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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상을 품는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과 괴리가 심할수록 결과는 참담하다.
비록 우찌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하되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하고 늘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풍산 교회에 있을 때 정 선생으로부터 일본의 ‘원시교단’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교회는 바로 내가 꿈꾸던 큰 가정과 같은 교회였다. 구약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처럼 물질적 기둥과 영적 기둥을 중심으로 실제적 대가족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정에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와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교회의 재정을 대부분을 담당하는 기둥이 있고 목사는 영적인 보살핌을 펴는 것이었다. ‘장막교회’라고도 하는 이들의 교회는 현실적으로 일본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의 도시는 땅값이 비싸서 일반적으로 집이 작아서 가정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치르려면 불편한 일이 많다. 그래서 모임 장소도 보통 교회처럼 강당 위주가 아니고 큰 집처럼 되어있었다.
거기서 관혼상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대부분의 가정 행사 즉 돌, 생일 파티, 각종 축하연 등을 교회에서 치르는 것이다. 교회에는 여분의 방이 있어서 부부 싸움을 해도 교회로 피신을 오고 심지어는 손님이 와도 교회의 영빈관에 재운다. 한 마디로 교회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신자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정 선생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도 언젠가는 한국에서 그런 교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85 년도에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양구 교회를 사임하고 병원원장 부부와 함께 석관동에서 생활교회를 시작했다. 한국적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 성구도 성구사에서 파는 기성품을 사다가 쓰지 않고 직접 구상해서 통나무로 만들었다. 헌금함은 절구 형태로 만들고 강대상은 우리 선조들의 최초의 신앙 모텔인 고인돌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성구 사진
그러나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미숙한 시각의 결과는 참담했다. 3 년을 사귀어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서 믿어서 목회하던 안정된 교회를 사직하고 함께 교회를 시작 했던 원장부부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그들의 탓이 아니었고 내 자신이 목표에 대한 설익은 열정 탓이었다.
물론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교회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같이 모델이 될만한 작은 교회도 방문해 보기도 해서 그들도 이해를 잘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상 교회를 시작하고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해서 신앙의 내용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소위 은혜스러운 교회, 즉 기복적, 주술적, 신비주의적인 교회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다. 원장 부부는 일본의 ‘원시교회’의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직원들의 월급은 한 번도 정한 날짜에 주지 못하면서 부부가 서로 생일을 축하한다고 몇 백 만 원짜리 시계나 반지를 선물을 했다. 목사로서 가까이서 그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기회를 맞게 되었다. 원장 부인은 그 해 고 3이었던 아들 때문에 밤마다 삼각산에 올라가서 울부짖으면서 철야 기도를 했다. 나로서는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몇 번 쫓아가서 기도를 한 다음에 물었다.
“집사님! 아들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요. 인간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내년 입시만 하나님께 맡길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원장 부인이 눈물을 지으면서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모르셔서 그래요, 우리 애에게 한 달 학비가 300만원 들어요.”
나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1 기분에 6 만원 할 때이니 보통학생 150명의 학비를 쓰는 셈이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목사의 양심으로 이것은 꼭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돈을 가지고 자식 교육을 위해서 얼마를 쓰던지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등록금이 없어서 못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데 150명 학비를 혼자서 쓴다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아무 소리 없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예배를 보러 다녔다.
그들에게는 내가 부담스럽고 거북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병원의 원목의 역할도 겸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병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들이 나의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것을 뻔히 알고 나 또한 마음속 밑바닥에는 그들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지만 목회자의 자존심 때문에 조금도 표현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예배를 인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마츄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방회의 선배 목사들에게는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믿음이 좋은, 그런 알짜(?) 신자가 나같이 수상한 목사와 연결된 것이 언짢은 일이었다. 또 교회를 시작한다고 찾아 다니면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지 않은 것도 용서 할 수 없는 큰 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단을 떠난다던지, 혹은 목회를 못하게 되면 죽을 줄만 알았기 때문에 목회자 세계에서의 질시와 소외, 목회자로서의 앞날에 대한 불안에 싸인 세월을 보냈다. 당시는 교단이라는 것이 그 교단에서 목사로서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한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소외는 타인과 다른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데 나는 전자 편이었다.
함께 교회를 시작했던 원장이 경영하는 병원의 사무국장으로 50 후반의 박 장로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어 사기 전과가 있을 정도로 인생 경험이 풍부했고 교단 안에서도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아직 신출내기 젊은 목사인 나보다도 훨씬 많이 선배 목사들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로나 삶의 경험으로나 처세술로나 나는 도저히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중에 원장조차도 그에게 사기를 당해 병원을 팔고 부인이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순진하게도 모교회 출신이였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저는 아무 것도 모르니 장로님만 믿습니다.’하는 자세로 대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그는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원장 부부가 자기와 같은 교회를 다니다가 나와서 생활 교회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나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지방회의 회계라는 자격으로 임원회에 참석해서 생활교회가 교회승인을 받지 못하도록 공작을 꾸몄다. 나에게는 교회승인 신청을 받으려면 케이크라도 사서 임원 목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인사를 해야지 가만있으면 되느냐고 해놓고서 내가 도착하기 전에 목사들에게 전화를 해서 “지 목사가 선배 목사들을 우습게 알고 건방지니까 이번 기회에 혼을 내주라”고 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하고 염려하듯 하면서 뒤돌아서는 걸음걸이부터 말하는 것까지 나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비난을 하는 방법도 워낙 교묘해서 정면으로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은근히 사람을 말려 죽이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젊은 목사들은 도대체가……. ”하면서 점잖게 나무라는 식이었다. 앉으나 서나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모든 것이 트집거리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원장 부부와 나를 갈라놓고 교단에서 생활교회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해서 내가 쫓겨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박 장로의 의도와 사람됨을 알게 되었지만 나로서는 그를 상대로 도무지 방어 하거나 대항할 수가 없어서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박 장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꼼짝을 할 수 없이 올무가 죄여 들어오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당하지 않도록 도망치는 길뿐이었다. 즉 그가 원하던 대로 교회의 문을 닫고 떠나는 길이었다.
원장 부부와의 결별은 실제적으로 교단과도 결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주가 떠나버린 생활교회는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결국은 8개월 동안 집세를 못 내고 우리 네 식구의 생존조차 위태롭게 되었다. 수입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급기야는 살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 수 밖에 없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우리 집 안에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딱 한 가지 팔 수 있는 것을 찾았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누가 기념품으로 해 준 한 돈짜리 금 십자가였다. 아무리 금이라고 하더라도 목사가 십자가를 판다는 것이 좀 켕기는 일이기는 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 수 없이 팔아서 몇 일을 살았다. 아마 십자가가 구리나 나무로 되었다면 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금으로 되어 있으면 십자가뿐 아니라 예수도 교회도 하나님도 팔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을 배웠다.
병원 옆에 붙어있는 건물에 세를 들어 있는 교회 안에 칸을 막아서 살고 있는 우리 집에서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오죽하면 우리 처지를 아는 병원 직원이 라면 박스를 사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한 마디 원망이나 불평이나 혹은 약한 소리를 하지 않고 15 개월을 견뎠다. 1 년이 지난 후 자기들도 괴로웠던지 천만 원짜리 어음을 끊어 줄 터이니 교회를 옮겨보라고 했다. 그러나 수 십 군데나 물색했지만 어음으로 건물을 얻을 수는 없어서 결국 그들과 전혀 관계없이 순전히 내 힘으로 갈 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피아노까지 팔아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은 돈 4 백만 원, 그것을 가지고 옮겨 갈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10개월 동안 수도권 일대에 다 찾아 다녔지만 교회는커녕 우리 네 식구가 들어가 살 만한 집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을 찾아 복덕방 영감님을 따라 빈민촌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전파상의 라디오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될 수가 있네..........아/ 아/ 대한민국” 하는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내가 갈 곳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거리의 목사가 되는 길이었다.
광명시 하안동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이사를 간다고 할 때 원장 부부는 1.000 만원 대신 병원 직원을 시켜서 병원 식당에서 쌀 반 가마니를 보내왔다. 자존심이 상해서 돌려 보내고 싶었지만 좋은 관계로 끝내기 위해서 참고 받았다. .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는 단순히 한 가지 원인만 있는 법은 없다.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함수 작용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미숙함이다. 초보운전자의 운전미숙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되듯이 인생에서도 미숙함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꿈과 이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세상의 무서움을 배웠다. 내가 세상을 잘 몰랐던 탓이었다. 세상은 무서운 것이다. 세상은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지 않았던가?
자기를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이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다. 나도 미움과 증오로 밤을 새운 일이 있었다. 그럴 때 내가 드렸던 기도이다.
주여!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무리가 있습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해 끼침을 중단하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미움의 사슬에서 풀어 주소서.
그러나 바로 그런 때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던 때였다. 너무도 힘이 없고 절망스런 상황이 계속되어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지던 때 초인종 소리만 나도 전화 벨 소리만 울려도 제발 좋은 일이었으면 하는 상황에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수없이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