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메타 타우타 에이돈 테사라스 앙겔루스 에스토타스 에피 타스 테사라스 고니아스 테스 게스, 크라툰타스 투스 테사라스 아네무스 테스 게스, 히나 메 프네에 아네모스 에피 테 스 게스, 메테 에피 테스 달라세스, 메테 에피 판 덴드론.
이 일들을 좇아서 나는 네 천사들이 그 땅의 그 네 모퉁이들 위에 선 것을 보았다. 그들 은 그 땅의 그 네 바람들을 굳게 잡아 그 땅 위에나 그 바다 위에나 모든 나무 위에 불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 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모든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선악세계의 해체와 생명세계의 도래
4장과 5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린양 안에서 동심원을 그려가며 네 생물들로, 스물 네 장로들로, 만만 천천의 천사들로 계시되었다. 그리고 6장에서 첫 사람의 우상의 세력은 네 말들과 그 위에 앉은 자들로 계시되었다. 이 계시를 좇아서 7장은 인침을 계시하고 있다.
첫 사람의 우상의 세계는 여섯째 인이 떼어지고 나서 해체되고 있다. 그 세상의 임금들과 큰 자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력자들과 모든 종들과 자유인들은 굴들과 바위들 안에 숨어든다. 이것은 첫 사람의 자기 믿음이 심판되는 그 자신의 모습이다. 에클레시아가 영의 눈으로 이 일을 ‘호라오’하지 못하면 선악지식을 좇아서 자기 아닌 다른 이들이 심판되는 줄 알고 기뻐한다.
에클레시아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 자기 믿음을 좇아서 우상들을 만들고 또 그것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심판인 동시에 구원이다. 자기의 우상들이 받은 심판을 은혜로 받은 자는 어린양 앞으로 나아오고 그것을 징벌로 받은 자는 굴이나 바위 속으로 숨어든다. 숨어든 후에라도 그들이 어린양의 부르심을 좇아서 거기에서 나와서 어린양에게로 오면 그들 또한 새 창조의 근원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다.
어린양이 인을 떼시는 것은 첫 사람의 선악세계를 해체하는 것이요, 어린양에게서 보냄을 받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것은 첫 사람의 세상이 해체된 에클레시아에게 둘째 사람의 생명의 나라, 곧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것이 지나가지 아니하면 새 것이 올 수 없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나라는 첫 사람으로부터 둘째 사람으로 유월한 자에게 임하여 온다. 그 둘째 사람은 자기 믿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거듭난 자이며 오늘 여기의 카이로스에서 부활의 실존을 이루는 자이다. 그 일을 위하여 천사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
기록된 바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 없다”(갈4:1) 하였다. 여기 인침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직 하나님의 아들의 풍성하고 온전한 실존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은 인침을 받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에 이르는 종임이 드러났고 또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온전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안에 임하여 올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종이란 노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사람을 말한다.
어린양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오게 하기 위하여 각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그의 피로 샀고 또 그들을 하나님을 향한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 이 왕들과 제사장들은 어린양을 본받아 하나님의 마음의 네 모양인 사랑과 생명과 거룩과 초월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세 시상(전부터 계셔 왔고, 지금도 계시고 오고 계신 이)을 좇아서 밤낮으로 스물 네 장로의 모양(4× 3× 2)을 이룬다. 이것은 알파다. 또 이들은 다시 영·육(속 사람과 겉 사람) 간에 소통하며(12× 12), 그 마음(10)을 다하고 혼(10)을 다하고 뜻(10)을 다하는 십일조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풍성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다. 144,000(12× 12× 10³)의 수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영(하늘)과 육(땅)이 하나된 하나님의 아들의 장엄한 실존이다. 이 실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 안에서만 이룰 수 있다.
네 천사들과 네 바람들
여섯째 인이 떼어진 후에 요한은 네 천사들과 네 바람들을 보았다. 이것은 여섯째 인이 떼어진 후라야 모든 에클레시아가 네 천사들이 네 바람들을 굳게 잡고 있는 것을 ‘호라오’하게 됨을 말한다. 이 일은 다섯째 인이 떼어질 때 제단 아래서 호소하던 그 혼들의 외침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일이기도 하다. 네 천사들이란 아버지께서 이미 에클레시아 안에 두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의 네 모양이요, 네 바람들이란 네 우상의 세력이다. 그 바람들은 에클레시아 안팎에서 불고 있다. 또 그 땅의 그 네 모퉁이들은 머리와 가슴과 배와 사지다. 즉 우상의 네 세력은 첫 사람의 온 몸에 바람(에너지)이 되어 있다.
생명의 천사는 육신의 정욕의 바람을, 사랑의 천사는 안목의 정욕의 바람을, 거룩의 천사는 이생의 자랑의 바람을, 초월의 천사는 선악지식의 바람을 붙들고 있다. 그 땅은 에클레시아의 몸이요 그 바다는 에클레시아의 생존이요, 모든 나무는 에클레시아의 지혜와 지식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천사의 인침이 없으면 에클레시아로 부름을 받은 자가 그 부름에 합당한 실존을 이룰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에클레시아의 속 사람은 땅에 붙어 오는 기복의 바람, 종말의 바람, 세상 권세의 바람을 붙들고 불지 못하게 할 믿음(의력)도 소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2 카이 에이돈 알론 앙겔론 아나바이논타 아포 아나톨레스 헬리우, 에콘타 스프라기다 데우 존토스, 카이 에크락센 포네 메갈레 토이스 테사르신 앙겔로이스, 호이스 에도데 아우토 이스 아디케사이 텐 겐 카이 텐 달라산,
또 나는 살아 있는 신 됨의 인을 가지고 해 오름으로 올라오고 있는 다른 천사를 보았다. 그는 그 땅과 그 바다를 해하도록 맡겨진 그 네 천사들에게 큰소리로 외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 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어린양의 형상을 본받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요 그 실존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사로서 계시된다. 그 천사는 신 됨의 해 오름을 사람들 안에 계시하고 있다. 거의 모든 번역 성경들이 ‘아포 아나톨레스 헬리우’를 ‘동쪽으로부터’ 또는 ‘해 돋는 쪽으로부터’라 하고 있다. 그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보는 동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좇아서 가슴을 설레인다. 그들은 말하기를 동쪽에서 인침이 시작된다 하였으니 바로 여기다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구의 지리적 동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초월의 빛이 해 오름처럼 떠오르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지구의 동쪽에 사는 많은 종말론자들이 이 동쪽에 미혹되어 자신들이 동쪽의 천사라 말하고 있다. 욕심과 선악지식의 눈에는 ‘동쪽’이란 말조차 그들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가 지구의 어느 쪽에 거하든지 간에 그 안에 어린양의 계시가 해가 떠오르는 것 같이 떠올라서 인침을 행하게 되었으면 그가 천사다.
에클레시아 중에는 네 천사들로부터 아무런 고난이나 해함을 당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기 믿음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는 반면 네 천사로부터 고난이나 해함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믿음을 떠나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유월하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우상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알파나 우상의 바람이 불게 하는 오메가는 에클레시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되게 하려 함이다.
3 레곤, 메-아디케세테 텐 겐, 메테 텐 달라산, 메테 타 덴드라, 아르키 스프라기소멘 투스 둘로스 투-데우 헤몬 에피 톤-메토톤- 아우톤.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그 종들의 그 이마들 위에 인치기까지 그 땅이나 그 바 다나 그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였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 라 하였다)
우상들의 바람에 의해서 해함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그 땅이요, 그 바다요 그 나무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땅과 바다와 나무가 아닌 것 위에는 우상들의 바람이 붙어서 그들을 해친다. 하나님의 종들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마음)에서와 같이 땅(몸)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실존이다. 이 기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온전히 하나 되는 때이다. 성소가 되어 있는 몸(땅)과 신령한 양식(바다)과 부활의 삶(나무)이 해를 당하지 않고 온전함을 이루는 때이다.
‘스프라기다 데우 존토스’ (살아 있는 신 됨의 인)
살아 있는 신 됨의 인이란 무엇인가. 이 말씀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새 창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프라기다’(인) 앞에도 ‘그’라는 관사가 없고 ‘데우’(신) 앞에도 ‘그’라는 관사가 없다. 헬라어 ‘데오스’는 ‘신’이라는 보통 명사이다. 그러므로 ‘호 데오스’는 하나님이요 데오스는 신이다. 그러므로 ‘스프라기다 데우 존 토스’는 ‘살아 있는 신의 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그 신의 그 말씀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사람을 신들이라 하셨다”(요10:35) 하였다. 즉 ‘호 로고스 투 데우’ (그 신의 그 말씀)가 하나님의 종들을 모노게네스가 되게 하는 일이다. 그 이마에 ‘살아 있는 신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신’(부활의 실존)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이 가진 모든 신 개념(神 개념)이 새로운 신 개념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을 알 수도 없고 그 실존을 이룰 수도 없다. 주께서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시고 천년을 하루 같이 참으시는 것은 이 거룩하고 장엄한 일 때문이다. 이 일만이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이다. 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신 됨의 은혜라’(고전15:10) 하였다.
이마
이마는 머리에 속해 있고 그 이마는 모두에게 잘 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 이마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고 다니는 것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므로 그 이마에 ‘살아 있는 신의 인’을 가진 자는 분명히 어린양에 속한 자요 그 이마에 짐승의 표를 가진 자는 짐승에 속한 자다. 어린양에게 속한 자의 정체성도 그 이마에 있고 우상에게 속한 자의 정체성도 그 이마에 있다.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호칭인 동시에 실존이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계속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들의 신관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신’이라 불리우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개념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어린양도 인간의 생각과 말과 개념에 갇혀 우상이 되고 만다.
4 카이 에쿠사 톤 아리드몬 톤 에스프라기스메논˙ 헤카톤 테세라콘타 테사레스 킬리아데 스, 에스프라기스메노이 에크 파세스 퓔레스 휘온 이스라엘˙
나는 인침을 받은 자들의 그 수를 들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 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6장 11절의 죽임을 당한 혼들이 소원이 이루어졌다. 요한은 왜 여기서 갑자기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말하게 된 것인가. 이스라엘은 모든 에클레시아를 가리켜 보이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전부터 징조로 있어 왔고 지금도 징조이며 오고 있는 징조이다. 요한은 혈통으로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영적으로도 이스라엘 사람이다. 요한은 겉과 속이, 육과 영이 하나 된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한은 자신을 통해서 첫 사람이 둘째 사람이 되는 새 창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다.
5장 8절과 9절과 10절에서 네 생물들과 스물 네 장로들은 새 노래를 불렀다. 어린양이 각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그의 피로 사람들을 샀으며 그들을 하나님을 향하여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 이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마음의 네(4)모양인 사랑과 생명과 거룩과 초월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세(3)시상(전부터 계셔 왔고, 지금도 계시며, 오고 계신 분)을 좇아서 밤낮(2)으로 스물 네 장로의 모양을 이루고(4× 3× 2) 있다. 또 이들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소통하며(12× 12) 그 마음(10)을 다하고 혼(10)을 다하고 뜻(10)을 다하여 십일조의 삶을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144,000(12× 12× 10³)의 풍성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루게 하신다.
기록된 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였다. 새 창조의 근원 안에서 온전함과 풍성함을 이룬 실존은 주와 함께 하루를 천년 같이 사는 존재다.
우리가 창조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그 카이로스의 하루는 둘째 사람의 영적 실존을 좇아서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돌면서 이루는 그 크로노스의 천년이나 만년이나 십만년이나 그 이상의 날을 넘어서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의 빛을 받은 때가 낮이요 그 전에 천지 만물이 지나온 크로노스의 날들은 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날은 카이로스의 하루다.
그러면 주께는 시간만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숫자 또한 그러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 한 사람의 풍성함은 144,000이요 그 온전함은 하나다. 이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그 온전함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요, 그 풍성함으로 말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144,000의 그룹에 속했다고 하는 이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데 각 그룹의 숫자를 합하면 이미 그 숫자는 144,000을 넘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룹마다 자기들만이 144,000이라 주장하니 그것이 곧 선악세계다. 그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사람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표면적(드러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감추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드러난 숫자가 숫자가 아니라 감추인 숫자가 숫자임도 알아야 할 것이다.
144,000은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풍성하고 온전한 영의 일이다. ‘나의 나 됨’을 이룬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드러내는 풍성함과 온전함이 144,000이다. 그러나 144,000 그룹이 행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아니하다. 하나님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로 거짓을 믿게 하신다.
한 사람의 세포의 숫자는 600조에 이른다. 그 모든 세포가 각각 존재하면서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이 144,000인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셀 수 없이 많은 만만 천천의 무리가 하나님 안에와 어린양 안에서 풍성하고 온전하게 역동하는 하나를 이루는 것이 새 창조다.
5 에크 퓔레스 유다,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스프라기스메노이˙ 에크 퓔레스 루벤, 도데카 킬리 아데스˙ 에크 퓔레스 갓, 도데카 킬리아데스˙
유다 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 르우벤 지파에서 일만 이천, 갓 지파에서 일 만 이천,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에크 퓔레스 아셰르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크 퓔레스 네프달림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 크 퓔레스 마나세, 도데카 킬리아데스˙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므낫세 지파에서 일만 이천,
(아셀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7 에크 퓔레스 쉬메온,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크 퓔레스 레비,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크 퓔레스 잇사가르 도데카 킬리아데스˙
시므온 지파에서 일만 이천, 레위 지파에서 일만 이천, 잇사갈 지파에서 일만 이천,
(시므온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8 에크 퓔레스 자불론, 도데카 킬리아데스˙ 에크 퓔레스 요세프, 도데카 킬리아데스˙에 크 퓔레스 베니아민 도데카 킬리아테스 에스프라기스메노이˙
스불론 지파에서 일만 이천, 요셉 지파에서 일만 이천, 벤야민 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자 가 일만 이천이었다.
(스불론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광야에서 세 지파씩 짝을 지어 행군하며 성막을 지켰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짝을 보면 그 때와는 달라져 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있어서는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며, 둘이 하나 된다. 열 두 지파 중 ‘단’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자가 없고‘에브라임’지파는‘요셉’지파라 불리운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부름을 받은 자 모두가 택함을 믿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다.
어린양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새 창조의 인침을 받지 아니하고 선악지식의 표를 받은 자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만 어린양의 신부다. ‘단’은 ‘심판자’란 의미다. 하나님은 에클레시아를 선악의 심판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악지식으로 받은 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선하다, 옳다 하고 다른 사람을 악하다, 그르다 하면서 심판한다. 선악지식으로 사는 자에게는 영과 생명의 인침이 오지 아니한다.
에브라임(풍성함)은 그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강성한 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자손을 쪼개어 북방 이스라엘을 이끄는 주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북방 이스라엘은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졌고 또 남방 유다를 괴롭히다가 유다보다 먼저 망해버렸다. 그리하여 에브라임 지파는 그 이름을 잃고 그 아버지의 이름인 요셉 지파로 대체되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다. 이것이 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이 있는데 에브라임과 같이 육체의 소욕을 좇는 둘째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다. 첫 사람의 선악지식과 둘째 사람의 우상 숭배는 인침에서 제외되었다. 우상 숭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9 메타 타우타 에이돈, 카이 이두, 오클로스 폴뤼스, 혼 아리드메사이 아우톤 우데이스 에 뒤나토, 에크 판토스 에드누스 카이 퓔론 카이 라온 카이 글로손, 에스토테스 에노피온 투 드로누 카이 에노피온 투 아르니우, 페리베블레메누스 스톨라스 류카스, 카이 포이니 케스 엔 타이스- 케르신- 아우톤˙
나는 이 일들을 좇아서 보았다. 보라, 모든 나라들과 종족들과 백성들과 방언들에서 아무 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들의 손들에 종료들을 들고 그 보좌 앞 과 그 어린양 앞에 서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종려는 번영과 승리를 말한다. 즉 영과 생명의 번영이요 승리다. 아무라도 셀 수 없는 근 무리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들의 손들에 종려들을 들고 있다. 그 수가 셀 수 없는 큰 무리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번영이요 그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었으니 그것은 선악의 세상을 이기고 아버지와 어린양에게서 받은 생명의 의다. 이 일은 오메가다. 알파는 에클레시아 안에 먼저 144.000의 풍성하고 온전한 실존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알파가 없으면 오메가도 없다. 알파가 있었을지라도 그 알파를 잃어버리면 오메가 또한 잃어버린다. 알파의 풍성함과 온전함은 오메가의 풍성함과 온전함(144,000× 144,000× …)을 이룬다.
10 카이 크라주신 포네 메갈레, 레곤테스, 헤 소테리아 토 데오 헤몬 토 카데메노 에피 토 드로노 카이 토 아르니오.
큰 소리를 외쳐 말하기를 “구원은 우리 하나님,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와 그 어린양에 게 있습니다” 하였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 니)
오늘날 우리 중 구원은 하나님과 어린양에 속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하며 구원을 자기 소유로 여긴다.
하나님과 어린양은 에클레시아를 구원하시고 에클레시아는 구원된다. 구원은 무슨 소유가 아니라 그들의 실존이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아버지와 구원될 아들들의 영과 생명의 관계성을 버리고 그들의 선악지식을 좇아서 그들의 소유로 바꾸었다.
구원을 소유한 자들은 구원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창조의 근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어지는 새 창조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관계도 없다. 그들은 구원이란 말을 소유하였을 뿐 그 구원의 실상은 알지도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에클레시아와 함께 하는 생명이요, 사랑이요, 거룩이요, 초월이다. 구원된 자가 소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 카이 판데스 호이 앙겔로이 에이스테케이산 퀴클로 투 드로누 카이 톤 프레스뷔테론 카 이 톤 테사론 조온, 카이 에페산 에노피온 투 드로누 에피 타 프로소파 아우톤, 카이 프 로스퀴네산 토 데오,
그러자 그 보좌와 그 장로들과 그 네 생물들을 둘러섰던 그 모든 천사들이 그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얼굴을 대고 하나님 께 경배하여)
12 레곤테스, 아멘˙ 헤 율로기아 카이 헤 독사 카이 헤 소피아 카이 헤 유카리스티아 카이 헤 티메 카이 헤 뒤나미스 카이 헤 이스퀴스 토-데오-헤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아멘.
말하기를 “아멘, 그 축복과 그 영광과 그 지혜와 그 감사와 그 존귀와 그 능력과 그 힘 을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돌리어라, 아멘” 하였다.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여기에 구원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관계성임이 잘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한 분 하나님의 마음의 네 모양이 스물 네 장로의 모양으로, 그 스물네 장로의 모양이 144,000의 모양으로 그 144,000의 모양이 만만과 천천의 모양으로 풍성하고 온전하게 펴져 나간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일인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일이다. 그 풍성함으로 보면 셀 수 없이 큰 무리요 그 온전함으로 보면 하나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함과 같이 한 사람 안에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있고 큰 무리 안에 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새 창조의 축복이요, 영광이요, 지혜요, 감사요, 존귀요, 능력이요 힘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5장 12절에서는 만만 천천의 천사들은 어린양에게 그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축복을 드렸다. 이는 그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구원될 것을 찬양함이다. 여기서는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께 그 축복과 그 영광과 그 지혜와 그 감사와 그 존귀와 그 능력과 그 힘을 드리고 있다. 어린양에게 드려진 찬송은 알파요, 아버지께 드려진 찬송은 오메가다.
구원을 예언하는 만만 천천의 천사들의 찬양에서는 구원하시는 어린양의 능력이 먼저요, 셀 수 없이 큰 무리는 구원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므로 축복이 먼저다. 이와 같이 찬송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어서 처음 것이 나중 되고 나중 것이 먼저 되어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
13 카이 아페크리테 헤이스 에크 톤 프레스뷔테론, 레곤 모이, 후토이 호이 페리베블레메노 이 타스 스톨라스 타스 류카스, 티네스 에이신 카이 포덴 엘돈;
그 때 장로들 중의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말하기를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들은 누구이 며 또 어디서 왔느냐” 하였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은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 뇨)
장로들 중 하나가 셀 수 없이 큰 무리의 찬송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면서 요한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하나님은 모든 에클레시아에게 ‘너희는 누구냐’라는 존재적 질문을 하신다. 또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하시며 너희의 너희 됨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느냐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느냐 질문은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는 첫 사람만이 하는 질문이다. 둘째 사람은 그런 질문은 어리석고 아무 쓸데 없는 질문 인 것을 안다. ‘나의 나 됨’이 소유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위로부터 난자는 소유에서 존재로 유월된 자이다. 에클레시아는 세상이 소유적 질문으로 다가올 때 존재적 답변을 하는 자이다.
14 카이 에이레카 아우토, 퀴리에 무, 쉬 오이다스. 카이 에이펜 모이, 후토이 에이신 호이 에르코메노이 에크 테스 들리프세오스 테스 메갈레스, 카이 에플뤼난 타스-스톨라스-아 우톤 카이 엘류카난 아우타스 엔 토 하이마티 투 아르니우.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하였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들 은 그 큰 고난으로부터 나오는 자들인데 그 어린양의 그 피에 그들의 두루마기를 빨았고 또 그것들을 희게 하였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라이다.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 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10:33) 하였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첫 사람의 욕심(어머니)과 선악지식(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부인된 욕심과 선악지식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나를 좇는 것은 내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곧 내 안에 ‘나’로 오신 그 속 사람을 겉 사람인 내가 좇으며 ‘나의 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에클레시아가 알파의 크로노스를 좇아서 그 자신과 하나 되어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곧 그의 우상들을 부인하고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큰 고난이 아닐 수 없다. 에클레시아는 그 고난을 안과 밖에서 함께 겪는다. 이 고난 속에서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실존으로 지어진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 속에서 그들의 자녀를 단련하여 영의 실존으로 지으신다. 셀 수 없이 큰 무리는 육신의 첫 사람에 속한 임금들과 큰 자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력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들 중에서 구원된 자들이다. 그들이 숨어들었던 굴과 바위 속에서 어린양에게로 나와서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린양을 좇는 그 고난의 풀무 안에서 새롭게 지어졌다. 그러므로 144,000은 구원된 실존의 알파요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오메가다.
기록된 바 “오직 그 거룩한 영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요 또 너희는 예루살렘 안에서 그리고 그 온 유다와 사마리아 안에서 그리고 그 땅의 끝까지 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행 1:7) 하였다.
알파의 때에는 모두가 이 말씀을 문자대로 읽고 온 세상에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는데 힘썼다. 아직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메가의 때에는 예수의 이름을 받은 모든 사람 이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존이 이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 안에서 모든 에클레시아가 온전하게 지음을 받아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게 된다.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그 어린양의 피에 그들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자기 부인이요, 희게 하는 것은 부인된 우상들을 자기 십자가에 못 박고 오늘 여기서 날마다 부활을 맞는 일이다. 오메가의 때의 모든 에클레시아는 예루살렘과 유다는 속 사람의 영역이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겉 사람의 영역임을 알고 ‘나의 나 됨’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15 디아 투토 에이신 에노피온 투 드로누 투 데우, 카이 라트류우신 아우토 헤메라스 카이 뉙토스 엔 토-나오 아우투˙ 카이 호 카데메노스 에피 투 드로누 스케노세이 에프 아우 투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그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그 성전에서 낮과 밤에 그를 섬긴 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 좌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스라엘 자손들이 종살이 하던 애굽의 고난에서 나와서 야웨 하나님께 속한 의의 백성이 된 것 같이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우상들을 섬기며 종노릇하던 그 고난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또 그의 성전에서 새 창조의 날들의 낮과 밤에 그를 섬긴다. 그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으로 지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위에 새 창조를 이루시는 생명과 사망과 거룩과 초월의 장막(하늘)을 치실 것이다. 이와 같이 144,000의 실존을 이룬 이들에게 드러났던 하늘이 셀 수 없이 큰 무리에게도 드러날 것이다. 이 일은 셀 수 없이 큰 무리의 일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된 바 “하나님의 나라는 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가져다 숨겨서 전부가 부풀게 된 누룩과 같다”(눅 13:21) 하였다. 한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144,000의 실존은 누룩과 같아서 그와 소통하는 많은 사람에게로 생명과 거룩과 초월이 퍼져나가게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누룩과 같고 이스라엘은 부풀어 오른 가루 서 말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을 이룬 모든 에클레시아는 가루 서 말과 같고 어린양은 누룩과 같다. 속 사람은 누룩과 같고 겉 사람은 가루와 같다.
16 우-페이나수신 에티, 우데 디프세수신 에티, 우데 메 페세 에프 아우투스 호 헬리오스, 우데 판 카우마˙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 해나 모든 뜨거운 열기가 그들 위 에 내려쬐지도 아니할 것이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기록된 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되니 만족케 되리라” 하였고 또 인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기도한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에 굶주리고 목마르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나라는 그에게 임하여 오지 않는다. 그의 나라가 임해 오고 또 어린양이 그들을 인도하시면 그들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서 우상들을 섬기던 자에게 사랑과 생명의 빛이신 어린양(해)으로부터 빛이 비취어 오거나, 그를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사랑과 생명의 열기가 다가오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고난을 당한 것 같이 처음에는 그들 모두가 고난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참고 견디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이다.
17 호티 토 아르니온 토 아나 메손 투 드로누 포이마네이 아우투스, 카이 호데게세이 아우 투스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카이 엑사레이프세이 호 데오스 판 다크룬 에크-톤- 옾달몬- 아우톤.
왜냐하면 그 보좌 가운데에 계신 그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그들을 생명수의 샘들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들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 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로라)
어린양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에게 줄 그 물은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하였다.
이사야는 야웨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나의 주 야웨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땅에서 제하시리라. 야웨께서 이 같이 말씀하셨다”(사25:8)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