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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인물 표현엔 가면이 딱 가로 23m 그림 직접 그렸죠”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연출 아힘 프라이어 씨
“수궁가의 무대는 기존 무대미술이라는 개념을 뛰어넘는다. 예술가 아힘 프라이어가 빚어낸 설치 미술, 설치 예술이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무대다.”(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직접 만든 가면을 들어보이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게 주인공 토끼 가면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커튼 대신 사용하는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가림막 두 개와 가로 23m, 세로 1.2m 크기의 무대 뒤 배경판의 그림도 프라이어 씨가 직접 그렸다. 가림막의 그림은 고전 판소리에서 수묵화나 서예화의 병풍 속 산수화(山水畵)를 흑백의 어지러운 선으로 표현했다. 배경판은 검은 바탕에 물결 모양의 흰색 선을 그려 넣어 바다를 나타냈다.
유 예술감독은 “예전에 프라이어 씨가 연출한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보면서 무대와 의상, 조명 모두 하나가 된 작품의 완결성에 감탄했다. 이번 무대에서도 그런 완결성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2만∼10만 원. 02-2280-4115, 6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출처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3/all/20110901/399707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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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인생 54년,
판소리 명창 안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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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저고리에 보라색 치마, 단정히 쪽 진 머리에 가지런히 꽂은 비녀. 안숙선은 무대가 아닌 스튜디오가 어색한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안숙선은 한국이 사랑하는 국악인이자 세계적으로 국악을 알리는 한국문화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국악만을 위해 걸어온 인생과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준 불교에 대해 들어본다.
△ 무대위에서는 국악계의 강마에이지만 평상 시 안숙선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다. |
안숙선 명창의 별명은 다양하다. 어릴 적에는 '아기명창'으로 불렸고 창극을 시작하고 나서는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혹은 '창극의 명인'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많은 별명이 있지만 안숙선 본인이 듣고 싶은 별명은 '연습벌레'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많은 연습량으로 유명하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을 30대 초반에는 제가 막내였어요. 그때는 많은 선배들과 선생님, 동료들이 있어서 연습을 안 하고는 거기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 정도에 퇴근을 하는데 식사 시간을 빼고 거의 매일 10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어요. 요즘은 젊었을 때처럼 연습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요. 체력도 많이 힘들고... 그게 좀 슬프네요."
판소리의 고장 남원의 국악 명가(名家)에서 태어난 안숙선은 이모로부터 가야금을 처음 배웠다.
그 때는 어린 나이에 또래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 것을 왜 나만 혼자 배워야 하는지가 불만이었단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형문화재에게 레슨비 하나 내지 않고 과외를 받은 셈이니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모에게 배우는 가야금 뿐만 아니라 남원 국악원에서 소리와 악기, 춤을 배우면서 학생 명창대회를 휩쓸었다.
안숙선은 국악계의 큰 별, 두 명을 스승으로 모셨다. 판소리 명창 김소희 선생과 가야금 병창 명인 박귀희 선생. 김소희는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한국 국악계의 거목으로 불린다. 김소희는 가야금 병창 박귀희와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의 양성에 힘 썼고 수 많은 제자들이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안숙선은 그 많은 제자 중에서 김소희의 소리를 가장 잘 물려받은 명창으로 평가 받고 있다.
△ 딸은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는 안숙선. 그렇지만 둘째딸이 아버지의 권유로 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대를 이른 국악집안이 되었다. 그의 둘째딸은 거문고 연주자 최영훈이다. |
"김소희 선생님은 국악계의 선구자시죠. 대중에게 국악을 알리는데 큰 공을 하셨어요. 선생님의 판소리는 딱 이렇게 표현하면 맞을 것 같아요. 옥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
박귀희 선생님은 저를 가야금 병창으로 만들어 준 분이세요.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남 앞에 서는 사람은 공인이다. 공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생각을 해야 한다. 공인임을 항상 잊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 하셨어요."
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판소리 완창발표회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완창발표회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목표가 없으면 연습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해마다 목표를 가지고 완창발표회를 준비했다.
판소리 완창은 3시간에서 최대 8시간 정도까지 소요된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견뎌내기 힘들뿐더러 그 많은 내용을 다 외워서 부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저도 사람인지라 종종 실수를 하죠.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예전, 부안 공연 중 흥보가를 부르다가 저도 모르게 심청가를 한 적이 있었어요. 결국은 소리를 중단하고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다시 흥보가로 돌아가 완창을 마친 적도 있죠.
판소리는 몸이 악기이다 보니 몸 관리가 제일 중요하죠. 공연 며칠 전부터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무대에 오를 때 회상의 컨디션이 될 수 있도록 조절해요. 그리고 공연 이외에 일상적인 일 들은 다 모르쇠로 일관해요. 머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국악 빼고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는 안숙선 명창.
"국악도 많이 발전했죠. 여건이 많이 좋아졌어요. 각 대학에서 엄청나게 국악인을 배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중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들은 적죠. 저의 바람은 그 많은 인재들이 자기의 기량을 다 발휘 할 수 있도록, 대중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예요.
7~80년대의 고민은 우리의 음악을, 전통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까 였다면 90대 이후의 고민은 어떻게 대중 속에 파고들까 입니다. 그래서 양악과의 협연, 다른 음악과의 교류, 작업을 열심히 했어요. 그렇지만 원래 우리 음악의 색깔, 우리의 정신은 동화되지 말아야겠죠. 제자들에게 그 점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국악은 들어본 적 없었는데 오늘 들으니 너무 좋다"는 한 교향악단 연주자의 충격을 받아 국악의 대중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지금도 국악의 대중화, 나아가 세계화를 위해 쉬지 않고 공연하고 있다. 사진출처 : 안숙선 공식홈페이지 |
안숙선은 원래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석가모니 일대기를 판소리로 듣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믿게 되었고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섯 명의 손녀를 둔 할머니인 안숙선은 손녀 이야기에 금새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집에서 여섯 손녀들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바로 여자 삶의 행복인가 싶기도 하여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는 안숙선. 그녀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능력은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크게 욕심 부리는 것 같아요. 행복의 척도를 크게 잡지 말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목표로 세상을 즐겁게 살면 그게 행복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걸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될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기회가 되면 하는 것이고, 아니어도 후배들은 양성할 수 있으니 명칭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만능인이 인정받는 요즘 시대. 자신의 목표가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할 수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한마디가 되었으면 한다.
기사입력 2011-04-21 오후 2:51:00 / 기사수정 2011-04-25 오후 7:32:46 BTN 이진경
출처 BTN http://www.btnnews.kr/news/view.asp?idx=15857&msection=7&ssection=21&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