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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한 논란
1978년에 에드워드 윌슨이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출간한 이후로 인간 본성과 관련한 논쟁에서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 글에서 나는 사회생물학의 인간 본성론을 옹호할 것이다.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 The Denial of Human Nature and Modern Intellectual Life』은 이 주제를 다룬 훌륭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나는 「『빈 서판』에 대한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양가감정」에서 이 책의 일부 내용을 비판했다(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는 인간 본성은 각 문화권마다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한국인의 인간 본성은 한국어를 쓰는 것이고 미국인의 인간 본성은 영어를 쓰는 것이다. 아랍인의 인간 본성은 이슬람교를 믿는 것이고 한국인의 인간 본성은 기독교나 불교 등을 믿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다. 고대 로마인의 인간 본성은 운에 따라 노예 소유주가 되거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의 오용이다.
이 글에서 인간 본성이란 사회, 문화, 역사와 상관 없이 모든 문화권의 인간이 공유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물론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예컨대 팔이 두 개인 것은 분명히 인간 본성에 포함되지만 팔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남자나 여자 중 하나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 본성이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성애-동성애처럼 통계적으로 정의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인구의 절대 다수(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96~98%, 여자의 경우에는 98~99%)가 동성보다는 이성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눈이 두 개다.
인간은 팔이 두 개고 손가락이 열 개다.
인간을 두들겨 패면 통증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식욕이 있다.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다.
인간은 적어도 수천 개 이상의 어휘로 이루어져 있고, 음소-음절-형태소-단어-구-문장 순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것 말고도 수도 없이 많다. 현대인 중 대다수는 이런 목록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일부 기독교인이 예수나 성모 마리아에게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지 모르겠다. 아니면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있겠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이런 얘기만 했다면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제이 굴드, 스티븐 로우즈 같은 좌파 학자들을 비롯한 소위 진보 인사들이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대체로 반반인 것도 인간 본성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비율의 이유를 알아낸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세기까지 우리는 그 해답을 모르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왜 남자와 여자의 수가 비슷한지를 물어보면 흔히 해 주는 대답이 있다. 그래야 각각의 남자와 여자가 짝을 찾을 수 있다는 식의 대답이다. 이것은 아담에게 이브라는 짝을 준 신의 배려를 다룬 기독교의 창세기와 일맥 상통한다. 물론 생물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이 없는 대답이다.
한 명의 남자(또는 수컷)가 여러 명의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낭비다. 따라서 이것은 미스터리였다.
다윈의 집단 선택설이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다윈은 으뜸 수컷(alpha male)이 되기 위한 투쟁에 주목했다. 고릴라나 바다
표범 같은 동물들의 경우 수컷들끼리 싸움을 해서 제일 힘이 센 수컷이 으뜸 수컷이 되어 생물학자들이 하렘이라고 부르는 암컷들의 무리를 독차지한다. 힘이 센 수컷은 유전적으로 우수한 수컷이다. 따라서 많은 수컷이
경쟁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그 집단의 유전자가 우수해진다(실제로 다윈이 남녀의 비율이 반반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이 설명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집단 선택설은 조지 윌리엄스의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1966)』이 나온 이후로 거의 죽어버렸다. “이기적 유전자”론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둘째, 왜 하필이면 반반인지가 설명이 안된다. 이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거의 모든 포유류의 경우에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반반이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그 이유를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설명에는 이미 진보 인사들과의 불화의 맹아가 들어 있다. 여기서는 엄밀하지 않은 산수로 설명할 것이다(사실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할 자신도 없다).
당신이 바다 표범의 엄마라고 생각해 보자. 아들을 낳을 것인가 아니면 딸을 낳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치자. 당신이라면 누구를 낳을 것인가?
무리의 성 비율이 수컷(1%) : 암컷(99%)라고 가정해 보자. 나라면 아들을 낳겠다.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볼 때 나의 자식이 99 명의 여자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딸을 낳는 것보다 99 배나 더 많은 자손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리의 성 비율이 수컷(40%) : 암컷(60%)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40 마리의 수컷이 60 마리의 암컷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으뜸 수컷이 될 확률은 40분의 1밖에 안되지만 만약 으뜸 수컷이 된다면 60 마리를 독차지할 수 있다. 확률론으로 따지면 기대값이 60/40 = 1.5가 된다. 이것은 암컷의 기대값인 1보다 더 크다.
만약 그 무리의 성 비율이 수컷(60%) : 암컷(40%)라면 어떨까? 암컷의 기대값이 1이라면 수컷의 기대값은 40/60 ≒ 0.67이다. 따라서 이 때에는 암컷을 낳는 것이 유리하다. 그리하여 수컷(50%) : 암컷(50%)라는 비율로 수렴하게 된다. 이 때에는 암컷과 수컷의 기대값이 같다.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암수의 비율이 반반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기심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가 짝을 찾을 수 있도록” 같은 신화적인 설명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런 식의 성 비율은 종 또는 집단 전체에 해가 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낭비다. 대다수가 암컷으로 이루어지고 소수의 수컷만 있는 집단이 더 번성할 것이지만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인 슬픔, 기쁨, 분노, 공포 등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사회생물학을 적대시하는 좌파 학자들을 포함하여) 받아들이는 듯하다. 사실 이것은 수십 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흑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들 정도였다. 폴 에크먼이라는 학자는 이런 상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감정이 얼굴로 나타나는 표정을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성과가 인종주의에 맞설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로부터 환영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심리학자 폴 에크먼은 미소, 찡그림, 비웃음, 못마땅함 등과 같은 얼굴 표정이 세계 어디서나 똑같이 표현되고 이해되며, 심지어 서양을 접한 적 없고 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들에게도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발견은 다윈이 1872년에 발표한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이미 제기한 두 가지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라 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한 감정 표현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다윈 시대에는 급진적이었던 것으로, 최근에 모든 인종은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고무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마거릿 미드는 에크먼의 연구를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망신”으로 평가했다. 이 정도는 온건한 편에 속했다. 미국 인류학회의 연례 회의 때 앨런 로맥스2세는 청중석에서 일어나, 에크먼의 사상은 파시즘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연설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또 한 번은 어느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가, 흑인의 얼굴 표정이 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에크먼을 인종 차별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빈 서판』, 199쪽, page 107)
어이없게도 마거릿 미드 같은 소위 진보적 문화인류학자 같은 사람들이 에크먼을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아마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도대체 미드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인류의 공통점을 주장하는 사람이 왜 인종주의자로 비난받을까?
소위 진보적 학자들이 열받은 이유는 에크먼의 연구가 인간 본성론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슬픔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 듯하다. 그들은
어떤 문화권에서는 우리가 슬픈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났을 때(예컨대 가족이 죽었을 때) “아프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즉 그 문화권에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슬픔이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국인은 매운 것을 먹었을 때 “hot(뜨겁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매운 맛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드 같은 학자에게는 슬픔 같은 것들도 문화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들은 이다지도 인간 본성론을 미워했다.
미드(Margaret Mead)가 에크먼의 표정 연구를 비난한 것은 누가 봐도 오바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미드의 책 『Coming of Age in Samoa : A Psychological Study of Primitive Youth for Western Civilisation(1928)』의 내용을 받아들인다. 미드에 따르면 사모아 섬 사람들은 질투를 하지 않는다.
이후에 프리먼(Derek Freeman)은 『Margaret Mead and Samoa: The Making and Unmaking of an Anthropological Myth(1983)』에서 미드의 연구를 반박했다. 물론 그는 이 때문에 미드 추종자로부터 인종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미드는 왜 질투가 인간 본성이 아니라고 믿었을까? 물론 미드는 자신이 그런 부족을 관찰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관찰을 미드만 한 것은 아니다 수백년 전에 어떤 선교사도 라스카피(?) 부족 사람들이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했다고 한다. 물론 수백년 전 선교사와 탐험가는 키가 3 미터고 눈이 하나만 있는 인간들이 사는 마을도 관찰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는 미드에게는 관찰보다는 자신의 소망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만약 질투가 인간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라면 질투를 없애기는 아주 쉽다. 질투를 가르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질투 때문에 생기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아랍인 여성들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질투 때문에 일어나는 살인도 사라질 것이다.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제도 질투를 가르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한꺼번에 사라진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것은 20세기 중반의 (극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외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만약 소련이 사회주의 이상 사회라면 공산주의자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준다. 만약 사모아 사람들이 질투를 하지 않는다면 페미니스트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듯이. 물론 그들은 약간의 부작용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그들은 죽도록 일하고도 관료보다는 훨씬 못 살았던 소련의 노동자를 만난다면 “당신은 착취당하지 않습니다. 당 관료가 당신이 구경도 못한 비싼 캐비어를 먹었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미 제국주의의 첩자를 처단하십시오”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바람 피웠다는 이유로 죽도록 얻어맞은 사모아 여성을 만난다면 “당신 남편은 질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바람 피웠다는 이유로 때렸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남편에게 얻어맞은 꿈을 꾼 모양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은 너무나 오래되었다. 남자들은 적어도 수천 년 전부터 여자들을 경멸해왔다. 수컷 침팬지와 수컷 사자들이 하는 꼴을 보면 암컷에 대한 경멸의 역사는 수천 만 년이 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근력이 약하다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은 여자의 열등성에 대한 주장에서 큰 위치를 차지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힘세다는 것은 큰 자랑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인간보다 코끼리가 더 우월한 존재가 되니까. 여자들에 대한 경멸은 주로 지능, 도덕, 이성에 집중되었다. 여자들은 머리가 나쁘고, 비도덕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존재라는 것이 성차별주의자들의 케케묵은 주장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때문에 열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가 정신적으로 다르다는 어떤 주장도 거부한다. 다름은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생물학은 페미니즘의 적이 되었다. 그럼 사회생물학이 남녀가 어떻게 다르고 주장하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남자와 여자는 질투의 양상이 다르다. 남자는 자신의 짝이 다른 남자에게 몸을 주었는지 여부를 더 중요시하고 여자는 자신의 짝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여부를 더 중요시한다(편의상 동성애자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겠다). 이것은 광범위한 실증적 자료로 입증되었고 그럴 듯한 설명도 있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자면 짝인 남자는 유전적으로는 남인 자식을 키울 수 있으며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에게는 재앙이다. 반면 짝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잔다고 해도 여자는 자신의 뱃속의 아기는 유전적으로 자신의 아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남자가 여자보다 몸을 주었는지 여부를 더 중요시하는 이유다. 한편 자신의 짝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자신을 버리고 그 여자에게로 갈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아기를 혼자 키워야 한다. 이것은 커다란 부담이 된다. 반면 짝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고 남자가 아기를 혼자 키우는 일은 별로 없다. 현대와는 달리 우리가 진화한 원시 시대에는 분유가 없어서 4, 5세까지 전적으로 엄마가 자식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다른 짝을 찾아나서면 된다. 자신의 자식을 이전의 짝이 잘 키우기를 기원하면서. 이것이 여자가 남자보다 마음을 주었는지 여부를 더 중요시하는 이유다.
둘째, 남자는 분노를 여자는 동정심을 더 많이 느낀다. 다른 말로 하면 남자는 더 공격적이고 더 경쟁적이다. 한마디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싸가지가 없다. 이것은 여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기존의 “이론”과는 반대다. 사실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자다. 살인도 폭행도 도둑질도 전쟁도 대부분 남자들이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의 지적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런 이론을 들으면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이론도 싫어했다. 남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해도 싫고 남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해도 싫으면 어쩌란 말인가?
셋째, 남자가 유전적인 변이가 더 심해서 남자들에게는 천재도 많고 바보도 많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연구 결과를 싫어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걸출한 예술가, 학자들이 남자인 이유 중 일부가 남자의 천재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넷째, 남자는 공간 지각력이 여자는 언어 능력이 낫다. 남자는 말하는 것에 서툴고 여자는 운전에 서툴다는 말이다.
다섯째, 남자는 더 많은 성적 파트너를 원한다. 처음 보는 이성이 성교를 제안했을 때 찬성할 확률이 남자가 더 높다. 남자가 섹스를 더 많이 원하기 때문에 성을 판매하는 쪽은 여자이기 쉽다. 이것은 심지어 침팬지에게서도 관찰된다. 이것의 생물학적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여자와 성교하는 남자는 수많은 자식을 볼 수 있는 반면 여자는 자신이 낳을 수 있는 자식이 정해져 있다. 남자는 이론상 수천 명의 자식도 볼 수 있지만 여자는 쌍둥이만 낳아도 수십 명을 넘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생물학에 분노하는 주된 이유는 “남자가 더 싸가지 없고 더 많은 상대와 섹스하고 싶어한다”라는 주장이 강간을 정당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정일 씨의 말이 이런 믿음을 잘 요약하고 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유전자 결정론에 걸려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택과 행동의 책임을 인간 그 자신에게서 면제시켜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데 있습니다. 유전자가 모든 책임을 지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합니다. 아무도 감방에 갈 필요가 없게 되죠. 유전자란 놈들만 잡아다 처넣으면 되니까요.(『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146쪽)
하지만 도정일 씨나 페미니스트들에게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말도 할 법하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가부장제 이론에 걸려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택과 행동의 책임을 인간 그 자신에게서 면제시켜 가부장제 탓으로 돌리는 데 있습니다. 가부장제가 모든 책임을 지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합니다. 아무도 감방에 갈 필요가 없게 되죠. 가부장제란 놈들만 잡아다 처넣으면 되니까요.” 강간범이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내 유전자 탓이다”라고 변명할 것을 걱정하는 페미니스트는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내가 자란 환경인 가부장제 탓이다”라고 변명할 것도 걱정해야 일관성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설명(사실)과 정당화(당위)를 혼동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를 해고하는 자본가는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자본주의 탓이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자본주의 하의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똑 같은 논리를 사회생물학에도 적용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힘든 모양이다.
우생학 옹호자들은 인간도 개처럼 품종 개량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실제로 품종을 개량하려고 한다. 품종 개량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인간의 키를 키우고 싶으면 키 작은 사람이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금지하면 된다. 인간의 머리가 좋아지도록 하려면 머리 나쁜 사람이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금지하면 된다. 취향이 독특한 사람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더 긴 사람만 아기를 낳도록 해서 오른팔이 길어지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우생학에 분노했고 이것은 정당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방식이 틀렸다. “인간은 품종 개량될 수 없다”면서 우생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또는 “인간의 육체는 품종 개량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정신은 품종 개량이 불가능하다”고 한 발 물러서기도 한다. 인권을 옹호한답시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후퇴한 것이다. “신이 마지막 날 특별히 창조한 인간이 어찌 한낱 다른 동물과 같이 자연 선택(또는 인위 선택)의 법칙에 종속되리요”가 그들의 모토다.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사실 속으로는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단지 신이라는 단어만 빠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지능 또는 IQ
논쟁과 맞물려 있다. 리처드
르원틴 같은 사람이 보기에 인간의 지능은 유전되지 않는다. 물론 르원틴이 진짜 생물학자라면(사실 그는 훌륭한 생물학자다) 인간의 지능은 지금도, 수십 만 년 전에도, 수백 만 년 전에도 유전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야
일관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침팬지보다 영리한가? 창조론을
믿지 않는 르원틴 박사는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침팬지보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인간의
문화 때문에 침팬지보다 영리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침팬지에게는 양자역학을 가르치기가
불가능하다는 난점이 있지만.
인간의 지능이 수백 만 년 전보다 높아진
것은 지능에 유전적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침팬지보다 더 똑똑해지는
유전자를 얻었다. 직립 보행을 원인으로 꼽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설득력이 있는 이론은
아니다. 직립 보행은 물론 손을 자유롭게 하지만 앉아 있을 때에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걸어다니면서 도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팬지도
앉아 있으면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무언가에 몰두한 침팬지는 몇 시간 동안 도구를 다루기도 한다. 한가지
유력한 설명은 knuckle walking(침팬지는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 관절로 걷는다)에서 해방되어 엄지가 다른 손가락과 마주보도록 진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인 듯한데 얼마나 설득력 있는 이론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능에 유전적 기반이 없다면 지능이 점점 좋아지는 쪽으로 진화할 수 없다.
또한 신을 본따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적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능이 완벽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인간은 더 머리가 좋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가축들은 인위 선택으로 품종 개량했으며 그 기법이 이론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내가 이런 품종 개량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아기를 낳을 것인지 여부는
그 사람이 결정할 문제지 국가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Richard Herrnstein이
1994년에 『The
Bell Curve: Intelligence and Class Structure in American Life』를 출간하면서 IQ 논쟁에 다시 불을 붙었다. Herrnstein은 인간의 지능이 유전되며 따라서 어떤 사람은 운 좋게도 머리가 좋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운 나쁘게도 머리가 나쁘게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모두가 상식적으로 아는 얘기지만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얘기이기도 하다. 평등이라는 이상이 깨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나는 정신 지체자로 태어난 사람도 교육만 잘 받으면 아인쉬타인만큼 위대한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더 평등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머리 좋은 사람이 일도 더 편하고 재미있게 하면서 지루하고 힘든 단순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월급을 훨씬 더 많이 받아야 하는가?”라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평등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Herrnstein은 더 나아가서 백인이 흑인보다 더 머리가 좋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백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흑인들이 머리가 나쁘다고 주장해왔다.
IQ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예컨대 이런 IQ 문제를 냈다. 두 명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백인 소녀고 또 하나는 흑인 소녀다. 문제는 “누가 더 예쁜가?”이다. 정답은 물론 백인 소녀다. 이런 식으로 IQ 검사를 해 놓고 흑인들이 머리가 나쁘다고 주장했을 때 진보주의자들이 열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IQ 검사가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결과 흑인들이 더
낮은 점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흑인이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영양상태가 안 좋다. 피죽도 못먹으면 발육이 부진할 수밖에 없다. 물론 뇌의 발육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머리가
나빠질 수 있다. 또한 흑인들은 교육에서도 더 많이 배제된다. 지적
자극을 박탈당해서 머리가 나빠질 수 있으며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의 진실이다.
또 하나의 진실도 있다. 나는 Herrnstein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잘 모르겠다(사실 그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복잡한 통계 기법에 대해 내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지능에 있어 인종적 차이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종은 유전자 교환이 단절되어 생기는 일종의
아종이다. 각각의 인종은 자신의 생태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평균키가 수십 센티미터 차이가 나기도 하고 잘 알듯이 피부색이 엄청나게 다르다. 적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강한 직사광선에 의한 피부암이 큰 문제이기 때문에 피부색이 검다. 반면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가 밝은 색이다(구루병을 막기
위한 것인 듯하다). 여전히 인종적 차이는 없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변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변이가 육체적 차이에 머물 이유는 없다. 성격이나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인종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생물의 유전자는 “만약 이런 식으로
변이하면 리처드 르원틴 박사가 우리를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니까 이런 식으로 변이하지 말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 선택 법칙은 도덕을 모른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성격, 지능 등이 미세하게라도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과학적 통계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이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어쩌면 Herrnstein이
이미 그것을 입증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달갑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만약 어떤 인종의 평균 지능이 다른 인종에 비해 낮다는 것이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인종주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주의자가 그런 논리를 대면서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런 식으로 따지면 가장 지능이 높은 천재 흑인보다 지능이 낮은 백인들(사실상 거의 모든 백인들)의 투표권도 빼앗아야 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 또한 투표권을 머리가 좋아서 주는 것이 아님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머리가 얼마나 좋은가 여부와 상관 없이 사회 정책 결정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투표권은 그런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물론 자본주의 하의 투표권은 아주 조금만 보장한다).
첫댓글 남녀가 어떻게 다르고 주장하는지를 살펴보자. -> 어떻게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