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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시산제 및 67차 간산 안내(2025년 4월 12일 고양시 덕양구 일대)
우리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에서 실시하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 시산제 행사 및 제 67차 정기 간산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 주변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시산제를 거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고양시 일대와 파주지역에서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 묘소와 조선조(朝鮮朝)의 인조(仁祖)의 장남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를 답사할 예정이며, 파주지역으로 넘어가 윤관장군 묘소를 간산하고 기도발로 유명한 장지산 용암사 쌍미륵불을 방문 2025년 을사년 소망을 기원할 예정입니다.
1. 간산 일시
- 2025년 4월 12일(토요일) 09시 30분
▶ 지하철 6, 7호선이 닿는 태릉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오시면 답사차량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2. 회비: 50,000원 (교통비, 기타비용 등)
3. 시산제 및 간산 행사 계획
서울 태릉역 1번 출구 출발(09:30) → 내부순환도로 → 홍제나들목 → 시산제 장소(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285번길 33-13 고려 공양왕릉 옆) → 공양왕릉 및 정지양 묘소, 평산신씨 묘 → 최영 장군 묘소(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 경안군, 임창군 묘소(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123-44) → 윤관장군 묘소(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 장지산 용암사 쌍미륵불(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742-28) → 태릉역 1번 출구(해산)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정철화 부회장(010-3475-2357), 사무국장(010-9853-1357)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4. 답사지 안내
1) 시산제 행사(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285번길 33-13 고려 공양왕릉 옆)
우리 학회 시산제가 치러질 장소는 고려 공양왕릉을 품은 고양시 덕양구에 기맥(氣脈)을 주입하는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분지된 도봉지맥으로 태조산(太祖山)은 서울을 일구는 도봉산(道峰山, 740m)이다.
이 터의 내룡(來龍)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하(南下)하여 북한 땅 추가령(楸哥嶺) 식개산(1,158m)에서 한북정맥(漢北正脈)을 분지(分枝)하여 남서진(南西進)하다가 평강의 백암산(1,110m)→ 김화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5.5m)→ 죽엽산(600.6m)→ 양주의 불국산(470m)→ 호명산(423m)→ 한강봉 등을 솟구치며 행도(行度)하여 방향을 남쪽으로 변환하여 의정부의 사패산(549m)을 일구고 서울과 이곳 일대에 생기(生氣)를 공급하는 도봉산(道峰山, 740.2m)을 치올린다. 도봉산에서 남서쪽으로 진행하는 한북정맥은 서울의 삼각산인 북한산(北漢山)을 솟구치기 직전 상장봉(513m)에서 서쪽으로 행도(行度)하는 도봉지맥을 분지(分枝)한다. 이 맥은 곡릉천 남쪽으로 길게 서행(西行)하다가 한강 가인 파주의 심학산(194m)을 잇는 긴 연맥(連脈)이 이곳 덕양구의 현달산(峴達山, 134m)을 세우기 직전 횡(橫)으로 한 가지를 분맥하여 공양왕릉을 일구었다.
우리 선조들은 산을 지키고 관장하는 신을 산신령(山神靈)이라고 한다.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精靈)이 있는데, 그 정령에 의해 생성(生成)할 수 있다고 믿는 원시 신앙의 애니미즘(자연계의 동식물과 인간의 육신은 출입이 가능한 영혼이나 정령이 있다고 보는 초자연적인 힘을 믿는 것)으로, 우리나라 산신(山神)의 신체상(神體象)은 대개 신선(神仙)이 호랑이를 동반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산신제, 산제(山祭)라 하는데 요즈음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성껏 제수를 마련하여 제를 올리는 행사를 시산제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산신제를 지낸 연원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으며《구당서(舊唐書)》에 백제는먼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산곡신 에도 미쳤다(先祠神祗及山谷之神)는 기록과《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가야(伽倻), 신라, 고구려 등의 개국 신화는 한결같이 하늘에 사는 천자(天子)가 높은 산에서 강림(降臨)하는 산신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천신 → 산정강림 → 산신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신관(神觀)으로, 특히 고려 시대에는 송산신사(松山神祠), 동신사(東神祠)를 비롯하여 각지에 산신당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동산(東山: 駝駱山)의 산신을 호국지신(護國之神)에 봉하는 등, 명산(名山)의 산신령을 호국지신으로 봉했고, 주(州)․ 군(郡)에도 진산(鎭山)을 지정하여 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풍습은 전국으로 퍼져 동네마다 산신당을 마련하여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으며 지금도 동제(洞祭)의 일부로 남아, 산신을 모시는 유풍이 전해진다.
우리는 살면서 아주 가끔, 또는 매우 드물게, 소중한 존재와 마주치거나 살고 있다. 그 존재가 사람이든, 생물이든, 무덤이든, 무생물이든 인생이란 길을 걷다 보면 그 소중한 것과 조우(遭遇)할 때가 반드시 있는데 인생을 통틀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인연(因緣)이다.
항상 이러한 인연을 만들고자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풍수 답사도 마찬가지다. 우리 억겁(億劫)의 인연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봅시다.
2) 공양왕릉 및 영일정씨, 평산신씨 묘소(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65-6)
고려 공양왕릉(高麗 恭讓王陵)은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의 재위는 3년(1389∼1392)으로 공양왕과 그의 부인인 순비(順妃) 노씨(盧氏)의 능지(陵地)이다.
공양왕의 이름은 왕요(王瑤)이며 신종(神宗)의 7대손이고 정원부원군 (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이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1394년 다시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두 아들과 함께 예정된 죽음을 당했다. 이곳 무덤은 쌍묘(雙墓) 형식으로 1394년(태조 3)에 조성되었으며, 1416년(태종 16)에 공양왕(恭讓王)으로 봉(封)하고 봉능(封陵)의 형식을 갖추었다.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앞에는 석등(石燈)과 돌로 만든 조그마한 견상(犬像) 하나가 있는데, 보는 이에 따라 호상(虎像)으로도 본다.
무덤의 양쪽에는 소박하게 생긴 문신과 무신상이 있으며 비석에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비문(碑文)으로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릉은 이곳 외에도 삼척시에도 있는데 이곳의 능은 조선 왕조가 공적으로 인정한 능이고, 삼척의 능은 민간에서 전승되는 무덤이다.
이곳 공양왕릉에 개 모양의 석상이 세워진 것도 고양 사람들이 연못을 향해 짓는 삽살개를 보고 그들의 시신(屍身)을 발견했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한다. 두 곳 중 어느 곳이 진짜 공양왕과 왕비가 묻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공양왕릉 위로는 여러 기의 민묘(民墓) 들이 조성되었는데 모두 공양왕의 외손(外孫)들과 관련된 영일정씨(迎日鄭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 들의 묘소다.
공양왕릉 경계목이 쳐진 바로 위쪽에는 공양왕의 둘째 딸인 정신궁주의 외손자(外孫子)인 영일정씨 정연(鄭淵)의 둘째 아들 정자양(鄭自洋)의 묘소가 있다. 정연은 세종조 때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위로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평산신씨 신숙주(申叔舟)의 칠남(七男)으로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신형(申泂)의 묘소가 언덕 너머 구릉에 있고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묘는 공양왕릉의 위쪽 구릉지(丘陵地) 상단을 소점 했다.
이곳 공양왕릉(恭讓王陵)은 최고 권력자의 자리라기보다는 그리 높지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지막한 산비탈에 조성된 묘소로 전방으로 전개되는 일자(一字)처럼 생긴 안산(案山)과 용호사(龍虎砂)가 좌우(左右)를 잘 감싸주고 어우러지는 모습은 우쭐대거나 탐내지 않는 순박한 촌노의 형세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 좌향은 8층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안산의 가슴팍이 보듬는 음래양수(陰來陽受)의 터다.
3)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음택(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장군은 1316년(고려 충숙왕 3년)에 충남 홍성에서 사헌부(司憲府) 간관(諫官)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청백리로 유명한 아버지는 최영이 16살 때 유명한 유훈(遺訓)을 남겼는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여당견금여석(汝當見金如石)]"는 말이다.
대자산(大慈山)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산자락 사이로 자연 계곡과 임도가 나란히 이어지는 진입로의 빗장을 열고 발을 들어놓자 양명(陽明)한 바깥세상이 음침한 응달 산하(山河)로 바뀌면서 눈 덮인 오솔길이 나타나고 약 500 m 쯤을 오르면 경사가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난다.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바지에 기왓장이 덮인 곡장(曲墻)이 나타나고 단출하게 보이는 사각 봉분 두 기가 산객(山客)과 조우한다. 앞쪽의 묘소가 최영 장군과 부인(문화 류씨)의 합장묘(合葬墓)고, 뒤쪽이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의 묘다.
최영 장군의 묘역은 예전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적분(赤墳)으로 무속인들의 기도 터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사각 봉분 위로 잔디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무속인들이 밤새 밝히던 촛농도 보이지 않는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최영 장군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탐욕이 있었다면, 내가 묻힌 무덤에 풀이 돋아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다."란 장군의 유언이 있었는데 실제로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붉은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최씨가 앉은자리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란 속설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왕조가 망하고, 후손들에 의해 묘역 정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장군의 19대손인, 최헌규(崔獻圭, 육당 최남선의 부친) 씨가 대대적인 묘역 정비작업과 함께 비석도 그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장군의 묘를 일군 대자산(大慈山, 132m)은 의정부 불국산에서 맥을 잇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그중 좌로 도는 정맥(正脈)이 도봉산을 일으키고 한양의 진산(鎭山)인 북악산(北岳山)을 일구며, 남서쪽으로 진행하는 용맥이 호명산을 일으키고 한강봉과 꾀꼬리봉을 세운 뒤, 계명산에서 연맥되는 내맥(來脈)이다. 이 맥은 용미리의 서울시립공원 묘지를 일구고 서남쪽으로 행룡하다가 우암령과, 해음령을 통과하여 대자산을 솟구쳤다.
장군 묘소를 일구는 도두(到頭)는 곡장(曲墻) 뒤쪽에서 굴곡 박환(剝換) 하였는데 후룡(後龍)을 바라보면 용맥의 변화가 활발하다. 그러나 생기 탱크인 도두(到頭)와 입수처(入首處)가 양명(陽明)한 기운이 없고, 칙칙하여 생기를 느낄 만한 구(毬)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명예(名譽)나 귀(貴), 손(孫)의 발복이 아닌 혁(革)과 무(武)의 의미가 강하게 와닿는 음택지다. 어쩌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희생양이 된 장군의 한(恨)이 서려 있기에 영적(靈的)인 추앙은 물론 영감(靈感)을 얻기 위한 무속인(巫俗人)들의 출입이 빈번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묘소로 들어오는 입수룡(入首龍)과 입수도두(두뇌)와 혈처(穴處), 주변에 포진된 사격(砂格)의 형상 등을 심도있게 추리하면 그 터를 점한 주인공의 생애(生涯)를 유추할 수 있다.
대자산에서 좌측으로 낙맥하는 본신청룡(本身靑龍)은 묘소 전방을 감아주고 진행하다가 회포정대(廻抱正對)하여 본신안산(本身案山)으로 공(拱)하고, 계속 활처럼 휘어져 진행하여 이곳 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관쇄(關鎖)한다. 그러나 백호(白虎)는 중출(中出)로 행룡(行龍)하는 주룡의 곁을 따라오는 듯하다가 그냥 내질러 줄행랑치는 형세로 이곳 터에 큰 힘을 실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백호방 술방(戌方)에 꽂힌 송전탑이 현침사(懸針砂)로 작용하면서 충살(沖殺)을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안산의 모습도 무덤에서 보았을 때 너무 가깝고 높다. 그러다 보니 그 너머의 조산군(朝山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조응(朝應)하고 상대하는 손님 산(朝山)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은 자손들의 삶이 남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풍수적 이론이다. 즉, 산이란 아무리 낮아도 혈처에 가깝게 근접하면 높아 보이는 것이고, 높은 산이라도 멀게 떨어져 있으면 낮게 보이는 것이 산세를 이해하는 원근(遠近)의 법칙이다. 또 이곳처럼 안산이 가까워 나를 능압(凌壓)하는 모습이면 아랫사람이나 배우자까지 눈치를 보아야 하는 답답한 입장이고, 향전(向前)에서 들어오는 햇볕마저 차단되어 당판 일대가 양명(陽明)하지 못하고 어두침침하고 음습(陰濕)한 기운을 분출한다. 그리고 긴 골짜기를 따라 이곳 당판으로 들락거리는 전유요풍(前有凹風)의 형세가 일구는 자생풍(自生風)의 영향은 잔디의 생육(生育)을 억제하고, 풍수의 핵인 장풍(藏風)이 아닌 소산(消散)의 터가 되어 손(孫)들이 한미(寒微)하다고 본다.
격룡(格龍)한다. 입수일절 자룡(子龍)에 격침되고, 좌향(坐向)은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의 양룡양향(陽龍陽向)으로 합궁(合宮)이다. 풍수에서 응용하는 물은 청룡자락 아래를 비집고 나오는 좌선수(左旋水)의 득수(得水)로 백호 끝자락을 청룡이 감싸는 정미(丁未)방의 수구처(水口處)다. 이기법(理氣法)은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왕향(自旺向)으로 쇠방가거래(衰方可去來)하여 발복부귀(發福富貴)를 논하는 향법(向法)이다.
4) 소현세자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 묘소(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123-44)
조선의 임금 인조(1623∼1649)의 맏아들 소현세자(1612∼1645)가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9년간 고초를 겪었던 왕자의 귀국과 함께 이에 자신이 왕위에서 밀려날까 불안에 떨던 인조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임을 당한다는 영화 '올빼미'가 상영된 바 있다.
세자의 죽음이 독살(毒殺)임을 암시하는 1645년(인조 23년) 6월 27 일자 인조실록의 내용이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 빨간 빛깔의 고운 흙)을 발라 단장하고,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하여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는 내용을 상(인조)이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임금의 행희(幸姬, 왕의 첩) 조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임금 앞에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嬪宮, 소현세자 처)을 무함(誣陷)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지 수 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 염습할 때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임금도 알지 못했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의 정비)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란 내용이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하고 얼마 후 그의 부인인 강빈(姜賓)마저 임금의 수라에 독약을 넣었다는 모함을 받아 폐빈(廢嬪)되었고, 1645년(인조 24) 3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마저 연좌제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648년 11월 큰아들인 이석철(경선군)이 풍토병으로 죽었는데 당시 겨우 12살이었다. 이어서 동생인 이석린(경완군)도 12월에 죽었다. 즉 할아버지 인조가 어미의 죄를 연좌시켜 손자를 둘이나 죽인 셈이다. 그리고 당시 6살이던 막내인 이석견(경안군)만 살아남아 17년을 더 살다가 22살로 요절하여 이곳 무덤에 묻혔다. 경안군은 슬하에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임창군의 무덤이 경안군 묘소 아래에 있다.
경안군 묘소는 산기슭 아래 솥을 업어놓은 것처럼 볼록한 돌장(突場)의 모습이다. 이곳은 대자산에서 이어지는 내맥(來脈)이 아래로 내려오다 몸통을 묶고는 다시 치올린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형상이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번쩍 쳐들고 먹이를 노리는 뱀 대가리와 흡사하다 하여 사두혈(蛇頭穴)이라고도 한다.
위로 솟구친 산정 부위에 맺는 정상적인 혈(穴)이라면 돌중와(突中窩)로, 산정(山頂) 부분이 약간 오목해야 진혈(眞穴)을 맺는다고 보는데, 이곳 묘소는 오랜 세월이 흘러 사실 여부를 논하기는 무리가 있는 민묘의 형태다. 그 아래 평지를 소점한 장남 임창군의 묘소는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평범한 유형(乳形)의 무덤으로 8층 갑좌경향(甲坐庚向), 4층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양기(陽氣)를 흡수한다.
5) 파평윤씨를 반열에 올린 윤관 장군 음택(파주시 광탄면 해음로 930)
윤관 장군 묘소로 기맥(氣脈)을 유입시키는 정맥(正脈)은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개명산(565m)에서 북서쪽으로 행도하는 내맥이 용미리를 품 안에 껴안은 뒷박고개를 지나서 이 터의 주산(主山)인 박달산(朴達山, 363m)을 일구었다. 박달이란 산명(山名)은 배달민족과 같은 의미로 밝음, 새벽, 빛 등의 뜻을 간직하여 산세가 아름답고 양명하다.
박달산에서 기세 있게 북서진(北西進)하는 용맥은 윤관장군 묘소 앞에 넓은 국세(局勢)를 일구었는데 명당이 광활하고, 팔을 넓게 벌려 이곳 묘소를 아우르는 산자락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홍살문이 있는 묘역 입구에서 주봉(主峰)을 바라보면 탐랑체(貪狼體)인 현무정(玄武頂)의 좌우를 천을(天乙)과 태을(太乙)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삼태봉(三台峰)의 자태를 선보이고 당판을 일구는 주맥은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크게 힘을 싣고 터를 일구는 생룡(生龍), 또는 진룡(進龍)의 기세로 묘소를 작국(作局)하였다.
좌우를 포진하는 청룡 백호는 묘역을 겹겹으로 포옹하는 모습이지만 청룡 끝자락이 약간 허(虛)한 모습으로 작용하여 한때 후손들의 어려움을 유추할 수 있다. 전방의 안산(案山)은 옥대(玉帶)를 두르듯이 묘역을 향해 뻗어 내리다 아래쪽에 둥글고 널찍한 소반처럼 보이는 사격이 이곳 묘소를 향해 응기(應氣)하는데, 마치 귀한 손님들을 모셔놓고 잔칫상을 벌린 모습이다. 주변 사격으로는 문필봉(文筆峰)과 천마사(天馬砂), 옥녀봉(玉女峰) 등 수려한 사격이 포진되면서 보국(保局) 안으로 장엄한 기운을 뿜어댄다.
그러나 굳이 이곳 묘소의 흠을 지적하라면 당판의 분상(墳上)이 혈점(穴占)보다 약간 위쪽에 자리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넓은 양쪽 선익(蟬翼)의 다이아몬드 각 중심이 혈처인데, 그 보다 약간 위쪽으로 조성되어 혈심(穴心)을 벗어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리고 당판의 전순(氈脣)과 소명당(小明堂)에 너무 많은 공력을 들여 묘역이 조성되면서 정확한 사실적 진위를 확인하기가 조금은 애매하다.
전방의 평탄한 명당은 가로로 길게 연이어지는 모습이고 물길이 묘역을 향해 완벽히 감싸지 못하고 약간 반배(反背) 하듯이 나를 향해 무정하게 치고 오르다가 제 갈 길을 간다는 모습으로 흐른다.
이곳 명당수(明堂水)는 좌측 청룡방의 용미리 쪽에서 들어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르는 좌선수(左旋水)의 입지로 경유(庚酉) 방향으로 파구(破口)되고, 묘소의 좌향은 4층 간좌곤향(艮坐坤向)을 놓아 88향법의 문고소수자생향(文庫消水自生向)의 이법(理法)이다. 문고소수는 이른바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魚)가 되어 부귀(富貴)하고, 총명한 수재와 예술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자손을 배출한다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용혈(龍穴)이 확실해야 하고 부실하면 자손들이 음란(淫亂)하고, 패절(敗絶) 하므로, 함부로 정하면 안 된다는 경고가 붙어있다. 즉 풍수에서 말하는 완벽한 혈을 찾기란 어렵다고 한 것이 자연이 주는 교훈으로 취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버려야 하는 것도 있음이 풍수지리 이론이다.
아무튼 이곳 장군의 음택 바람으로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475년과 조선왕조 519년을 합쳐 약 천 여년 동안에 삼한의 대표적 가문으로 번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에만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844명인 전주이씨(全州李氏)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또 왕비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를 포함하여 모두 5명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 6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로 많다.
6) 장지산 용암사 쌍미륵불 입상(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742-28)
국가 보물 제 93호인 마애이불입상은 용암사 뒤편 거대한 바위벽에 두 부처가 함께 새겨져 서 있는 모습으로 마애이불입상이라고 부르는데, 설에 의하면 고려 제13대 선종(1083~1094) 때 축조한 것으로 전한다. 전체 높이는 17.4m, 얼굴 크기만 2.3m 이상으로 논산 관측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石佛)이다.
화강암 바위 전체를 부처의 몸통으로 삼아 몸과 손, 옷 주름 등을 조각하였으며 머리 부분은 별도로 만들어 몸통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둥근 갓(월립)을 쓴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 갓(방립)을 쓴 불상은 여상(女像)으로도 보는데, 이곳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소원을 빌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기도발을 잘 받는 것으로 알려진 마애이불입상을 찾아 국태민안과 가족들의 무궁한 안녕을 기원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5. 지참물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가방, 나경패철, 필기도구, 우천 시 우산. 간식 등
6. 신청 방법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이름과 연락처를 이곳 카페 답사안내 공지사항 아래, 신청 등록란에 리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간산은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2025년 시산제를 겸한 간산 이오니 회원들께서는 2025년 4월 7일까지 꼭 리필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7. 연락처
연구회 회장 채영석 (010-6282-9721)
연구회 부회장 정철화 (010-3745-2357)
연구회 사무국장 문영래 (010-9853-1357)
첫댓글 석초선생님 야초선생님, 사전답사 및 준비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문영래 참석합니다
박기현 고문님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