와 신자는 설교와 삶속에서 확실한 목적을 나타낸다. 확실한 목적이 없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생명과 상관이 없다. 주님의 확실한 목적을 아는 자가 확실한 영적 생명의 메시지를 전한다.
잘못된 목적들
잘못된 목적이 설교로 나타나면 자신과 교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으로 떨어지게 한다. 우리는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행할 때 자신과 남을 속이기를 반복한다. 자신도 남도 그 잘못된 목적이 진실 된 삶이며 목적이고 설교인줄로 착각을 한다.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잘못된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외적으로 부흥되기를 바라는 목적의 설교
교회의 부흥은 모든 목회자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외적인 것에 치중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외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건물을 크게 세우고 교인수가 늘어나며 재정이 풍부해짐을 말한다. 여기에 목적을 두고 설교를 한다면 잘못된 목적의 설교다.
외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목적 하시는 바를 행할 때 주시는 보너스다. 보너스가 주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어느 때 부터인가 외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설교 하고 있거나 그것이 기준이 되었다. 교인이 많이 늘어나고 재정이 풍부하고 교회 건물이 커지면 능력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렇다면 이단 이방종교들이 외적으로 얼마나 크고 숫자가 많은가?
너무 숫자에 민감하고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 민감하면 자신이 잘못된 목적과 기준에 있음의 반증이다.
진정한 부흥은 내적 부흥이다. 내면에서 풍부함과 충만함에 목적을 둔 메시지가 영적 메시지며 주님의 목적에 부합한 메시지다.
교인이 변하기를 바라는 목적의 설교
교인이 자기 설교를 듣고 변화하기를 바라는 목적의 설교는 잘못된 설교다. 수년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교인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다면 그러한 설교자는 분명 목적이 잘못된 설교를 하는 사람이다. 남이 자기 설교를 듣고 변하기를 바라지 말라! 또 그들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두고 설교를 작성하지 말라! 변하지 않는 다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교의 목적은 자신의 변화함이다. 자신이 변화하지 않고 남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설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들이다. 증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체험한 자들이다. 증인은 본 것만 체험한 것만 전한다. 보고 체험한 자는 변하게 되어 있다. 보고 체험한 것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이 체험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은 것을 상대가 보고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은 증인이 아니다.
그는 소설가나 시인에 불과하다. 시와 소설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든 가상의 시나리오다. 그들이 잠시 사람들에게 위안이나 위로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소설을 읽고 시를 낭독하면서 인생이 변화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생의 변화는 자신의 철학에 대한 정립과 인식에서 온다. 철학이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철저히 의문을 가지고 자신을 질문하면서부터 들어간다. 소설과 시는 완성된 것을 즐기지만 철학은 질문하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하려는 자세로 들어간다.
인생에 대한 자기 철학을 가진 자가 변화한다. 오늘날 설교는 너무나 소설적이고 감상적인 시상에 잡혀있다. 느낌은 있지만 변화는 없다. 변화하는 설교는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그것을 풀어가는 자세가 있을 때 변화를 한다. 설교자 자신이 그렇게 행하면서 설교를 작성해 나갈 때 상대가 변화 하는 설교가 된다.
변화하는 설교는 먼저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해결을 봐야 하며 이 단계는 복음과 생명을 만난 단계라 본다. 두 번째 상대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삶을 말로 전하는 것이 변화 되는 삶이며 상대에게도 철저히 의문을 던지는 설교를 해야 한다.
의문이 없이 즐기기만 하는 설교는 변화하지 않는다. 당신의 존재는 무엇이며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고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 현실적인 질문에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교인이 변하기만 바라는 설교는 잘못된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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