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7시께,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금남로 일대. 도청을 향해 나아가려는 시민들과 군경저지선을 구축, 방어중인 계엄군간 전투는 거의 절정에 이른다. 격렬하게 계속된 싸움과정에서 시민들의 피해는 늘어만 가고, 그러나 철통같은 계엄군의 저지선은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다. 시민들과 계엄군간 서로 계속된 전투에서 소진된힘을 보충하듯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고 날씨는 최루가스 자욱한 가운데 점점 어둑어둑해져 오고 있다. 정녕 저도청은 난공불락인가,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시민들은 뭔가 이 상황을 돌파해낼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길 비라는 심정이다.
버스·트럭도 시위합세
이때다. 갑자기 유등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오지 않는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시민들은 일제히 [와] 함성을 올리며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라 박수를 쳐댄다. 도다시 마지막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시민들은 계엄군을 향해 노드와 같은 공격을 퍼부어간다. 차량시위는 맨 선두에 짐을 가듣 실은 대한통운소속 12t 대형트럭과 광주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 잇따르고 그 뒤에 2백여대의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우면서 계엄군의 저지선을 향해 돌진해간다. 트럭위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올라서 태극기를 흔들고 버스속에는 태극기와 각목을 든 청년들이 타고 있다. 차량행렬은 어마어마한 분노의 파도가 되어 계엄군의 저지선을 허물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응축되었던 민중의 투쟁역량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마치 몰아치는 해일과도 같이 일시적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 군중들을 떨쳐일어서게 한다. 이 엄청난 격량은 다시 새로운 전의를 일으키고 광주항쟁의 발전과정에서 질과 양적으로 결정적인 비약을 이뤄 다음날 저녁 8시께 도청 점령을 통해 민중항쟁의 승리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된다. 거의 10만여시민들이 참여한 5월20일 밤. 당시 이 상황을 취재중이었던 위정철씨 (당시 조선일보 주재기자)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날 나는 지금 화니백화점 옆에 있는 송학목욕탕 5층에서 취재중이었다. 7시께 유동쪽에서 올라온 차량시위대가 한일은행 4거리쯤에 다다랐다. 이때 차량행렬에서 빠져나오려는 영업용택시가 한대 있었는데 시민들이 달려들어 택시를 들어다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놓기도 했다. 개인택시로 차량번호가 전남1가 7393호였는데 이택시는 다시 도청쪽을 향해 나아갔다. 7시5분께 잠시 주춤했던 차량시위대는 전우가를 부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잠시 군경저지선에 걸려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20분께 천일버스 소속 버스 한대가 저지선을 뚫고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다.] 이렇듯 차량시위는 화염병과 각목, 돌멩이 등만으로는 중무장한 계엄군과 상대해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던 시민들에게 새로운 가두투쟁방법을 일러준 셈이다. 금남로의 차량돌파작전은 곧이어 노동청앞쪽에서도 재연되고 도청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차량을 앞세운 시위대의 공격이 치열해지면서 계엄군은 결국 도청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택시기사들인 유복만 나종기 공사천한테도 죽임당함을 발단은 무엇이었을까. 20일 오후2시께 당시 시외쪽을 자주 뛰는 속칭 나라시 택시 (총알택시)들이 많이 모인 광주역광장으로 되돌아가보자. 이날 광주역 고아장부근에는 10여대의 택시가 모여있다. 기사들은 삼삼오오, 이구동성으로 시내 상황이나 자신의 목격담을 이야기 한다.
일제히 전조등켜고 행진
[영업하다 소님실어준 것이 무슨 좨길래 공수부대가 죄없는 운전기사를 죽이느냐] [택시운전을 하다 공수부대가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때리고 찔러죽이는 것을 봤다] [이러다 광주시민 다 죽이는 것 아니냐, 영업을 집어치우더라도 우리도 싸우자]기사들은 의기투합한다. 기사들은 광주택시기사들이 전부 모여 들고 일어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다. 이어 시내로 나가 흩어진 기사를 모으고 무등경기장 앞에서 보자는 약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날 택시차량 시위에 가담한 서대준씨 (43·현 개인택시 운전)의 증언. [당시 나는 나라시택시로 광주∼목포간을 자주 뛰면서 광주역과 구 공용터미널 일대에서 운전을 했다. 19일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공수부대들이 데모학생을 무차별 두들겨 패 머리가 깨진채 질질끌고가는 상황을 봤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6시께 무등경기장 앞에는 2백여대의 택시가 모인다. 일부 부상당한 기사도 차를 몰고 나타난다. 이들은 차량을 한쪽에 모아놓고 지금까지 목격한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동료기사들의 죽음을 알리고 들고 일어나자고 결의한다. 이날 무등경기장에 모인 2백여대의 택시가 모인다. 일부 부상당한 기사도 차를 몰고 나타난다. 이들은 차량을 한쪽에 모아놓고 지금까지 목격한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동료기사들의 죽음을 알리고 들고 일어나자고 결의한다. 이날 무등경기장에 모인 2백여 택시기사들은 모두 시내 곳곳에서 처참한 시민들의 죽음을 목겨했거나 직접 공수부대의 만행을 몸으로 겪으며 분노한 사람들이다. 택시기사로 이날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후 5·18민중항쟁 민주기사협의회를 조직한 신봉변의 즈언을 들어보자. [19일 오전 금남로 한국은행 사거리에서 얼굴과 목을 칼로 난자당한 2구의 시체를 목격한 순간 나의 5·18은 시작됐다. 나는 당시 광주역과 공용터미널을 오가며 택시운전을 했는데 동료 10여명과 함께 차량을 몰고 다니며 시위대에 합류했다. 19일 오후차량시위대가 광천공단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상무대쪽으로 진입하려던 공수대 군용차량 7대와 마주쳤다.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몽둥이와 돌멩이로 차량을 망가뜨리고 공수부대 20여명을 끌어내렸다. 시위대들이 정신없이 몽둥이로 공수대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2∼3시께부터 공수대가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는 광주역에 집결한 50여대의 차량에 타고 있던 시위대를 총지휘, 이들을 장성 비아 정류소에 배치하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 공수대들의 진입에 대비하고도 했다. 그러나 공수대의 진입은 없었고 오후5시께 다시 시내로 들어오던중 동부고속도로진입로에서 갑작스런 총격을 받았다. 교도소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었다. 다음날 나는 동료들을 다시 모아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6시께 2백∼1백50대의 차량이 전체 헤드라이트를 켜고 광주역을 지나 유동으로 그리고 금남로를 통해 도청으로 향했다. 시민들의 혼호가 대단했고 도청앞 공수대들도 상당히 움츠러들었던것 같다. 수백대의 차량이 고릴ㄹ 물고 ㅇ어졌고 시민들까지 가세하니 여세가 엄청났다.]
경관, 차에치이기도
차량시위 참여 이후 시니씨는 22일부터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는다. 서대춘·위순복씨 등 동료 운전기사와 함께 순찰을 겸해서 각 동마다 돌아다니며 식량을 구한다. 신씨는 6월3일 부산으로 내려가려고 고속버스터미널에 갔다가 붙잡힌다. 서부경찰로 연행 한달간 조사를 받고 상무대의 계엄사로 이감된다.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