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윤 정현 그레고리(대전교구 사제)
지난 호에서는 신앙적인 면에서 보수적이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진보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혁신적인 실천가인 프레데릭 모리스를 소개하였다. 신학적인 면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의 신학사상을 오늘날에 적용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고 앞서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는 시대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이고 사회참여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윌리암 윌버포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읽고 방황하는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복음의 정신을 재해석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재조명해볼 볼 수 좋은 그리스도인의 신앙모델이다. 성공회 복음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이며 노예무역 철폐운동의 지도자로서 ‘에메이징 그레이스’ 영화로도 소개된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 주로 참고한 책들은 Wikipedia Encyclopedia, Love’s Redeeming Work: The Anglican Quest for Holiness (Oxford, 2003), A Book of English Belief: Bede to Temple(SCM Press, 1991)등이다. 관심을 가지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 참고문헌을 참고하기 바란다.
유년시절과 교육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8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동부지역에 있는 헐의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 아버지 로버트 윌버포스(Robert Wilberforce, 1728?1768)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버드(Elizabeth Bird, 1730?1798)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윌리엄(1690?1774)은 발트 해의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거부가 된 다음 헐 시장으로 두 번 선출되기도 하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체구가 작고 여린 기질이었으며, 잔병치레가 많고 시력이 좋지 않았으나 ‘부잣집 도령’인 덕분에 자라나면서 별다른 고생은 겪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런던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부유한 그리스도인 상인이며 자선사업가인 존 톤튼(John Thornton)의 누이인 큰 어머니 안나의 영향으로 윌리암은 성공회 복음주의 신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윌버포스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복음주의 신앙에 물들까 겁낸 나머지 큰아버지 집에서 다시 데려오고, 복음주의 신앙인들과 교류하면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윌버포스는 1776년 그의 나이 17세에 캐임브리지 대학교의 성 요한 칼리지에 들어갔다. 1774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1777년에는 큰 아버지가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결과로 윌버포스는 공부하는 것보다는 학생들과 노는데 어울렸고 결국 술과 도박, 유흥에 빠졌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그에게 장차 영국 역대 최연소 수상이 될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759~1806)를 비롯한 인재들을 사귈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씀씀이가 헤프고 방탕한 편이었지만 비열하거나 잔인하지는 않았고,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말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여들었다.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그는 졸업시험에 합격하여 1781년에는 학사 학위를 그리고 1788년에는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 졸업 무렵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정치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활동 정치에 관심이 많은 윌리암 피트는 윌버포스에게 함께 정치할 것을 권유하였다. 윌버포스는 1780년 9월 21살의 대학생 신분으로 헐(Hull) 시의 킹스턴 지역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당시의 관행이었지만 8,000 파운드가 들어가는 금권선거였다. 돈 걱정이 없는 윌버포스는 당선된 후에도 흥청대는 생활을 했다. 그의 친구 피트는 그보다 한 해 늦게 하원의원이 되었다. 피트는 그 이듬해재무장관이 되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영국 역사상 최연소의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일찌감치 든든한 정치적인 ‘배경’이 생긴데다 윌버포스 자신도 천부적인 웅변 실력으로 정가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윌버포스는 무소속 정당인으로서 토리당과 휘그당 정부 모두를 지지하였다. 권력이 있는 당과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보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투표를 했기에 정치적 정견이 없는 사람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781년에서 1784년 사이 집권당이 자주 바뀌는 상황에서 윌버포스는 의회에서 친구인 피트를 지지하였다. 1783년 가을에는 피트, 윌버포스 그리고 에드워즈 엘리옷은 함께 6주 동안 프랑스로 여행을 갔다. 그들의 프랑스 출현은 프랑스 레임(Rheims)지역에서 영국 스파이로 의심을 받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파리를 방문하여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라파에 장군(General Lafayette), 마리 안토니에(Marie Antoinette) 그리고 루이 14세(Louis XVI)를 만났고 퐁테불루의 프랑스 법정에도 참석하기도 하였다. 피트는 1783년에 소수당의 윌버포스의 지지에 힘입어 수상에 올랐다. 윌버포스와 피트가 가까운 친구 사이임에도 피트가 윌버포스를 장관 자리를 제의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이유는 윌버포스가 무소속 정치인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이유는 당시에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만성적인 시력 문제뿐만 아니라 정당 조직을 갖추지 않고 마지 못해 정치에 참여하는 윌버포스의 태도는 피트로 하여금 윌버포스가 장관직을 원해서 자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이기에 신뢰한 것으로 확신한 지도 모른다. 1784년 봄 의회가 해산되었을 때, 1784년 총선에서 윌버포스는 지역을 바꿔 요크셔 지방의 의원 후보로 나셨고, 24세의 나이로 요크셔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회심과 사회활동 윌버포스 영적 신앙 여정은 일찍이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신앙잡기를 소지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앞으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잘못된 삶을 반성하고 회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그의 습관의 변화였지 본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유쾌하고 흥미진지하고 존경 받기를 좋아하는 외형적인 성격은 그대로 남아 있어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곤 하였다. 내면적으로 윌버포스는 고뇌 가운데 지냈으며 가혹하리만큼 자기 비판적이었다. 자기 절제와 다른 사람과의 인간 관계에 있어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였다고 자신의 영적 삶을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종교적 열정주의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행위이며 정치 사회에서는 낙인이 찍히는 일이었다. 리차드 힐 경(Sir Richard Hill), 쉬롭셔 지방의 메소디스트 의원(the Methodist MP for Shropshire), 셀리나 해스팅스(Selina Hastings), 헝팅돈의 백작부인(Countess of Huntingdon) 같은 상류층의 복음주의자들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윌버포스의 회심은 그가 의원으로서 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윌버포스는 흥청대고 거드름 피는 상류층 전용 클럽에서 탈퇴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도박과 극장 가는 것을 끊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일기를 쓰는 생활 습관을 가졌다. 당시 복음주의자는 정치 경력에 해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정치를 그만두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설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면서 수상이던 피트와 존 뉴톤 사제가 만류하였다. 윌버포스는 런던의 성 마리아 울노스 교회(St Mary Woolnoth)의 관할사제이며, 성공회 복음주의 성직자를 이끄는 존 뉴톤(John Newton) 신부의 지도에 따랐다. 뉴톤 사제와 피트 수상은 윌버포스에게 정치인으로 남도록 충고하였고, 윌버포스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복음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존 뉴톤 사제는 충고하였다. 이후로 윌버포스의 정치적 견해는 공사를 막론하여 신앙심과 그리스도교 정신과 윤리를 증진시키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신앙적인 관점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정치와 사회 질서의 급진적인 변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주일 성수를 강조하였고, 교육과 개혁을 통하여 비도덕적 행위를 고쳐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윌버포스는 그의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았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을 급진주의자로 보는 많은 토리당원들로부터는 교회와 정부를 타도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보았으나 윌버포스는 개의치 않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 그는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지키고 다른 이의 모범이 되며, 나아가 사회를 정화하는 일에 앞장서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윌버포스는 정치를 통해 그런 과업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 과업 중의 하나가 바로 노예제 폐지였다. 이리하여 영국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던 윌버포스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노예 무역제도 폐지 16세기 영국은 노예무역을 하고 있었다. 1783년경에는 영국에서 생산한 물건을 아프리카에 팔고, 그곳에서 노예를 사서 서인도 제도에 팔았다. 그리고 노예노동으로 생산된 사탕수수, 담대, 면화 제품을 영국에 가져왔다. 당시 해외로부터 들어온 수입의 80%를 차지 하는 막대한 수익을 남기는 일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식민지에 노예무역을 하는데 영국 상선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절정기에는 한 해에 어린이, 여성, 장정을 포함한 4만명의 노예를 실어 날랐다. 모두 1,100만명을 노예로 잡아 운송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 140만명은 운송 중에 바다에 수장되었다. 당시 영국의 주요 항구 도시들은 노예무역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연간 수천 명의 선원 일자리와 수백 척의 선박 건조 및 유지 관리하는데, 많은 일자리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영국 경제 성장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노예무역상과 농장주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직접 하원의원 자리를 얻거나 하원의원을 매수하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말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었다. 영국에서 노예무력 폐지는 부르짖기 시작한 것은 퀘이커교도들이 반노예위원회를 설치한 17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1783년에는 처음으로 노예무역 철폐를 위한 청원서를 내고 의회에서 설명회를 가졌다. 그 해 윌버포스는 캐임브리지대학교 친구인 제널드 에드워드(Gerard Edwards)와 식사를 하면서 성 크리스토퍼 섬의 성직자가 된 식민지의 의료 담당자이자 선원 외과의사인 재임스 람지(James Ramsay) 사제를 만났다. 램지 사제로부터 바다와 식민지에서 노예들이 당하는 비참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윌버포스는 충격을 받고 괴로워했다. 식민지 사역지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램지 사제는 찰스 미들톤, 토마스 크락슨, 한나 모어와 노예무역 폐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영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그리스도교 정신 함양과 도덕의 회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노예무역자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삶과 노예들의 학대, 그리고 그들의 비참한 현실에 관한 생생한 보고를 듣고 몸서리쳤다. 이들의 후원과 지지에 힘입어 램지 사제는 3년동안 서인도 제도의 영국식민지 사탕수수 재배지에서의 노예들의 학대에 관한 비판적인 논문을 썼고, 1784년에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대중들에게 노예무역의 실상을 널리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읽은 사람들은 노예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누가 보아도 노예무역은 더러운 장사였다.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한 노예들은 좁은 선실에 짐짝처럼 던져져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쇠사슬에 묶여 대서양을 횡단해야 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난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경매에 붙여지고, 주인이 정해지면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훈련’이라는 이름의 매질과 성폭행, 그리고 가혹행위 속에서 노예의 30%가 희생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살아야 했다. 윌버포스는 램지 등의 활동에는 별로 호응하지 않았으나, 회심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786년 11월에 찰스 미들턴 경의 편지를 받고 윌버포스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미들톤 여사(Lady Middleton)의 요청에 의해 남편 찰스 경은 윌버포스에게 의회에 노예무역 폐지안을 내도록 제안을 하였다. 1787년 5월 12일 친구인 윌리엄 피트 수상은 노예무역 폐지 입법에 망설이고 있는 윌버포스를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켄트지방에 있는 피트 수상의 소유의 농장 참나무(이 나무는 후에 윌버포스 참나무라 불러짐) 아래서 윌버포스, 피트 수상, 그리고 윌리암 그렌빌(William Grenville, 나중에 수상에 됨)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피트는 윌버포스를 설득했다. “윌버포스, 왜 노예무역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오랫동안 당신은 노예무역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해결하려고 많은 수고를 했었다. 계속 활동하고 폐지안을 추진하면 당신에 대한 믿음이 쌓일 것이고 사람들은 당신을 신뢰할 것이다. 시간을 놓치지 말게,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넘기지 말게나” 윌버포스가 무어라고 응답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윌버포스가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된 그 언덕 위의 참나무를 분명하게 그의 노년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 28일자 일기에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 앞에 노예무역의 금지와 도덕 의식의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내놓으셨다”고 썼다.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노예무역의 실상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정부 차원에서 인정된 온갖 참상을 근거로 1789년 5월 12일, 윌버포스는 의회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외쳤다. 윌버포스는 단지 의원들의 양심에 호소했다. “노예무역을 폐지하면 추가 공급이 중단되어 노예주들도 노예를 더 아끼고 보살필 것이다. 그러면 노예들도 열심히 일하여 생산량이 더 늘어날 것이다”는 명분으로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법안은 부결되었다. 더욱 증거를 모으고 법안을 다듬어서 1791년에 다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냈으나 부결되었다. 1792년에는 ‘즉각 폐지 대신 점진적 폐지를 지향’한다는 좀 완화된 의안으로 수정하여 의회를 통과하였으나 이듬해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이 법안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이후 1805년까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무려 11번이나 거부되었다. 윌버포스와 그 동지들에 대한 비난과 위협도 그치지 않았다. 윌버포스는 몇 차례인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어떠한 위협과 공격에도 굴하지 않았다. 거듭 거부되는 폐지안에 실망한 동료들을 격려하며 끈질기게 폐지 운동을 이어나갔다. ‘흑인들은 열등한 생물이며,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살아 있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1792년에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을 건설, 그곳에 이주해 있던 흑인 해방노예들이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도시를 마련하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폐지 운동을 벌이다 보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여론도 차차 노예무역 폐지라는 대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806년 선거에서는 노예무역 폐지가 선거의 주된 쟁점이 되기에 이르렀다. 윌버포스를 비롯한 노예무역 폐지를 들고 나온 많은 사람들이 의원이 되었다. 드디어 1807년 2월 23일 의회에서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통과되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교 정신과 사회활동 윌버포스는 주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선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기에 기록되었듯이 해이해진 시회기강과 도덕의 개혁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그리스도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참된 그리스도교 국가는 노예제도와 양립할 수 없고, 당시의 무절제한 풍속 역시 용납할 수 없다는 복음주의자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윌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책, 『영혼의 종교의 시작과 성장과정』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윌보포스는 도덕 해이와 잘못된 풍속을 개혁하여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도드리지 작품과 같은 글을 쓰고자 하였다. 1797년에 윌보포스는 『참된 그리스도교』: “참된 그리스도교에 비추어 본, 중상류층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체계에 대한 실천적 견해”를 내놓았다. 출판사로서는 판매 전망이 어둡다고 초판을 5백부만 찍었다. 그러나 그 해에만도 5쇄를 찍어내어 7,500부가 팔렸다. 그 이후 50년 동안 베스트셀러로 남으며 5개국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윌버포스는 책에서 “지금의 영국은 겉보기로만 그리스도교 국가지 진정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그리스도교 국가로 거듭날 것을 촉구했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머리로만 믿고, 마음으로 믿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과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태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세는 아니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 미사에 참석하고 고해성사를 한다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는 없다고 윌버포스는 주장하였다. “오직 믿음으로만” 참된 리스도인이 된다는 복음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 믿음 또한 뜨거운 열정과 성실한 실천으로 뒷받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사회를 위해 헌신하여야 그리스도교가 발전되고 그리스도교가 부흥해야 사회복지도 증진된다. 그리스도교와 사회복지는 서로 불가분인 것으로서 도덕성 회복과 국가의 중요한 발전 목표로 제시하되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정신의 선언이었다. 『참된 그리스도교』 책의 성공과 더불어 윌버포스는 여러 단체를 세우거나 단체에 가입하여 선교 활동에서 자선 활동, 도덕성 회복운동 등 40가지가 넘는 여러 시민단체 활동에 관여하였다. 윌버포스는 종교, 도덕, 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적 이상, 목적, 대의 명분을 위한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예를 들면, 악습억제회(the Society for the Suppression of Vice), 인도 영국선교회(British missionary work in India), 아프리카 시에라 레온에 자유 식민지 설치(the creation of a free colony in Sierra Leone: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 탈출한 노예들을 모아 자치하며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줌),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 Society)와 동물학대 방지회(the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 등등의 단체를 설립하여 시민사회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의 보수적인 정치성향에 의해 정치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일의 입법행위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나라 밖 노예문제 해결에 집중한 나머지 가정과 국내에서의 불의 문제에는 눈감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윌버포스는 18세기의 영국의 사회 부정 부패, 퇴폐적 분위기가 정화되고, 상류층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자리잡게 하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하층민의 과도한 음주나 도박에 따른 가정파괴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성서 읽기 운동, 주일학교 운동 등을 통한 계몽과 문맹 퇴치에도 앞장섰다. 그 결과 19세기로 넘어갈 즈음에는 영국은 보다 현대적이고 계층 갈등이 적은 사회, 법치주의와 공중도덕이 잘 지켜지는 사회로 바뀌고 있었다.
노년시절 1823년에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윌버포스는 노예제도를 범죄로 규정하며 노예해방을 역설하는 안내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이미 악화될 대로 되어 1825년에는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을 사퇴하고도 지속적으로 노예무역 폐지에서 노예제도의 완전 폐지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영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노예무역을 폐지하도록 국제적 운동을 벌였다. 드디어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의 시대의 민주적이고 이성적인 의식이 싹트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야만적인 행위가 버젓이 행해졌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인류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인간의 어두운 역사를 종식하는 결정이고, 새로운 역사의 선언이었다. 윌버포스는 병상에 누워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마음 속에서 사흘 뒤에 눈을 감았다. 1834년 8월 6세이하의 노예 자녀들은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러나 노예들은 4년에서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일해주며 견습을 받는 제도를 만들도록 하고 영국식민지 서인도제도, 남아프리카, 인도양 남서부의 모리티우스, 영국령 온두라스, 캐나다의 노예 소유주에게 2,000만 파운드를 보상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으로 아프리카인 노예 80만명이 해방되었다. 윌버포스는 런던 북쪽 스토크 뉴잉톤에 그의 누이와 딸이 잠든 곳에 묻힐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하원 양의회의 지도자들은 윌버포스가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는 영예가 주어지도록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1833년 8월 3일 유가족이 의회의 요청에 동의하여 윌버포스는 웨스트민스트 성당(Westminster Abbey)에 수상이었던 친구 윌리암 피트 곁에 묻혔다.
글을 마치면서 윌버포스 사후 5년 후에 아들 로버트와 사뮤엘에 의해 5권으로 된 윌버포스 전기집이 출간되었다. 이어서 1840년에는 서신모음집을 발간하였다. 전기 작가는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강조한 나머지 노예 폐지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토마스 클락손(Thomas Clarkson)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클락손은 전기 내용을 반박하고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윌버포스의 아들들은 개인적으로 클락손에게 사과를 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전기에서 빼어냈다. 그러나 한세기가 지나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있어 윌버포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클락손과 윌버포스의 관계를 아주 좋고 생산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이 둘은 역사의 위대한 동반자라고 기록하였다. 의회에서 주도한 윌버포스와 대중적인 조직과 연구로 운동을 확산시킨 클락손, 이 둘이 아니었더라면 노예제도 폐지는 성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역사가들은 주를 달아놓았다. 윌버포스의 아들들이 희망하고 계획하였기 때문에 윌버포스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영웅으로 그리고 복음정신을 실천한 위대한 성인과 같은 큰 인물로 알려졌다. 윌버포스는 그리스도인의 시대의 사회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재구성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도주의 개혁자로 더 폭넓게 묘사되고 있다. 1940년에 이르러 노예제도 폐지의 윌버포스과 클레팜 파의 역할이 역사가 윌리암스(Eric Williams)에 의해 경시되었다. 윌리암스는 노예제도 폐지가 인도주의에 의해 기인된 것이 아니라 설탕산업의 사양화라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이었다고 문제제기를 하였다. 윌리암스의 관점은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가들은 설탕산업은 지금까지도 큰 이익을 남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윌버포스와 복음주의자들의 역할, 그리고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인도주의적인 중요한 전형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윌버포스의 생애와 업적은 영국 전역 어디에서나 칭송되고 있다. 1940년 조각가 사무엘 조셥에 의해 조각된 윌버포스의 좌상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세워져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한 윌버포스의 수고와 그의 그리스도인 정신은 찬양되고 있다. 1834년 윌버포스가 태어난 헐 도시에서 공식적인 기부를 받아 31m의 크기의 그리스 도리아 양식의 기둥 위에 윌버포스 상을 헐 대학 인근의 퀸스가든에 세웠다. 1833년 요크에 윌버포스 기념 맹인학교 세워졌다. 1903년 도시 협동조합이 윌버포스의 생가를 구입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영국의 첫 노예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6년에는 헐대학교에서 윌버포스 생가 안에 윌버포스 노예해방 연구원을 설립하였다. 2007년 9월이후로 윌버포스를 기념하여 헐 시 중심부에서 자유축제로 알려진 예술, 음악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성공회 공동체의 다양한 교회에서 전례력에 의해 윌버포스를 기념하고 있다. 1856년 미국 오하이오에 세운 윌버포스 대학교는 윌버포스 이름을 따서 대학명을 지었다. 이 대학은 처음으로 아프리카-아메리칸이 소유한 대학으로 역사적인 흑인 대학이 되었다. 카나다 온타리오에 윌버포스 식민지는 흑인 개혁자와 미국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된 거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노예무역 폐지의 투쟁과 윌버포스에 관한 영화, 에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노예무역 폐지안이 통과된 지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윌버포스의 사상과 행동에 의문을 품고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다. 윌버포스는 진보적인 운동에 많이 참여하여 그의 생각과 신앙심을 몸으로 실천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동노동 금지법 제정에는 앞장섰으나 다른 노동운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민의 정치적 저항권에 대해서는 탄압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집회의 자유와 언론자유를 규제하는 ‘6대 악법’에 찬성하는 등 지배자의 질서유지 입장에 섰다. 어떤 때는 인도주의적인 개혁자로 여겨지지만 1819년 반정부 시위 도중 11명이 목숨을 잃은 ‘피털루 학살’의 진상조사에는 반대하는 보수적 신앙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언제나 보수당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반대의견을 내었다. 사안에 따라 당론과 관계 없이 찬성입장에 서기도 반대입장에 서기도 한 것이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였기에 어떤 때는 진보적인 성향을, 어떤 때는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특히 그리스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영국의 아일랜드 전쟁에 반대한 것은 친구인 피트 수상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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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양적 사고로 신학하기 원문보기 글쓴이: 그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