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염치한 대기업과 소비자의 외면 속에 활력을 잃어가는 전통시장. 하지만 그속에 '참맛'을 본다면 안 가고 못 배길 터. 대형마트, 기업형슈퍼마켓(SSM), 백화점이 기를 써도 대신 할 수 없는 그 맛! 바로 전통시장의 다채로운 먹거리를 찾아 출동한다. 다이어트가 시급하나 우리네 전통시장이 다시 서는 그날까지, 이름하여 '전통시장 작심 먹방 기행(紀行)'은 계속된다. - 기자 말
남쪽 도시 부산도 완연한 겨울이다. 아래위 '단디' 챙겨 입고 길을 나서도 손발 시리고 어깨는 움츠려든다. 하지만 '이곳'에 가면 방 안에서 부리던 게으름이 머쓱해진다. 피하고만 싶던 추위도 '애걔?' 하고 만만해진다. 바로 우리네 전통시장이다. 어묵가게 하얀 김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오고 길 위에 선 상인들 목소리는 우렁차다. 부산 초량동 초량전통시장으로 간다.
시장 초입에서 만난 분식 포장마차. 떡볶이, 오뎅이야 부산의 여느 그것과 달라 뵈지 않는데 주인 아주머니 목청과 차림새가 발길을 끌었다. 포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모, 뭐주꼬~?" 하는데 구수함 이면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번 만큼은 초반부터 과식말자 생각했지만 아주머니 주문 요청에 그만 "튀김 1인분"을 외쳤다.
부산에서 분식좀 먹어봤다 하는 이는 알 터. 부산의 떡볶이와 튀김은 그 크기에서 내륙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서울의 떢복이는 짧고 야리야리한 밀가루떡을 많이 쓰는 반면, 부산은 굵직하고 긴 가래떡이 대부분이다. 내가 가종 좋아하는 오징어 튀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다서 헤엄치던 그 생생함 그대로 탱탱하고 쫄깃하니, 크기는 막일로 두터워진 여느 남자 손가락 두 개쯤 합친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한입 베어물기가 버거워 가위로 자른 오징어 튀김이 스테이크를 연상시켰다. 바삭한 튀김옷 안에 담백고소한 통오징어. 매콤한 간장에 살짝 찍어 씹으니 언제 먹어도 흡족한 바로 그 맛이다! 이런 튀김 세 개가 1인분 2000원. 오징어 튀김 두 개에 마지막 당면, 두부로 속이 꽉 찬 고추 튀김을 먹을 때쯤 이미 배에서 용량 임박 신호를 보냈다.
음식을 맛보는 가운데 작은 포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모두가 단골인듯 주인 아주머니가 가족 대소사까지도 거들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온 입술 터진 꼬마에겐 "이 새끼, 주디(주둥이) 긴 음료수 그거 먹다 그랬구만!" 했고, 젊은 아주머니에겐 아픈 아버지 안부를 물으며 "(전자)렌지에 데워 드려라"했다. 앞서 꼬마 엄마에겐 예전 당신 육아 노하우도 들려줬다.
아버지 병간호 중이라는 손님이 주인 아주머니에 툭 던지는 듯한 질문을 했다.
"오늘 빨간날(휴일)인데 와 장사하노?" 아주머니, 튀김 먹던 내가 움찔할 만큼 큰 목소리로 "니도 내마이 짜쳐봐라(힘들어봐라). 나와진다!" 했다. 순간 두 사람이 다투는 건가 싶었지만, 다음 이어진 웃음 섞인 침묵이 그게 아님을 알려줬다.
포차에서 나와 우측 골목으로 몇 걸음 옮겼을까. '오잉?'. 맘 속에서 '저게 설마!' 하는 감탄이 일었다. 전문 음식점에서야 흔히 본 생선이지만, 시장 자판 위에 그 노릇노릇 하얀 자태 드러내놓고 있으니
마치 유명 연예인을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골목서 마주한 느낌. 바로 자연산 붕장어였다. 털모자 눌러쓴 할머니 한 분과 또래 아낙들이 수다 중에 "사실란교(살겁니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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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어가게 주인과 상인, 손님 할머니들 |
ⓒ 이명주 | 관련사진보기 |
입맛 다시며 "한 조각에 얼만데요?" 했더니 상인들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 마리씩 팔지, 조각은 안 판다." 대형 마트나 음식점에선 당연한 '조각 메뉴'가 전통시장에선 통하지 않았다. 머쓱해져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금새 미소를 지었다. 한 마리 가격이 1만 5천 원, 식성따라 고추장 양념 발라 연탄불에 즉석해 구워준다 했다. 혼자 먹긴 너무 비싸고 많은 탓에 이날은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초량전통시장(
http://www.choryangmarket.com/)은 부산역에서 걸어 5분내 거리다. 인근에 부산항, 차이나타운특구, 초량 돼지갈비골목 등이 있고 좀더 걸어도 좋다면 40계단문화거리나 국제시장, 부천시장(일명 '깡통시장)까지도 갈 수 있다. 지역 특성과 세월의 정취를 느끼며 입도 눈도 즐거운 골목길 여행에 안성맞춤이다.
자연 붕장어구이 앞에서 입맛만 다시고 다음 골목으로 가자 '금돼지'라는 또다른 작은 포차가 보였다. 한기를 막는 비닐 커튼 안으로 빨간 케찹 얹은 햄버거 대열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일반적인 햄버거와 달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햄버거 빵을 기름에 튀겼다. 모양을 뺀 질감이 도넛과 비슷했다.
포차 안쪽으로 연결된 반지하 공간에서 주인 아저씨가 나왔다. 앞서 튀김도 먹었고, 하물며 기름에 튀긴 햄버거라니... 그냥 갈까도 생각했지만. 기왕 시작한 맛 탐방이고 왠지 끌리는 매력이 있어 용감하게 한입 베어 먹었다. 그 맛은, 의외로 케찹 곁들인 샐러드가 튀긴 빵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그 안에 든 햄과 치즈가 내실을 더했다.
아저씨께 조리법을 물으니 빵 반죽부터 속 채우기까지 100% 수제(手製 )라고 했다. 왜 빵을 튀기냐 하니 그저 맛이 있어서라고. 기실 다수가 인정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허름한 작은 가게 안에서 "맛있다" 한 마디에 환하게 웃는 아저씨를 보니 아마도 이 작은 천 원짜리 빵 한 개가 누군가에겐 고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음식 사진을 찍고 있으니 아저씨가 "나도 한 장 찍어줄란교?" 물었다. 좀전까진 안 보였는데 가게 안쪽에서 친구 분과 소주를 드시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파는 순대 몇 조각 얹은 흰 접시도 보였다. 흔쾌히 그러마 하고 아저씨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친구에게 함께 찍자 권했다 거절 당한 아저씨가 당신 잔을 얼른 채우더니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그새 어둠이 내렸다. 아직 안 가본 반대편 시장 골목에 '초량죽집' 간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건물 안팎에 긴 세월 흔적이 역력했다. 점심도 굶은 채 기름진 음식만 연거푸 먹어서 깔끔하고 따끈한 죽도 좋지 싶었다. 팥죽, 호박죽, 녹두죽, 깨죽, 야채죽, 전복죽, 잣죽 중에 한 번도 안 먹어본 깨죽을 주문했다.
잠시 후 그릇 넘치게 담긴 노란 깨죽과 동치미 한 그릇이 나왔다. '나 깨죽이오~' 하듯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얼른 한 숟갈 떠먹어보니 고소하면서 담백하기가 그만이다. 따끈한 죽 한술 먹으니 자동 시원한 동치미로 손이 갔다. 동치미 한 술 넘기고 나니 또 죽으로 손이 갔다. 이미 배가 부를 데로 불렀지만, 그 깊고 깔끔한 맛에 몇 번은 더 손이 오갔다.
자, 오늘의 마지막 메뉴. 일명 '막썰어회'다. 바닷가 동네서만 누릴 수 있는 저렴하고 싱싱한 각종 회다. 광어, 우럭, 학꽁치, 돔 등등. 물 좋은 생선을 즉석 손질해 한 접시 5천 원에 판다. 부산 살면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서울 살 때는 회 한 번 먹으려면 최소 5만 원에, 혼자 갈 수 없으니 지인과 날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언제고 집 근처 시장만 가면 된다.
마침 중년의 아주머니가 남편 술 안주용으로 광어 한 마리를 주문했다. 주인 아주머니, 수조에서 팔뚝만한 광어 한 마리(마리는 1만 8천 원)를 꺼내더니 냅다 목을 쳤다. 좀전까지 파닥대던 광어는 금새 손질돼 하얀 접시에 소복히 앉혔다. 쌀쌀한 날씨에 얼른 집에 돌아가 회에 소주 한 잔 하고파졌다.
"아줌마, 저도 한 접시 주세요!"
첫댓글 캬... 쐬주 생각나네요.. 행복한 2014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S*랑 일하고 있는관계로 거의 부산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2주에 한번 서울 올라가는게 다구요. 그렇다 보니 부산 곳곳 맛 탐방도 가끔 합니다. 그중 기장짚불꼼장어가 최고 였고, 여름에 먹었던 밀면이랑 부산역에서 근처의 돼지국밥도 맛있었습니다. 초량시장은 가보지 못했고 근처 차이나타운에 가서 발 맛사지만 받아봤습니다. 정겨운 초량시장도 기회되면 찾아가 봐야 겠습니다.
기장숯불꼼장어에 쐬주 한잔... 접수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