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한라산' 장편서사시 시인 이산하
제주 4·3 ‘한라산’ 시인 이산하 “‘한라산’은 내 비명이자 통곡이다”
2018.03.24 16:42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광주가 매년 5월 몸살을 앓듯이 제주는 4월이 오면 몸살을 앓는다. 4월이 오면 몸살을 앓는 사람이 있다. 이산하 시인(58)이다. 그는 제주 4·3사건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쓴 당사자다. 그것도 권위주의 시절인 1987년 제주 4·3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할 때였다. 거기에 반미감정을 가득 담은 서사시 <한라산>은 한마디로 “나를 죽여라”고 항거한 시다.
이산하 시인 / 우철훈 선임기자
이산하 시인 / 우철훈 선임기자
“제주 4·3은 큰 변화가 없다. 국가가 기념식을 한다는 것이 달라진 것이지만…. 제주 4·3에서 가장 큰 약자는 죽은 자들인데. 그들은 아무 변화가 없다. 다음은 죽은 자의 가족인데 거기도 변화 없다. 제주의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제주 사람들은 70년 동안 이념을 가진 후보보다 무소속 후보에게만 표를 줬다. 최근 좀 달라지긴 했지만….”
가장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부터 1954년 9월까지 경찰과 우익단체가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다. 제주 4·3평화공원에 1만4231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다. 정부는 ‘남로당 소탕’이라고 했지만 당시 남로당원은 350여명에 불과했다. 제주 4·3사건은 사회적 공론은커녕 1978년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에서 잠깐 언급됐을 뿐 거의 금기시된 주제였다.
그래도 이번 4·3사건 70주년을 맞는 그는 조금 남다르다. 절판됐던 그의 시집 <한라산>을 시인학교 제자·후배들이 다시 발간하고, 재심 변호사 비용까지 모금하기 때문이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로 시작하는 <한라산>은 1987년 무크지 <녹두서평>에 처음 게재됐다. 이후 2003년 시학사에서 다시 출간했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이번에 나오는 시집은 그때 누락된 부분을 보완한 ‘진본’이라고 했다.
“2003년 한 번 나왔었는데 그때 보완하지 못해 이번에 전면적으로 다듬었다. 1987년 넘긴 <한라산> 원고를 인쇄소에서 거부했다. ‘센 책’을 많이 만든 녹두출판사조차 이 책만큼은 도저히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을 완화했다. ‘일단 4·3사건을 널리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그때 완화했던 부분을 원래대로 바로잡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한라산>은 과거 것보다 훨씬 ‘빨간색’이겠다.
“그렇다.(하~하) ‘한반도는 미국 성조기의 51번째 별…’ 등 미국 관계 내용을 다시 복원했다.”
금기시됐던 제주 4·3사건은 그나마 1999년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제주 4·3평화공원이 만들어졌다. 진상규명과 치유·화해의 자리가 마련됐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폭력을 사과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들어 다시 ‘제주 4·3은 남로당 소행’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황교안 총리 얼굴이 TV에 등장할 때마다 과거 당했던 고문과 용공조작이 떠올라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고 말했다. 그가 <한라산>을 쓴 계기는 이렇다.
“학생운동으로 수배 중이던 1986년 우연히 만난 출판사 직원이 ‘혹시 제주 4·3사건을 아느냐’고 속삭이듯 물었다. 잘 모른다고 했더니, 우리 출판사에 원고가 있는데 사장이 겁을 먹고 책을 못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원고가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4·3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였다. 나중에 출판사에서 이 원고 그대로 책을 내지 말고 시적으로 각색하는 것이 부담도 줄이고 파급력이 크다며 나에게 그 작업을 맡겼다.”
그는 이 작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거부하면 역사의 방관자가 되고, 쓰자니 폭탄을 안고 터져야 할 운명이 원망스러웠다”면서 “알고 못하면 비겁한 것이니 비겁해지지 말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료를 더 수집해 86년 가을부터 시작해 87년 1월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원고를 넘길 때 출판사 편집장(신형식)으로부터 “종철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은 그의 고등학교(부산 혜광고) 후배로 서로 잘 알던 사이였다.
박종철의 죽음을 씹으며 <한라산>은 3월 무크지 <녹두서평>에 실려 세상에 공개됐다. 본명 이상백인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산하’라는 필명을 썼고, 이는 출판사 몇 사람만 아는 극비였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그가 누구인지 금방 확인했고, 11월 광화문 한 카페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이산하 시인 / 우철훈 선임기자
이산하 시인 / 우철훈 선임기자
<한라산>은 워낙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강렬한 시’로 아무도 그의 변론을 맡지 않으려 했다. 신경림·고은·백낙청 등 유명 평론가·작가조차 재판정에서 증언을 서주지 않았다. 그는 “이 재판이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고, 숨겨진 4·3사건이 공론화됐어야 했는데, 평론가·작가 아무도 안 나왔다”면서 “진보의 기회주의자들에게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단어가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정작 결정적 순간에 입을 닫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죽일 때 국제펜클럽이나 국제신문인협회(IPU)에서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구명운동에 나설 때 정작 국내 펜클럽이나 언론단체는 침묵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무차별 종북몰이를 벌일 때도 진보를 자처했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했다.(보통 그들을 ‘입 진보’라 부른다)
“진보의 기회주의자에 대한 실망으로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이 4월혁명 직후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의 시를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다. 그때 김수영이 그 시를 발표했으면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는 훨씬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감방에서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반공 이데올로기와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던지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1·2절을 그대로 적어 냈다.”
-그 항소이유서를 보고 황교안 검사가 ‘영원히 콩밥 먹게 해주겠다’고 했던 것인가.
“변호사가 달려왔다. 당신 미쳤나. 내 항소이유서로 검찰뿐만 아니라 법원까지 발칵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말에는 같이 한 운동권에 대한 회의가 함축돼 있다.
“재판 중 자유실천문인협회가 ‘이산하 시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때 논의의 주제는 이산하를 시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회원도 아닌데 우리가 왜 입장을 발표해야 하나 등의 논쟁이었다고 한다. 문학의 본질적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회원이냐 아니냐를 논의했다.”(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1심에서 4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은 그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고, 국제펜클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돼 있었다. 당시 수잔 손택 국제펜클럽 회장이 직접 한국에 와 시인 김남주와 함께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겠다는 협박도 넣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항소심에서 1년 6개월을 받은 그를 특사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출소한 그는 다시 재야단체인 전민련 편집실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이 이부영·김근태·이태복·이인영·민병두·정봉주 등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4·3연구소와 함께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채록하면서 2년을 보냈다. 다시 서울로 온 그는 출판사와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에서 인권 대중지 <사람이 사람에게>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그때 편집위원이 유시민·한홍구 등이다. 1992년 현기영 소설가의 주례로 재야단체 민청련 선전국 후배와 결혼했다.
그는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영일이지만 바다가 안 보이는 깡촌으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부친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하지만 부친은 손재주가 좋아 마을에서 뭐든지 고치는 목수로, 또 인텔리로 통했다. 그는 “아버지는 북한에서 김책공대에 다니다 6·25때 인민군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포로수용소에서 남한에 남았다는 것을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알았다”고 말했다. 그랬다. 그의 원형질에는 부친에서부터 이어진 분단의 아픔이 ‘잔인하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늘 연장을 갈았다. 나는 옆에서 물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마지막 칼 끝을 햇볕에 비치며 ‘어떤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파랗다’고 대답했다. 칼을 잘 갈았을 때 칼날 끝이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나는 시를 쓰면서 시어에 그 푸른 기운이 비치는가를 스스로 자문하곤 한다. 그런데 한 번도 아버지가 간 칼끝의 푸른 색을 시어에서 그려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라산> 복원판 표지 / 노마드북 제공
<한라산> 복원판 표지 / 노마드북 제공
학생시절 전국 고교 문학상을 휩쓸어
그는 ‘허~허~’ 하고 웃었지만 약간 허(虛)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그의 원형질은 고교시절 발현되기 시작했다. 기자의 ‘어떻게 운동권 학생이 됐나’라는 질문에 그는 “고등학교 때 자주 가던 서점 점원이 ‘내가 추천하는 책 1권을 보면 네가 보고 싶은 문학책 2권을 빌려 주겠다’는 제안으로 사회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면서 “문학책을 마음껏 보고 싶어 제안에 응했는데 나중에 열심히 사회과학책을 읽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시절 이미 ‘주한미군 철수’를 주제로 시를 쓰기도 했다.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생각지 않았지만 전국 고교 문학상을 휩쓸었다. 이 문학상 수상 성적으로 1979년 대학(경희대) 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82년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로 등단했지만 문학보다 운동에 더 매진했다. 결국 그는 수배와 구속을 이어가다 1996년에야 겨우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현재 <문학뉴스> 편집위원, <유레카> 편집위원장과 진보 인터넷 매체인 <민플러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불심검문시대>와 소설집 <양철북>, 산사 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 <피었으므로 진다>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시를 번역한 <체 게바라 시집>을 내기도 했다.
제주 4·3사건은 이후 많은 재조사·연구를 통해 미국이나 좌·우 한쪽의 잘못을 특정하지 않고 단지 엄청난 국가 폭력이 자행됐다는 점만 확인했다. 진실규명보다 화해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서사시 <한라산> 마지막은 “천 년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단코/ 잊지도 말자”로 끝 맺는다.
지금도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적폐 두 가지 중 하나는 친일적폐요, 다른 하나는 미국적폐”라면서 “4·3사건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싹이 틀 때마다 싹을 자른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 대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나온 시집 후기에 “<한라산>은 내 비명이자, 통곡이다”라고 썼다. 그는 아직 4·3사건을 자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