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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變態)란 무엇인가? 변태라고 하면, 우선 비정상적 성욕자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행위와 연결하여 상식적 범주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변태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변태의 뜻이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할까? 사전에서 변태의 기본 뜻은 ‘어떤 존재의 모습이 변함, 또는 그 변한 모습’으로 풀이된다. 애벌레가 겉껍질을 벗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나비로 변화되듯이, 변태는 긍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지 외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존재의 외면과 내면의 달라짐을 동시에 의미하는 변화는, 기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몇 세기 전에 한 철학자가 방법적 회의로서 수행했던 ‘의심’이나 익숙한 것을 뒤집어 생각하는 상상은 그런 변화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2022년이라는 연도를 두고 의심해보자. 서기 2022년은 무엇을 기원으로 한 연도인가. 서기는 그야말로 서양의 기원. 단기로 표기하면 올해는 4355년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단기를 생각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표준화된 달력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표기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런데 정말 당연한가? 우스갯말로 돌아눕기, 앉기, 걷기 몇 년으로 고쳐 쓰면 어떤가. 정해진 규칙을 의심하고 뒤집어보는 엉뚱한 상상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는 힘 아닌가?
물론 뒤집어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나비애벌레를 감싼 껍질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나를 둘러싼 세계, 즉 가족, 지역, 국가, 민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 탯줄을 끊고 난 우리는 모두 ‘이미 있는’ 이 세계에 안착한 존재들이다. 이 세계에 작동하는 물리적, 심리적 이해관계와 대립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안에서 개인은 어떤 무엇을 스스로 선택할 결정권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이미 있는’ 세계의 존재 양식을 받아들이고, 훈육을 통해 자녀에게 그것을 각인시킨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육체에 새겨지는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와 정치적 신념을 내면화하거나 거부하면서 성장한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기존의 가치 체계와 규범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미리 결정된 사항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겐 삶을 선택할 결정권도 자유의지도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자발적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다. 누군가의 요구에 따르기만 하면 내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또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타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면 비난받게 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자기대로 살고자 하는데,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아서 자꾸 의기소침해지는지 모른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닌데, 누군가 자꾸 책임을 지라고 해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사는지도….
따지고 보면 무언가를 요구하는 타인의 생각도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사회의 일반적 가치를 내면화한 것. 거기에 순응하면 나는 결국 남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타인이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가치, 진리, 정의는 각자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정의가 민주라는 의미와 닿아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민주사회가 평등한 관계에 기초해 있다고 믿고, 평등을 집단의 키치로 내건다. 그러나 집단은 언제나 소수가 이끌어가기 마련. 다수결로 선출된 대표나 몇몇 힘 있는 사람이 의사를 결정하고 그들이 집단의 가치와 정의, 진리를 독점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소수의 결정과 그들의 담함에 의해 결정된 양식은 그 사회의 약자에게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공산이 크다. 그래서 데리다와 같은 학자도 그 형태가 무엇이든 심지어 민주적 조직이라 해도 모든 집단은 궁극적으로 과두정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학교, 군대, 직장, 각종 사회단체를 떠올려보자. 소수의 의견이 배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렴되고 있는가.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 금그어진 견고한 선을 점선으로 바꿈으로써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노마드적 사유나 서로의 자리와 위치를 뒤바꾸어 보는 방법도 있지만, 기성의 논리에 훈육된 우리에겐 사유의 전환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해마다 변화를 말하는 우리, 2022년에 접어든 나의 의식은 얼마나 변화하고 있을까. 뭔가 끊임없이 달라지는 듯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