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비판하지 말라 - 비판의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칙
본문: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요즘 세상은 그야말로 '초고속 재판 세상'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사진 한 장,
몇 초짜리 숏폼 영상 하나 보고는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인생을 판결해 버립니다.
인터넷 댓글 창은 이미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는 거대한 재판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이 차가운 재판정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도,
우리 집 안방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점입니다.
"저 집사는 왜 저렇게 봉사를 안 한대?", "저 권사님은 기도를 많이 한다면서 말이 왜 저래?"
우리는 너무나 쉽게 판사 가운을 입고 재판석에 앉아 버립니다.
우리는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를 야단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닙니다.
판단의 감옥에 갇혀 메말라가는 우리 영혼을 살리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음성을 통해 내 손에 든 돌을 내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비판은 하나님의 재판관 자리를 가로채는 죄입니다(누가복음 6장 37절 전반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여기서 '비판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크리노(κρίνω)'입니다.
이 말은 그냥 "저 행동은 좀 잘못된 것 같아"라고 분별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최종적으로 "너는 유죄야! 너는 끝났어!"라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왜 남을 비판하면 안 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의 '한 순간'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그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
어젯밤에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겉모습 한 조각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십니다.
성경을 보세요. 다윗은 순간적으로 끔찍한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판사였다면 다윗은 그날로 아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살인자였습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모두 탈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한순간으로 인생을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끝내 그들을 빚어내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가망 없어요. 내가 판결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보다 판단이 많아진 공동체는 차가운 얼음장처럼 변합니다.
비판은 처음엔 정의로워 보이지만, 결국 내 영혼의 긍휼을 갉아먹는 무서운 독약입니다.
요즘 부부 사이나 직장 동료 사이에서 "당신은 원래 그래", "그 사람은 절대 안 변해"라는 말을 얼마나 쉽게 합니까?
상대방의 변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금하신 '크리노'의 죄입니다.
"아, 내가 또 하나님의 재판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심판하고 있었구나."
"내 지혜는 불완전합니다. 나는 타인을 완벽하게 판단할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오늘 누군가의 허물이 보일 때, "그 인간 왜 저래?"라는 말이 나오려는 입술을 꼭 닫고,
"주님, 제가 모르는 저 사람의 아픔이 있겠지요"라며 판단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십시오.
비판은 인간이 하나님의 재판관 자리에 올라가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영적 교만입니다.
2. 비판의 칼날은 결국 나를 찌르는 부메랑이 됩니다(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영적인 우주의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정죄하지 않으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남에게 친절하게 해야 남도 나에게 친절하다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의 법칙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남을 향해 휘두른 그 칼날의 강도 그대로,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 던지는 비판의 돋보기는, 사실 고스란히 내 부끄러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남의 허물을 잘 찾아내는 사람은 사실 자기 안에 그 허물이 있기 때문에 더 잘 보는 것입니다.
남의 인색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가 인색하기 때문에 그것이 눈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던진 비판은 영적인 부메랑이 되어 내 가정으로, 내 자녀에게로,
그리고 가장 먼저 내 영혼의 심장으로 돌아와 나를 피 흘리게 만듭니다.
늘 남을 의심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평생 아무도 믿지 못하는 지옥 같은 불신의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이게 죄가 가진 무서운 부메랑의 법칙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타인을 헐뜯고 비판하는 말을 자주 하면, 그 자녀들은 기가 막히게 그 언어 습관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라나서 결국 자신의 부모를 향해 똑같은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우리가 던진 비판이 내 자녀를 통해 나에게 돌아오는 현상, 이것이 현실의 비극입니다.
"남의 눈 속의 티를 빼려고 소리칠 때, 내 눈 속에는 더 커다란 들보가 들어있었구나."
"내가 비판했던 그 부끄러운 모습이 사실은 내 안에도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인정합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싶을 때마다 "거울 보기"를 하십시오.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생각하고, 비판의 말을 회개의 기도로 바꾸어 보십시오.
남을 향해 무자비하게 던진 비판의 칼날은
영적 법칙에 따라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부메랑이 됩니다.
3. 복음은 정죄의 사슬을 풀고 용서로 우리를 살립니다(누가복음 6장 37절 후반부)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예수님은 "비판하지 마라"라는 금지 명령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복음은 언제나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 대안이 무엇입니까?
"용서하라."
여기서 '용서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폴뤼오(ἀπολύω)'입니다.
이 단어의 뜻이 아주 깊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를 "조건 없이 석방해 주다", "결박을 풀어서 자유롭게 가도록 놓아주다"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묶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인이었습니다.
내 힘과 내 공로는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아무 자격 없는 우리가 정죄함에서 풀려났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바로 그 엄청난 은혜, '오직 은혜'로 풀려난 죄수들입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먼저 풀려난 우리가, 아직 묶여서 버둥거리는 옆 사람을 보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손가락질하며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내려다보시며
"이 못된 놈들, 내가 반드시 복수하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들지만,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정죄하여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은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풀어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용서가 오늘 우리를 살렸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앙금을 품은 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내가 그 인간은 평생 용서 못 해."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을 감옥에 가두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을 미움의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아폴뤼오', 즉 놓아줄 때 비로소 내 영혼도 자유를 얻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억만 죄악을 탕감받은 자인데, 이웃의 작은 허물을 붙잡고 숨통을 조이고 있었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내 마음에 부어지기를 구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하게 했던 '그 사람'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마음으로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풀어주셨듯이, 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내 마음의 감옥에서 놓아줍니다(아폴뤼오)."
복음은 정죄의 재판관 자리에서 내려와,
십자가의 자비로 타인을 묶인 데서 풀어주는 용서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결론: 십자가 앞에 서면 비판할 힘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그 순간에는 묘한 도덕적 우월감이 생깁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 "나는 저런 실수는 안 해."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주는 가짜 평안이며,
내 영혼을 서서히 말라 죽게 하는 영적 나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재판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왕이신 하나님의 거대한 법정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극적으로 사면받은 '은혜 입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칠고 살기 등등한 비판의 재판정에서 내려와,
피 묻은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손에 꽉 쥐고 있던 돌맹이가 스르륵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괴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하시고 품어주셨는데,
내가 도대체 누구를 정죄하겠는가" 하는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처럼 잘잘못을 가려내어 사람을 매장하는 법정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로 인해 깨지고 멍든 영혼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품 안에서 고침을 받는 하늘나라 병원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넘어진 그 형제와 자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입술의 닫힘을 넘어 마음의 눈을 넓히십시오.
비난의 돋보기를 버리고, 주님의 마음이라는 안경을 쓰십시오.
판단하는 대신 그를 위해 무릎을 꿇으십시오.
비난의 부메랑이 아니라, 사랑과 축복의 부메랑을 던지십시오.
우리가 오늘 다시 결단하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닮아가고자 몸부림칠 때,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비판의 재판관 가운을 과감히 찢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옷을 입고 세상 속에서 자비를 유통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남을 향해 겨눈 비판의 칼날은, 반드시 내 영혼을 베고 돌아오는 부메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