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은 신라한테 배워야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올해는 광복 70 주년에, 6.25 발발 65 년째 되는 해. 통일, 국방, 외교, 안보 등의 말들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다. 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가 온통 난리지만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문제는 잠시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면 남북통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나름대로 다각도로 통일방안을 제시해 왔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저들대로 고려연방제 등을 들고 나왔지만 아직도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요원한 것 같아 그저 답답할 뿐이다.
오늘이 닫히고, 내일이 막혀 있을 때는 어제의 일, 역사에서 해답을 구해야 한다. 700 년도 더 끌어온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기어이 통일을 일궈낸 신라에게서 통일의 지혜를 한 수 배워보면 어떨까?
흔히들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폄하한다. 우선 ‘외세에 의존한 통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당시의 신라에게는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이고 고구려, 백제도 모두 외국세력인 외세였던 것이다. 굳이 당나라만 외세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신라가 大耶城(대야성 : 지금의 경남 합천군) 등 40 여개의 성을 백제에게 빼앗겨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비록 실패는 했지만, 먼저 고구려와 연합해서 백제를 치기 위해 金春秋(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낸 건 역사를 통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신라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일본에게도 손을 내밀었지만, 일본으로서는 문명 傳授國(전수국)인 백제와의 의리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 이마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와 신라, 일본을 종으로 연결해서 백제에 대항하고자 했던 신라의 合縱策(합종책 :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6국이 종으로 연합한 외교정책)은 빛을 보지 못한다.
신라는 할 수 없이 바다 건너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중국을 겨우 통일한 당나라로서는 배후세력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쉽게 동맹을 맺는다. 말하자면 신라는 합종책은 실패하고 당나라와 횡으로 엮는 連橫策(연횡책 : 진나라가 6국과 횡으로 동맹을 맺은 끝에 6국을 하나씩 격파한 외교정책)은 성공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신라는 외세인 당나라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합종연횡책의 하나로 당나라를 이용했을 뿐이다.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蘇秦(소진)의 합종책은 실패하고 결국 張儀(장의)의 연횡책이 성공을 거두어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원해 줬을 뿐인 당나라가 백제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와 고구려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그리고 신라에 마저 鷄林大都督府(계림대도독부) - 신라는 대접해 준다고 대자를 한 자 더 붙였지만 -를 설치, 세 나라를 다 식민지화 하려 했다.
이에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9 년간에 걸친 對唐戰爭(대당전쟁)을 벌여 당나라를 한반도로부터 완전히 몰아낸 뒤에야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신라가 외세에 의존했다는 부정적 평가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완전 통일’이라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하하는 말 뒤에는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지방을 놓친데 대한 아쉬움이 담겨져 있으리라. 신라로서는 660 년에 백제를 정복하고서부터 668 년 고구려마저 무너뜨릴 때까지 9년 동안 -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을 테니까 그 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겠지만 - 온 국력을 쏟아 부은 뒤에, 다시 9년간에 걸쳐 당나라와 싸우느라 만주지방에 대해서는 손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지 않고 만주지방인 國內城(국내성)에 그대로 뒀더라면 -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 신라가 고구려 영토의 전부는 아니지만 만주의 일부는 차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포함하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만족해야 했다.
신라는 대외적으로 합종연횡의 외교정책을 잘 선택했지만 대내적으로도 미리부터 통일의 준비를 착착 서둘렀다.
먼저 화랑제도의 확립이다. 圓光法師(원광법사)가 정리한 世俗五戒(세속오계)는 尙武精神(상무정신)과 進取的 氣象(진취적 기상)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의 三綱五倫(삼강오륜)은 父子有親(부자유친)과 君臣有義(군신유의)로 시작해, 국가에 대한 忠(충)보다는 어버이에 대한 孝(효)를 앞세우고 있다. 그래서 親喪(친상)을 당하면 3 년 동안이나 벼슬을 그만두고 상을 치러야 했으며, 서울 진격을 앞둔 韓末(한말)의 의병대장은 지휘봉을 내려놓고 상을 치르러 낙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반면 신라의 세속오계는 순서가 事君以忠(사군이충)과 事親以孝(사친이효)로 돼 있는 걸 보면 충을 효보다, 국가를 가정보다 우위에 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다 신라는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무장했으니 그들의 기백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뿐만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는 道敎(도교)와 미륵신앙으로 변질돼 가는 동안 신라의 불교는 護國佛敎(호국불교)로 발전해 갔다. 전쟁 중에도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四天王寺(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義湘大師(의상대사)는 중국 華嚴宗(화엄종)의 제 3대 祖師(조사) 자리를 마다하고 귀국해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元曉大師(원효대사)와 함께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정신세계는 호국불교가, 현실세계에서는 세속오계가 신라를 하나로 뭉쳤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던, 삼국 중에서 가장 늦둥이요, 약소국인 신라가 階伯(계백)이 버티던 백제와 저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마저 꺾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삼국 중에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고서도 호국불교로 발전시킨 점, 화랑제도를 정비한 점, 신라의 진골 김 춘추와 가야의 후예인 金庾信(김 유신)이 처남남매간으로 人脈(인맥)을 형성한 점, 합종연횡의 외교정책을 잘 쓴 점 등으로 인해 신라의 삼국통일은 가능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방식을 오늘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원조 격인 전국시대의 합종연횡책은 물론 신라의 합종연횡책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다만 합종연횡은 종으로 연합하느냐, 횡으로 동맹을 맺느냐 하는 문제였지만 오늘 우리의 입장은 해양세력인 南方勢力(남방세력)으로 남느냐, 대륙세력인 北方勢力(북방세력)으로 남느냐 하는 문제만 다를 뿐이다.
지금 우리의 처지는 어떤가? 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남방세력 편에 서게 되고, 북한은 북방세력권에 편입된 꼴이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의 구성도 남 북방세력의 대결장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의 외교는 남방세력의 맹주요 우리의 혈맹인 미국을 기본 축으로 하고, 지금은 과거사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껄끄러운 관계인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신라의 김 춘추는 오늘의 적인 백제를 치기 위해 어제의 적인 고구려로 단신 달려가지 않았던가? 외교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원칙만 내세워 양국 관계를 계속 어렵게 만들기 보다는 일본과는 현안문제를 분리하는 투 트랙, 그랜드 바겐 전략을 쓰는 등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핵문제, 천안 함 폭침사건 등에서는 대화가 막혀 있지만 5.24 조치 해제나 경제적, 인도적 문제에는 신축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로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원리원칙에 매달려 현안문제를 해결 못하는 등 한일관계와 북한문제가 너무 경색돼 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무난한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가 너무 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양새가 문제라면 문제다. 중국과는 의연하게 대등한 외교를 펼쳐야 한다. 21 세기 大韓民國(대한민국)의 국력과 국제사회에서의 비중은 100 년 전의 大韓帝國(대한제국)과는 천양지차이다. 한중관계를 돈독하게 한다고 한미관계의 틈을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미국으로 하여금 한중 유착을 경계해 북방세력에 대한 방어선을 우리를 제외한 체 일본- 대만-필리핀 등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결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바야흐로 미국, 일본, 영국 등 남방세력과 중국, 러시아 등 북방세력의 대결로 세계의 판도가 바뀌어 가고 있다. 이념과 종교문제가 아닌 지역대결 양상이다. 이런 때 일수록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의 두 주역 김 춘추와 김 유신이 그리워지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오늘의 답답함을, 어제의 지혜를 빌려, 내일에 대비해야 겠다.
단기 4348년 6월 14일, 대구에서 抱民 徐 昌植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