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자기 앎(self-knowing, 자기가 존재한다고 아는 것)이 생기면서 “천국”을 잃은 것을 표현하는 우화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전체(wholeness, 천국)가 있고 그 한계 없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이유 없는 에너지 안에서 자기 자신을 그 완전한 전체(천국)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알고 있는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 같다.
이것이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자기의식으로부터 알아차림(awareness, 인식), 자유의지/선택/시간과 공간/목적과 방향에 대한 앎과 경험이 외관상으로 생긴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면서 외관상의 자아는 “저기 바깥의 세계”를 아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가능한 최고의 스토리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자아는 기쁨을 찾고 고통을 피하려고 외관상으로 행동을 한다. 지식이 커져갈수록 행위, 결과와 외관상의 개인적인 통제의 느낌이 더욱 더 실질적이 된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다양한 결과를 낳는데, 그리하여 개인은 만족감과 실망감의 불안정한 상태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자아에게 더욱더 많이 탐구하고 알도록 몰아붙이는 바탕에 깔린 불만족의 느낌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것이 알아차려질 수 있다.
외관상의 자아는 개인적인 경험, 앎 또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 자기 알아차림)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좀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스스로 알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제한될 것이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구도자들이 알게 될 수 있는 수많은 교리, 치료요법, 이데올로기, 영적 가르침과 신념 체계가 존재한다. 또한 침묵, 고요, 지복, 알아차림과 초연함의 상태에 대한 앎과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밤과 낮처럼 오고 가는 것 같다.
이 모든 가르침, 권고와 처방은 구도자에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답과 결코 잃은 적이 없는 것을 찾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아는 자기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추구하는 분리된 구도자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부재는 제외한다. 그 부재는 알 수 없는 텅 빔이다. 그러나 그 부재는 또한 역설적이게도 갈망되는 바로 그 꽉 참, 완전한 전체(천국)이다.
분리의 진정한 본질을 아주 깊이 있게 밝히고, 또한 타협 없이(방편을 쓰지 않고) 추구행위가 완전히 헛되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의사소통을 외관상의 구도자가 접하게 된다면 분리된 자아의 구조물의 붕괴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전적으로 비개인적인 메시지는 또한 자아의 외관상으로 수축된(수축되어 보일뿐 전체가 아닌 적은 없다) 에너지가 풀리는 무한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자기의식을 초월한 공명이 일어날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질 수 있다. 모름(unknowing)의 경이로움에 대한 향기와 서막이 열릴 수 있다.
불현듯 이것은 이미 전체라는 변화와 비개인적인, 개인과는 상관없는 깨달음이 있는 것 같다. 무한하고, 자연그대로의, 순수하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경이로운 있음(beingness)의 단순함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평범함 속에 존재하는 경이로움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험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고, 알려질 수 없다.
출처 : "This Freedom", Tony Pa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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