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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의 「우리」에 대한 소고 / 박승류
* 「어린왕자」와 「꽃」
인간세상에서 조화로움만큼 중요한 덕목도 흔치 않을 것이다. ‘조화’는 ‘관계’로부터 나오는 화음 또는 색깔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조화와 관계의 중요성을 직접 말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진부하기까지 하다. 또한 그렇다 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마냥 외면하는 것도 중요한 논제에 대한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영화와 연극, 미술과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역시도 그러하다.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 중, ‘생텍쥐페리(Saint-Exupery, Antoine-Marie-Roger de)’의 「어린왕자」가 생각난다. 「어린왕자」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개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나’와 ‘너’의 정신적 유대를 통해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음미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관계의 소중함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을 그린 「어린왕자」가 어른을 위한 작품이라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 아니듯 사회가 인간미를 상실하고 점점 황폐해져가는 것이 아이들 탓이 아니라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은 어른들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아이들은 피해자일 뿐 모든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 탐욕에 예속되어 바쁘기만 한 사회가 탐욕을 성취할 수단에 대체로 골몰하지만, 다행히도 가끔은 사회정화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여기서 사회 정화란 정서적인 정화 또는 순화를 뜻한다. 그리고 그 대열에는 월간 「우리詩」를 발간하는 「우리詩진흥회」도 동참하고 있다.
그래서 또한 우리詩의 ‘우리’를 생각한다. 사실이지 이보다 더 진부한 말이 없을 것처럼 와 닿는 ‘우리’라는 말,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이런 말들은 통속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기도 하다. 따져보면 ‘우리’라는 말이 발현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합성어 「우리詩」만 놓고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시’ 또는 ‘우리만의 시’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시’ 등등 꽤 여럿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획일적이란 의미가 아닌, 함께 한다는 의미로 선택한 ‘우리’에는 ‘나’ ‘너’ ‘그’가 존재한다. 또한 ‘우리’ 밖에도 ‘너희들’과 ‘그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나’에게 ‘너’가 되지 못하고 ‘그’인가? 그리고 ‘우리’안에 ‘그’로 지칭되는 그들은 얼마나 존재하고 있는가?
사막에서 만난 비행사와 어린왕자가 서로를 불러주었을 때 서로에게 특별한 ‘너’가 되고 ‘너’로 인해 ‘나’의 존재가 뚜렷해지는 것처럼 ‘김춘수’의 시 「꽃」역시 그러하다. ‘김춘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꽃을 제재로 존재론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평가받는 「꽃」은, ‘그’에서 ‘너’로 바뀌는 관계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은, 많은 사람과 사물들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그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너’가 되는 것이리라.
또한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나 비행사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해도 실존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존재를 자각하고 인식하게 된 그때부터 실존은 자신에 의해 비로소 증명되는 셈이다.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부재나 다름없을 터, 이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시공간에 ‘나’를 느낀다면 나는 이제 막 그곳에 정신적으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며, 이미 존재하고 있던 모든 이들은 ‘나’가 아닌 ‘그’가 된다. 그리고 많은 ‘그’들 중에서 내가 불러준 ‘그’는 바로 ‘나’와 특별한 관계의 ‘너’가 될 것이다.
* ‘뉴턴’과 ‘사르트르’에 시비걸기
‘나’ ‘너’ ‘그’의 총체인 ‘우리’의 의미를 잘 보존해온 시인들이 있다. 「우리詩會」의 전신인 「牛耳詩會」초창기 멤버였던 3인(이생진, 임보, 홍해리)이 그 주인공들이다. 우이시회는 1987년 5인(이생진, 채희문, 홍해리, 신갑선, 임보)이 창간한 동인모임 「우이동시인들」이 모체이다. 그 후 구성원이 많이 늘었지만 1999년에 동인지 25집까지 간행하고 우이시회의 원활한 발전을 위해 잠정적으로 중단했는데, 초창기 멤버는 현재 3인이 남았다.
많은 구성원들 중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위 주인공들의 우정에 주목한다. 셋이면 산술적으로 ‘우리’ 안에 ‘나’ ‘너’ ‘그’가 모두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셋 이상이면 이론상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합이 어렵다고 한다. 3의 숫자를 어떤 이는 나아가는 수레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성립은 양쪽바퀴가 받는 하중과 수레를 끄는 인력 강도의 균형이 잘 맞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의 조화는 강산이 2번 이상 변하도록 이어져 왔으니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뉴턴(Isaac Newton)’에 통달하지 않았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천체의 많은 유성이 한 치 오차 없이 절묘하게 제 위치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에 의해서겠지만, 3인이 통달한 인력(引力) 그리고 중력의 법칙은 무엇이 핵심이었을까?
완전무결할 것 같은 천체에서도 가끔 낙오가 발생한다. 수많은 별똥별이 그 증거이다. 안드로메다라는 은하계와 지구가 속한 은하계가 20억~30억년 후에는 충돌해 하나가 된다고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밤하늘의 별자리들이 약간 달라지고 초거대 은하가 새로 탄생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BBC 뉴스가 있었다. 강자의 논리에 의한 흡성(吸星)이기는 하나 지구가 속한 은하계의 소멸이 예상되는 것이 아니라 합체된 공존이 예상되는 것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는 우주의 조화에도 이합집산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3인의 조화는 평생을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런 추진력과 중력의 조화는 균형력에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의 위치에서 ‘나’외에는 ‘그’ 없이 모두 ‘너’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론상으로는 ‘우리’ 안에 ‘그’가 존재하지만 현실적 소통에서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키워드였을지 모른다. 20여년 이상 우정을 지탱해온 힘은 이것만으로 설명되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존재의 지속에 중요한 요소였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시회」 회원들 상호간에는 또 어떤가? 같은 모임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기준으로 ‘너’가 많은가, 아니면 ‘그’가 많은가? 필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가 많으므로 이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발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며 궁색한 변명이나마 해둔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범위를 넓혀 우리시회 구성원 외의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우리시회가 추구하는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려는 마음을 실천하고 있는가? 특히 우리시회 밖의, 시를 쓰는 ‘그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있는가? 우리시회 구성원들에게는 이미 구성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므로 상대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그’를 ‘너’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시회 구성원이 아닌 주변에게는 좀 다르게 다가가고 또한 불러야 되지 않을까?
여기서 다양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는 서두에서의 언급처럼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별도 있다는 것, 평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도 있다는 것, 순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행도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구토」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내용을 생각하며 붙인 제목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제목이 ‘삼킴’이 아닌 ‘구토’라는 것은 다양성의 지평을 넓혔음이다.
이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를 던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후세인들은 그 논제를 통해 또 다양한 사유(思惟)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논제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 다양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실존이 우선하든 본질이 우선하든 둘의 조화가 우선하든, 어느 경우이든 나름의 의미는 있다. 때문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외면하거나 묶어 둘 필요는 없다. 또한 본질을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가두거나 실존을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가둘 필요도 없다.
* 「牛耳詩」의 아름다운 「우리詩」化를 위하여
위에서 살펴 본 ‘사르트르’의 「구토」는 철학소설이다. 소설에 다양한 유형이 있듯이 문학·예술의 모든 장르가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카뮈(Albert Camus)’의 수필 「시시포스의 신화」는 ‘반항’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가?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러 올리는 것을 반복하는, 즉 무의미한 일에서도 ‘반항’이라는 행위로 존재 의미를 짚어낸 ‘카뮈’의 사유는, 사유에도 다양한 시각이 있음을 뚜렷이 대변하다.
사실 반항은 우리사회 곳곳에 있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은 불만족이나 반항으로부터 촉발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삐딱한 사유라 해서 무조건 박대할 일만은 아니다.
‘나’와 다른 시각을 인정한다는 것, 이는 ‘나’ 외의 ‘너’와 ‘그’에 대한 관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양성을 외면하는 폐쇄적 성향을 가진 계층이 문단에도 존재한다. 다원화되어가는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작하는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유는 경직된 사유에서 얻는 결과로서 창작물이란 그다지 기대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한 조화로움과도 배치된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통해 다양성의 조화는 확보된다. 다수의 논리라 해서 소수를 배척하거나 우월적 의식에 의한 소수의 시각으로 다수를 배제한다면 조화로움은 기대할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도 다문화가정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편협하고 그릇된 아집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스타일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할 수 있는 기대란 한계가 있다. 그들의 특징은 명목상이나마 철폐된 지 오래된 반상(班常)의 구분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듯, 우월적 위치에 스스로를 두고 있음이다.
뿐만 아니다. 작품으로 사회의 불합리를 비판하는 문학·예술인들이 배타적 패거리를 만드는 등의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향마저도 다양성이란 말로 포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이런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월간 ‘우리詩’만이라도 무엇인가 달랐으면 한다.
‘나’의 것만이 아니라 ‘너’ 또는 ‘그’의 것도 선이 될 수 있다. 요지는 시의 유형을 말함이다. 우리시단에 서정시가 풍부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정시만 우리사회에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해체시를 권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지만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것에도 공감할 수 없다. 실험시를 포함한 다른 유형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추구하는 방향과 유형이 다른 작가들에게 한 자리 숫자 이하(%)의 지면을 할애한다고 그 문예지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면을 통해 느끼는 월간 ‘우리詩’는 다행히 ‘우리’ 밖의 ‘그들’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시」의 ‘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때문에라도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는 물론 작품 유형의 다양성에 대한 폭 넓은 관심을 말함이다. 그리고 ‘우리’ 외의 ‘그들’을 불러 ‘너희’로 위치 변화를 꾀하는 일에 월간 「우리시」만이라도 게으르지 말았으면 한다.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그’를 불러 ‘너’로 변화시키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처럼 서로의 정신적 유대를 통해 삶의 의미를 함께 살폈으면 한다. 그 매개체는 물론 시이다. 그것으로 얻게 되는 발전의 주체 또한 시이다. 「牛耳詩」가 「우리詩」로 되기까지를 ‘우리’의 성립단계로 본다면 이제 화합·성장·발전 단계로서의 ‘우리’를 생각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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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인간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와 관심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시회>의 전신이었던 <우이시회>는 많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졌고 그 모체가 되었던 <우이동시인들>이라는 동인회가 있었는데 1987년 창간 당시 이생진, 채희문, 홍해리, 신갑선, 임보 등 5인이었습니다. 신갑선 시인은 초창기에 탈퇴하고 나머지 4인들이 1999년까지 동인지 25집까지 간행했지요. 그러다가 <우이시회>의 원활한 발전을 위해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선생님,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우리시회의 역사를 왜곡하려 했으니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한 부분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것을 복사·스크랩 금지를 했는데, 나중에 원고로 활용된다면 그때 복사·스크랩 금지를 풀겠습니다.
와, 오늘은 너무 오래 있었더니 정말 귀에서 이명이 들렸습니다. 이만 퇴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