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에서 예정된 시간 보다 30분 정도 지체된 오후 1시 반경에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조암으로 향했습니다(약 20분 소요). 이곳은 108 고찰 순례지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번 순례지에서 가까운 곳이며,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고, 유서가 깊은 곳이기도 하여 들리기로 하였습니다. 거조암 입구까지 대형 버스가 들어갈 수 있어 곧바로 영산루를 거쳐서 영산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산전(국보 제14호)은 석가 여래께서 영축산(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設)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중심으로 지은 법당이라고 합니다. 영산전에는 526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의 10대 제자와 현세에서 정법을 지키는 불제자 16 나한[당(唐)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는 이들 나한의 이름이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囉惰闍),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가락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墮闍), 소빈타(蘇頻陀), 낙거라(諾距羅), 발타라(跋陀羅), 가리가(迦理迦), 벌사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수박가(戍博迦), 반탁가(半託迦), 나호라(囉怙羅), 나가서나(那迦犀那), 인게타(因揭陀), 벌나파사(伐那婆斯), 아시다(阿氏多),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 거기에다 오백 나한을 포함한 숫자라고 합니다. 나한(羅漢)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최상급의 수행자이며 공덕을 구비한 자를 총칭하여 이릅니다.
<주차장에서 본 거조암 전경>
<역광을 받고 선 거조암 영산루>
영산전에 들어서자 곧바로 주지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일행은 비록 비좁은 영산전 안이었지만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찰 순례를 하는 목적이 각자의 인과를 쳐내기 위함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주지스님에 의하면 거조암은 은해사 보다 약 100년은 먼저 세워졌고,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불교 개혁을 위한 정혜결사대가 결성된 곳으로 나중에 송광사도 이러한 정혜결사대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덧붙여서 지금까지 거조암은 자연 재해를 입은 적이 없는 곳이라고도 했습니다. 은해사 주지스님이나 이곳의 주지스님이나 두 분 모두 일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시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른 것 같았습니다. 거조암에 들어서면서 첫 느낌으로는 영산전과 종무소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인 것 같아서 많은 참배객이 한꺼번에 들릴 경우에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영산전과 삼층석탑>
<영산전 안의 부처님>
<영산전 오른쪽에 자리한 나한들>
거조암(http://www.geojoam.or.kr/)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淸通面) 신원리(新愿里)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고찰로, 신라 효성왕 2년(738년) 원참도사가 이 절을 창건했다고도 전하고,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고도 전합니다. 그 뒤 진평왕 13년 혜림법사(慧林法師)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 나한을 모시고 제대 성중 기도 도량, 영험있는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지금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로는 13세기 초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1308년), 이곳 거조암 영산전(1375년), 부석사 조사당(1377년), 4곳 건물들 뿐이라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거조암은 정혜 결사 도량으로도 유명한데,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고려 중기 송광사에 수선사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정혜(定慧)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불교 문화사에 길이 빛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거조암이라고 합니다.
지눌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교(敎)가 되고, 도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禪)'이라는 선교일원론(禪敎一元論)을 통해 한국 불교 사상에 큰 획을 그으셨던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결사운동은 정법불교(正法佛敎)에로의 복귀 작업이었고,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의 불교 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의 시국선언문과도 같아서 많은 스님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불교 역사의 생동하는 호흡과 정혜(定慧)의 향기 가득한 도량인 거조암은 유구한 세월 동안 구도와 참구의 향촉을 밝히는 으뜸의 도량으로 새로운 불교사를 만들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영산전 안에 모셔진 오백 나한이란 석가 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도록 수기를 받은 분들을 가리키며,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眞)으로 번역된다고 합니다. 오백 나한은 5백 명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尊者) 즉, 성인의 무리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의 멸도 후 1차 결집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백여 명의 제대 성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가 극도로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의 자연스런 표출로 나한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커져 있었으며, 이 나한상의 조각 형태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승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500여 분의 나한이란 많은 부류의 사람을, 다양한 공부(참구) 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누구나 성중들과 같은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그래서 모든 사람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마음에 새겨야할 것은 스님은 선방이나 아니면 나름의 참구 방법으로, 재가자는 사회 직능별로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도(道)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나한 정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거조암에서는 매월 음력 7일 나한 재일을 맞아 오백 나한재를 봉행한다고 합니다. 이 나한재는 민족의 비원(悲願)인 통일 조국을 기원함은 물론 기도 발원자 개개인의 소구 소망을 축원 및 기도하는 거조암만의 고유한 법회라고 합니다.
<입구에서 볼 때 오른편에 위치한 나한들>
<입구 방향에 자리한 나한들>
최초 거조암을 거조사라고 했고 은해사와의 관계는 언제부터 맺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本寺)로 하고, 거조사는 그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거조암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산전은 해체 보수시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柱心包係) 형식을 취하고 있는 앞과 뒤 퇴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 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526분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 영산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영산전에는 526분의 나한상이 극락도 (極樂圖)에 의하여 배열이 되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법화스님께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나한상을 하루만에 만드시고, 모실 때에 각 불상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잡아 앉았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나한은 본래 무례한 (無禮漢) 류의 세속 잡인에 불과하였으나 불타(佛陀)의 설법에 감복하고 하나 같이 인생의 진실을 깨닫고 오도성불(梧道成佛)한 불제자들이라고 합니다. 나한의 표현은 다른 불교상이 형식적인 면이 강조되어 예부터 전해오는 규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자유스런 자세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간혹 기괴한 용모나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깨달은 자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을 표현 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불교 경전의 첫 결집(結集) 때 모였으며, 수행으로 성불한 오백 나한을 불제자들은 매우 덕이 높은 성자로서 예배하며 받든다고 합니다.
시간적으로 빠듯한 일정 때문에 오백 나한, 한 분 한 분을 눈여겨 볼 수는 없었지만, 영산전 안에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차지 하고 앉은 모습은 장관이었고, 각 나한들의 표정과 크기들도 제각각이어서 언제 시간을 두고 오백 나한의 이름이라도 한 번씩은 읽고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했습니다. 어떤 나한은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고, 어떤 나한은 조금 모자란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며, 똑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한은 없어 보였습니다. 주지스님의 말씀 중에 나한들은 과자와 동전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한들의 앞에는 이중으로 줄을 선 촛불과 나무로 만든 그릇이 하나 씩 놓여져 있고, 거기에는 참배객들이 놓고간 동전과 과자들이 제법 담겨 있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과자라도 사오고 동전이라도 준비하도록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래 예정에 없던 주지스님의 법문도 있고 해서 계획했던 시간 보다도 또 30분 정도가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영산전을 나와 오른편에 있는 산신각에 참배를 하고 종무소에서 낙관을 받고는 곧바로 버스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입구에서 봐서 왼편에 자리한 나한들>
<뒷편에 위치한 나한들>
<산신각 전경>
<요사채 쪽에서 바라본 영산전>
<영산전을 나오면서 본 영산루와 범종>
<버스에 오르기 전에 본 거조암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