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세속오계와 한민족 정신문화의 발원
우리 민족의 정신 문화가 불교와 유교로 부터 발원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왜냐하면 고대 조선의 창건으로 부터 시작하여 홍익인간에 의한 민본 사상으로 형성된 고유 문화가 발전되면서 우리 민족 나름대로 신앙,사회,언어,지리 법률,정치 군사 등의 사상이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와 유교의 유입으로 전통문화는 유입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따라서 유입 문화의 영향이 전통 문화에 잠식되면서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유입 문화가 끼친 영향이 아무리 컸다 해도 고유의 전통 문화가 퇴색하지 않고 그대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실은 현재의 민족의 기상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원천적 의미를 갖는다.바로 그 전통이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의 집요한 침략과 동화 정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고 본다.
고대 조선의 왕조가 멸망한 후,부족 국가는 한반도를 위시하여 중국대륙의 일부에서 민족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한무제(漢武帝.재위 BC141~BC87)가 강력한 고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기는 했어도 조선의 많은 부족 국가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다.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한지 1년이 지나면서 조선으로 부터 침략군을 거두어 들이고 최고 사령관을 처형했다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기록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 일부에 있는 한민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국력의 손실이라는 것을 깨달었기 때문이다.
근래의 우리 국사서에는 한무제가 고대 조선을 멸망케 한 다음 한의 조선 지배를 위하여 조선의 한 통치기관인 낙랑,진번,임둔,현도 등의 4개 군 즉 한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그러나 그 기록은 애매한 점이 있다.
원래 한사군이 기록된 원전인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에는 한반도의 4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또한 중국인들이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한무제가 조선 지배를 위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주로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우리의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전한서(前漢書)를 인용하여 이들 4군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한반도의 한강 이북 지역에 설치 된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의 일부 지역에 있는 한민족의 발호를 통제하기 위하여 압록강 변과 그 북방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중국측 학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의 한무제에 의한 조선 지배설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고대 조선이 멸망하고 삼국이 창건될 때까지 약 50년 내지60년 간은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의 시기로 볼 수 있다.그리하여 가장 뚜렷한 부족국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진한,마한,변한 등 삼한의 출현이며 이들 부족국가가 차츰 강력해 지면서 신라는 기원전 57년에,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각각 단일 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삼국의 출현으로 비로소 78개의 부족국가는 삼국으로 통합이 되면서 삼국시대의 새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민족의 진취성과 주체성 그리고 독립에의 불타는 의지는 위대한 민족 사상의 발로로 볼 수 있다. 그 민족 사상의 편린을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겨레의 세속(世俗)에서 숨쉬고 있음을 발견한다.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보살계가 있어서 그 구분이 열가지가 되지만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된 몸이니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지금 우리나라의 세속에는 5계가 있으니 다음과 같으니라'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
셋째는, 신의(信義)로서 벗을 사귀는 일이요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다섯째는, 산 것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다.
원광법사는 원래 불교를 익히기 위하여 중국에 건너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불교와 유교에 대한 학문을 깊이 터득하였으므로 불교와 유교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원광법사는 불교에 관한 한 당대의 일인자이다.그러나 그가 설파한 세속오계란 중국의 사상도 아니요 더욱이 불교 사상도 아니다. 그가 말한대로 옛부터 내려오는 세속인 것이다.세속이란 세상 풍속을 의미한다.세상 풍속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그 사회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 된다.즉 전통의 한 가닥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세속오계를 '화랑도의 5계'로 알려져왔으나 화랑도는 세속오계에서 빌려다 인용한데 불과하다.
세속오계는 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바로 이 세속오계가 민족 사상의 근간이요 한민족 정신 문화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신라 원광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명하면서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하였다.이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앉아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루고 보살의 계율 열가지를 제정한 것을 말한다.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중생을 죽이지 말라.
2. 도둑질 하지 말라.
3.음행하지 말라.
4. 거짓말 하지 말라.
5.술을 만들어 팔거나 마시지 말라.
6.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7.자기를 칭찬하거나 남을 비방하지 말라.
8. 제것을 아낄려고 남을 헐뜯지 말라.
9. 성내지 말고 참회를 잘 받으라.
10. 불법승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위 열 가지는 불도를 닦는 보살이 지켜나갈 계율이다.그 내용을 살펴 보면 보통 사람들도 지켜야 할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그러나 원광법사는 자신의 종교보다 먼저 국가와 민족을 살피는 슬기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의 계율을 강조하지 않고 세속오계를 정리 제시한 것이다.원광법사가 말한 세속이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원광법사가 설파한 세속오계란 불교를 떠나서 오직 애국심에 의해 같은 겨레의 처지에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승려이지만 자신의 종교를 널리 펴내는 것 보다 순수한 국가관에서 강조했으므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런 뜻에서 세속오계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본다는 것은 옛 조상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세속오계의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라는 것인데 이는 바로 국가에 충성하라는 내용과 당시는 동의어였다.군주제의 국가에서는 군주가 곧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의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은 한민족의 전통적 가치관의 하나로서 충성심과 더불어 효도는 우리 민족 대표적 사상으로 알려진 '충효사상'이다.
옛부터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군자국(君子國)으로 불러 온 것은 바로 충효사상을 비유한 말이다.중국은 약 4천년 전 사실을 기록한 천문지(天文志),상서(尙書),우공(禹貢) 등 옛 문헌에서 우리 민족의 국가를 군자국으로 부르고 있다.
셋째의 신의로서 벗을 사귀는 일은 참된 인간성을 중시한 사상이다.신의는 예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넷째 싸움에 나아가 물러서지 않는 것은 전형적인 군인정신이다. '임전무퇴(臨戰無退)'야말로 불교와도 관계가 없으며 중국인의 사상과도 현저한 차이가 있는 어휘이다.
한민족의 이러한 강인성 때문에 그 많은 외세를 무찌르고 굳건히 국력을 지켜나갔다.
다섯째,산 것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것은 잔학하지 않은 민족임을 말해 준다. 바로 인의심(仁義心)을 뜻한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 속에서도 잔학하지 않고 인의심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한민족의 특성이다. 별로 멀지 않는 나라 일본인과 대비되는 국면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불교에서는 살생이 엄히 금지되어 있는데도 원광법사가 '필요에 따라서는 죽여라"는 의미가 함축된 '살생유택(殺生有澤)'을 말한 것은 종교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보전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불교가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의 보전을 중시하게 되면서 호국불교라는 불교사상이 정립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가 민족 사상의 근간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홍익인간과 더불어 한민족 특유의 정신 문화로 정착시킨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란 불교와도 관계가 없으며 더욱이 중국의 사상과도 관련이 없는 한민족 고유의 사상임을 밝히면서 앞으로 한민족의 정신 문화면에서 홍익인간과 함께 세속오계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첫댓글 고유의 전통 문화가 퇴색하지 않고 바로 그 전통이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의 집요한 침략과 동화 정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고 본다는 것에 동의 합니다. 사실 사마천의 사기(史記) 기록은 승자의 자화자천의 기록이며 자기들 멋대로의 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봅나다. 그것을 다 고지곳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한 참고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한민족의 정신 문화면에서 홍익인간과 함께 세속오계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선배님의 글에 동의합니다.
또 이견이 있어 미안합니다.토론의 장이니 너그럽게 봐주세요.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습니다.자화자찬도 있지만 조선군에게 패했다는 기록이라던가 조선군에 패한 장군을 처형했다는 기록은 우리 사료에서는 찾이 졸 수 없는 유일한 우리 고대사의 부분입니다.만약에 사마천의 사기에 [조선열전]이 없었더라면 삼국유사만으로 우리 고대사가 인식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예 맞습니다. 허나 우리로서는 기록이 없서 그후 삼국유사들의 기록으로 남아 알있는게 전부이니 별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는 기록이란것이 절대가 아니란것입니다. 물론 승패의 기록이라던지 수나라가 고구려에 100만 대군을 이끌고와 멸망해서 수나라가 망하여 그후 당나라가 생기고 그 엄연한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중국의 사기는 어디까지나 자기들 나라 중심으로 쓴것이고 그들의 사기에는 동방의 오랑케를 뭇찔렀다는 사실을 역으로 생각해서 우리의 존제를 파악할수있다는 빈약한 자료로 만족하고있슬 뿐입니다 . 반면 매장문화는 서로 속일수 없습니다. 각 나라의 풍습과 세력 범위와 무기류를 통해서 국력
을 파악할수있습니다.또한 성곽이라던지 산성이라던지 왕과 귀족의 집단적인 무덤등을 통해서 그나라의 국력을 확인할수있으며 조그만 예로 만주에있는 광개토완비를 보드라도 고구려의 국력을 판단할수있는 예입니다. 어떻튼 이장이 선배님과의 대화로 많은 것을 배워 유익함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책,문서 등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연구임을 시인합니다. 앞으로 최단 박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매장문화,역사적 유물 등에도 관심을 갖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선배님이 그동안 연구하신 논문을 볼때 저의로서는 상상할수없는 많은 경지에서 유익한 글들을 보고
느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저야 골동품을 만지다 보니 출토품에 대한 좁은 식견을 보완하기 위하여 주서들은 지식을 말했을뿐 선배님처럼 학구적으로 논리있게 저술하신 것을 볼때 종경해 마지 않습니다. 정독하여 재 지식으로 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해서 연구에 전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