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기 / 2023《한강문학》가을호(34호)신인상 당선작 수필 부문 / <그 겨울, 이상한 귀로>
그 겨울, 이상한 귀로
정 운 기
만항재는 고도 1,330m로 알려져 있다. 고개 한 옆에는 운탄고도라 일컫는 비포장도로가 있다. 운탄고도는 경제개발 시대에 사북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나르는 주요 도로였는데 지금도 비포장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11월 중순의 강원도 산간도로에는 살얼음이 내려 있었다. 살얼음이 하얗게 덮인 운탄고도에서 라이딩을 마치고, 만항재 정상에서부터 내리꽂듯, 마치 스키 타고 활강하듯 영월까지 아스팔트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마치 액션 영화에서나 느껴봄직한 스릴과 서스펜션을 가미한 익스트럼 스포츠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짜릿한 느낌은 거기까지였다. 강원도 산간도로는 구비를 돌 때마다 오르막내리막의 연속이었다. 난코스를 하나 둘 극복해내느라 급기야는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라이딩을 시작한 직후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은 결국 강풍 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최악의 날씨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서 하는 이 고생을 어찌하겠는가.
연이틀간에 걸친 대장정을 끝내고 함평으로 돌아가는 길, 피곤해진 몸을 챙겨 이제 집으로 갈 일만 남았다. 집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 집은 언제 어디서나 생각만 해도 늘 행복감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 집에 돌아가면 맛있는 반찬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보리밥을 엄마가 지어놓고 기다리셨다. 집은 그렇게 늘 성찬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성년이 되고 결혼한 후에는 엄마 대신에 아내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이렇게 집은 한 인간의 스스로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곳이다.
서울동서울터미널에서 함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제 안심이다. 아늑한 의자에 빠져들고 있었다. 함평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터미널, 밤하늘 높이 북두칠성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함평천변길로 코스를 잡았다. 천변 길은 평소 밤 12시까지 가로등을 켜놓고 있었다. 가슴 가득 밀려드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싸이클 선수라도 된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 제방길은 불빛이 한 점도 없었다. 제방길 나무 가지는 축 늘어져 헐벗은 채 찬바람에 휘감겨 잉잉대고 있었다.
어둠속 저 멀리에 무언가 누워있는 것 같은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는 거적을 쓰고 있었는지 꿈틀대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덮치듯 밀어대는 세찬 바람은 그 물체를 진행방향 앞쪽으로 달려간 만큼씩 밀어내고 있었다. 긴장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우박이 요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울부짖는 귀곡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방울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고양이 소리가 번갈아 들리며 환청이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매서운 겨울 밤바람, 우박과 싸래기 눈이 번갈아 쏟아지는 칠흑 같은 캄캄한 밤, 요상한 귀곡성과 방울소리가 번갈아 가면서 내 귀를 때리는 환청에 시달리며 정신마저도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제방아래 하천을 향하여 굴러 떨어지는 몸과 자전거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짧은 찰나에 핸들을 놓치고 하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아, 죽을 때 이렇게 죽는 거구나! 정신이 아마득하게 꺼져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수한 눈동자들이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내 몸을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손님! 손님? 함평에 도착했어요!”
차디찬 버스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악몽 중에서도 흉몽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겨울, 이상한 귀로.
칠성님이 내게 준 경고였다.
《한강문학》34호 (2024, 신년호)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작 심사평–정운기
탱탱한 탄력을 갖춘 기행수필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이 진행된다.
가면 오고, 오면 또 가는 이 거룩한 순환은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2024년, 《한강문학》34호(2024 신년호)에 멀리 진도에서 한국문협 진도지부 김영승 회장 추천으로 정운기님의 독특한 기행수필 원고가 접수되어, 이를 되풀이하여 읽었다.
살얼음이 하얗게 덮여있는 강원도 산간도로에서 시작한 라이딩, 그 직후부터 강풍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최악의 날씨에도 만항재 정상에서 운탄고도 그리고 영월까지의 오르막내리막의 어려운 코스를 극복해가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동서울터미널에서 함평으로 귀가 중 버스 속에서 꿈 꾼 환청까지… 긴 귀로 과정이 탱탱한 탄력을 갖춘 한 편의 기행수필로 탄생하고 있다.
이같은 경험은 창작 욕구를 일깨우는 큰 자산이 되어준다. 동시에 오늘날의 문학은 어느 특정인들의 전유물이던 과거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말은 문학 전공자가 아닐지라도 작가가 될 수 있는 열린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자신이 겪은 경험, 자신만의 느낌을 글로 다듬고 펼쳐, 독특한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여줄 수 있다면, 스스로 문학인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며, 등단과정을 통하여 공지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라이딩 즉 자전거 타기는 체력단련, 건강유지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겠다.
더욱이 이 글을 통하여 새삼 느낀 점은 심신을 함께 단련하게 되는 종합스포츠라는 인식과 아울러 라이딩 과정에서, 사색하는 정신적 힘도 길러준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운기님은 누구를 닮고 따르는 글이 아니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분야를 글로 펼쳐내어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작가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한다.
《한강문학》 신인상 심사위원 한 강 문 학 회 상 임 고 문 김 중 위 신 인 상 심사위원 심 사 평 허 홍 구 진도문협한진회장 추 천 인 김 영 승 《한강문학》 발 행 인 권 녕 하 |
《한강문학》34호 (2024, 신년호)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소감-정운기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직도 꿈을 꾸는 중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내 문학동인에 가입하였고, 시, 수필 등을 발표하며 늘 행복한 마음을 간직하던 중 진도에 계시는 김영승 시인으로 부터 “시는 씨줄과 날줄이 만나서 서로 엮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낱말의 고귀한 언어로 승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난 후 열심히 습작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건강 상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 장거리 자전거 여행 후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사고를 나름대로 피력하고 형상화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쓴 ‘기행수필’이 《한강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심사를 통과하였고, 이어서 ‘2024 수필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감격하고 맙니다. 오랜 습작기간을 거치며,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다변화된 사건을 시와 수필로 표현하면서 글쓰기의 향연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 가을걷이를 끝낸 텅 빈 들판에 은빛을 흩뿌리는 억새 잎, 찬란한 계절의 변화를 글로 다 표현하려니 막상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아직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당선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신 심사위원 허홍구 선생님과 적극 추천해주신 진도문인협회 김영승 회장님 그리고 한강문학 권녕하 이사장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는 더욱 글쓰기에 매진하고 글쓰기에 행복을 느끼며 글과 함께 세월의 변화를 느끼고 싶습니다. 묵묵히 읽고 글쓰기에 늘 조언을 해주는 아내 송선경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정운기
《한강문학》(2024) 신년호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전남 함평군 학교면 학동로 16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