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17장 1~16절
요절: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욥기 17:3)
서론: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실존적 한계상황
20세기 유대계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단의 한계상황을 경험한 뒤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를 창시했습니다. 그는 수용소라는 '인간적 존엄과 모든 보증이 완벽히 파산한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목격했습니다. 프랭클은 인간이 소유, 건강, 평판, 심지어 가족마저 빼앗긴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단 하나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환경과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영적 자유”였습니다. 인간의 조건과 세상의 담보가 완전히 소멸한 무덤의 문턱에서, 인간은 이성적 계산이 아닌 의미를 향한 영적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본문의 욥이 처한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욥은 자신의 기운이 다하였고 무덤이 그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탄식합니다(1절). 친구들의 비웃음 속에서 그의 영혼은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절망의 끝에서 세상을 향한 기대를 접고, 하나님을 향해 영적 시선을 고정합니다.
본문은 실존적 절망의 한복판에 선 성도가 어떻게 인간적 소망의 종말을 고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적 보증을 붙잡아야 하는지 증언합니다.
1. 인간적 담보의 파산과 하나님의 자기 보증
욥은 3절에서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라고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담보를 잡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라브(עָרַב)’는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겠다고 자신의 존재나 재산을 걸고 보증을 서는 법정·경제적 행위를 뜻합니다. 욥은 땅 위에는 자신의 억울함과 죄 없음을 보증해 줄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친구들은 지혜가 가려졌고(4절), 사리사욕으로 친구를 비판하는 자들입니다(5절). 이에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되시는 동시에, 피고인 자신을 위해 스스로 ‘보증인(에라브)’이 되어달라는 파격적인 기도(신인동형론적 호소)를 드립니다.
프랭클이 관찰했듯, 극한의 고난 속에서 세상이 제공하던 기존의 모든 보증(재산, 지위, 친구의 평판)은 단숨에 효력을 잃습니다. 타인은 결코 내 고통의 무게를 대신 짊어져 줄 보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욥이 요청한 ‘에라브’는 이처럼 유한한 피조물 세상의 모든 보증 구조가 해체되었을 때, 오직 절대적 창조주만이 나의 존재를 책임져 주실 수 있다는 철저한 한계 자각에서 나온 부르짖음입니다.
이 구약의 구속론적 부르짖음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ἔγγυος, 엔기오스)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7:22)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친히 우리의 빚을 짊어지시는 ‘에라브’가 되셨습니다. 세상의 평판이나 스스로의 의로움이라는 담보는 반드시 파산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2. 눈물의 어둠 속에서 정화되는 영적 인식
욥은 7절에서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카하)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고백합니다. ‘카하(כָּהָה)’는 슬픔과 눈물, 노쇠함으로 인해 시력이 쇠퇴하여 사물의 본질을 분간하기 어려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창 27:1, 신 34:4). 욥의 육신적 눈은 통곡으로 인해 어두워졌고, 사람들의 속담거리가 되어 침 뱉음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6절). 그러나 이 ‘카하’의 상태, 즉 현상계를 바라보는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는 경험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가짜 빛들을 차단하는 계기가 됩니다. 욥의 눈이 어두워질 때, 비로소 세상의 평가나 친구들의 왜곡된 신학이라는 환상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독대만이 남게 됩니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의 칠흑 같은 밤, 시체와 오물로 가득한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사랑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이자 가장 높은 목표"라는 영적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육신의 시야가 닫히고(카하) 현상계의 화려함이 지워질 때, 인간은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 진리와 영적 차원을 또렷하게 직면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육의 눈이 감기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영의 눈을 떴으며,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12)
오늘날 성도가 겪는 시련의 눈물과 인식의 어둠은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세상적 가치관과 자기 중심적 시각을 어둡게 하시고(카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영적 정화의 과정입니다.
3. 절망의 무덤 위에서 더해지는 역설적 능력
17장의 후반부(10~16절)에서 욥은 자신의 날이 지나갔고, 소망이 무덤(스올)으로 내려간다고 말하며 깊은 비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참담한 죽음의 어둠 한복판인 9절에서 거룩한 반전의 선언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야시프 오메츠).” (욥기 17:9) ‘힘을 더하다’의 히브리어 ‘야시프 오메츠(יֹסִיף אֹמֶץ)’는 외부적 환경이 좋아져서 얻는 힘이 아닙니다. ‘야시프’(더하다)와 ‘오메츠’(내면적 결단, 용기, 강력함)의 합성어로, 모든 환경이 절망을 가리킬 때 오히려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역설적인 신앙의 견인력을 뜻합니다.
프랭클이 역설했듯,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고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내면의 의지만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욥이 선언한 힘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기복적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소망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절망의 절대 한계선 위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집념으로 내면의 용기를 벼려내는 ‘야시프 오메츠’의 역설적 능력입니다.
이 역설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 영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성도의 힘은 고난이 제거되는 데서 나오지 않고,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 주입될 때 터져 나옵니다. 무덤(스올)의 썩어짐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의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날마다 우리 영혼에 ‘야시프 오메츠’의 능력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스올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보증을 바라보라
빅터 프랭클의 고백처럼, 삶의 의미는 편안함 속이 아니라 고난을 견뎌내는 거룩한 태도 속에서 완성됩니다. 본문의 욥은 바로 그 극한의 한계상황에 서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본문처럼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무덤의 침상만이 기다리는 것 같은 칠흑 같은 밤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인간의 담보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욥은 세상의 모든 의지할 것이 파산했을 때, 하나님께 스스로 ‘보증(에라브)’이 되어달라 기도했습니다. 눈물의 고통으로 육의 눈이 ‘어두워졌을 때(카하)’, 영적 정화를 경험했습니다. 소망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절망의 끝에서, ‘내면의 역설적 힘(야시프 오메츠)’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욥은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자가 보증을 구했지만, 신약의 성도인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보증(에라브)을 가지고 있습니다.
ㆍ그분이 우리의 확실한 보증(עָרַב, 에라브)이 되셨음을 믿으시가 바랍니다.
ㆍ육의 눈이 ‘어두워지는(כָּהָה, 카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ㆍ절망의 수렁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의인의 길을 달려갑시다.(יֹסִיף אֹמֶץ, 야시프 오메츠)’
이 영원한 보증 되신 주님을 붙들고 날마다 속사람의 힘을 얻어 승리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