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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수(安光洙)
죽헌(竹軒) 안광수(安光洙)
字 聖魯 號 竹軒
父 折衝將軍 安道挺(절충장군 안도정)
자제들의 교육에 전념한 安光洙 -安光洙傳-보만재집(保晚齋集)
안광수(安光洙)
1710년(숙종 36)∼1765년(영조 41). 조선 후기 교육자.
자는 성노(聖魯)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출신지는 서울 반촌(泮村)이다.
부친은 안도정(安道挺)이다.
서울 반촌은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노릇을 하고, 인색한 자는 작은 이익을 다투어 예교(禮敎)가 드문지라 반촌의 자제들 중 총명하고 준수한 자 70여 명을 선발하여 학계(學契)를 만들고, ‘제업문회(齊業文會)’라 이름 하였다. 또 자질의 고하(高下)에 따라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전수하고,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로써 실천하게 하고, 손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도표와 그림으로 그려 쉽게 이해하고 깨우치도록 하였으며, 매월 학업 능력에 따라 포벌(褒罰)로써 관장하자 반촌 자제들이 의관을 갖춰 입고 흥기하였다. 후에 관례(冠禮)를 치룬 자들이 서사전리(胥史典吏)가 되어 국학(國學)의 중함을 알게 되었다.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나자 반촌의 노소(老小)할 것 없이 슬퍼하며 상례를 치렀고, 기일(忌日)·생일(生日)·명절 때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기를 10여 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국역승정원일기)본문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5)12월 20일(임자, 양력 1월 29일)
안광수(安光洙), 엄주승(嚴柱承), 김택종(金宅宗), 윤강렬(尹綱烈), 이상만(李相晩),
이영달(李永達), 김호림(金鎬林)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中樞院議官 光武六年一月三十一日 金曜
陞從二品 正三品 安光洙 年七十二
安光洙傳
安光洙字聖魯。自號竹軒。順興人。父折衝將軍道挺。自其先流入國學之泮村。寄居焉。泮村者。高麗末文成公安裕捐家僮百餘口。佐國家興學。及本朝定鼎漢陽。徙國學則僮之子孫已數千人。環泮水家之。巷陌雞犬。儼然一井。故人稱爲泮村也。其子弟生長。不出泮村外。有齋事。擊鼓羣嘂。引諸生揖。朝夕服役于齋。習聞讀書聲。往往誦傳句語。故諺數耳熟。目昧者。曰齋直句。言其無實得也。比丱角。剛者博奕任俠。嗇者又逐逐於末利。鮮能率禮敎。光洙慨然曰。太學首善之地而俗如是。可乎。倡子弟之聰悟者七十餘人。爲之契而名曰齊業文會。隨其材高下。各授經史子傳。以事親敬長之道。蚤夜誨廸。冠昏喪祭。手自圖式。令民易曉。使毋越程朱之儀則。每月朔。悉聚其徒。課業能否。褒責以勸戒之。於是泮村子弟多興起率服。光洙卽曰。業貴優遊。不然。氣象迫窄。去風雩詠歸之趣遠矣。良辰選勝。與其徒酣觴賦詩。聯爲累百篇。意寄悠遠。由是其徒成材者甚衆。旣壯而冠。爲胥史爲典僕。皆知敬廟宇謹釋菜。各率職無闕也。然光洙不徒以言爲敎而已。亦能反諸身而立之本。居喪疏食三年。晨昏哭泣。雖甚病不廢。其他行事多可紀。長國子者聞其風。往往賚與以奬之。光洙生以庚寅。圽以乙酉。泮村之人。無老少。哀號如撤其幈幪。自喪至葬。執役無敢後。忌日生朝四時之節。嘗受業者爲具羞助祭。十餘年如一也。及是父老相與謀曰。吾泮之少者知敬老。老者不負戴。安先生力也。昔鄕先生沒則祭於社。若安先生。豈但使其受業者祭之而已乎。遂相與捐財致祭於光洙。謁余而道其事。余聞古有外史氏。凡民間異聞。謹書之于策。余曾任太學士。太學士。古之外史也。職宜書。於是乎書。
外史氏曰。昔周大司徒之職。五家爲比。五比爲閭。四閭爲族。五族爲黨。五黨爲州。五州爲鄕。相保相受相賓。先之以德行。申之以文藝。三代聖王厚風俗廣治化者。無他焉。鄕州黨族閭比。皆立之師。以敎其文藝德行而已。後世此法旣廢。士以學自命者。各以其道。敎授於鄕里。猶有周官之遺意焉。今亦未之見矣。若光洙無乃聞其風而興者歟。嗟夫。使光洙之法。自黨而州而鄕而遍焉。吾知人材之作成也有日矣。豈謂古法不可行於今哉。
保晩齋集卷第九보만재집(保晚齋集) 達城徐命膺君受著 雜著 서명응(徐命膺)
里鄕見聞錄
泮村(반촌)-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의 사역인들이 거주하던 성균관 동·서편에 있던 동네. ‘반중(泮中)’·‘관동(館洞)’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일대이다.
安光洙
安光洙字聖魯自號竹軒自其先流入國學之泮村寄居焉泮村之俗剛者博奕任俠嗇者又逐逐於末
利鮮能率禮敎光洙慨然曰太學首善之地而俗如是可乎倡子弟之聰悟者七十餘人爲之契而名曰齊業文會隨其材高下各授經史子傳以事親敬長之道蚤夜誨迪冠昏喪祭手自圖式令民易曉使毋越程朱之儀則每月朔悉聚其徒課業能否褒責以勸戒之於是泮村子弟多興起率服光洙卽曰業貴優遊不然氣象迫窄去風雩詠歸之趣遠矣良辰選勝與其徒酣觴賦詩聯爲累百篇意寄悠遠由是成材者甚衆旣壯而冠爲胥史爲典僕皆知敬廟宇謹釋菜各率職無闕也然光洙不徒以言爲敎而已亦
能反諸身而立之本居喪疏食三年晨昏哭泣雖甚病不廢其他行事多可紀長國子者聞其風往往賚與以奬之光洙歿泮村人無老少哀號如撤其帲幪自喪至葬執役無敢後忌日生朝四時之節嘗受業者爲具羞助祭十餘年如一也及是父老相與謀曰吾泮之少者知敬老老者不負戴安先生力也 昔鄕 先生 沒則祭於社若安先生豈但使其受業者祭之而已乎遂相與捐財致祭於光洙[주:保晩齋集]서명 : 熙朝軼事v1
(肅宗朝)安光洙
字聖魯自號竹軒泮村之俗剛者博奕任俠嗇者又逐逐於末利鮮能率禮敎光洙慨然曰太學首 善之地而俗如是可乎倡子弟之聰悟者七十餘人爲之契而名曰齊業文會隨其材高下各授經史子傳以事親 敬長之道蚤夜誨迪冠昏喪祭手自圖式令民易曉使毋越程朱之儀則每月朔悉聚其徒課業能否褒責以勸戒之於是泮村子弟多 興起率服光洙卽曰業貴優遊不然氣象迫窄去風雩詠歸之趣遠矣良辰選勝與其徒酣觴賦詩聯爲累百篇意寄悠遠由是成材者甚衆旣壯而冠爲胥吏爲典僕皆知敬釋菜名率職無闕也[주:保晚齋集]서명 : 國朝人物志v3
答安光洙○己卯
尊書數月未報謙固知罪矣雖然以謙衰病無氣力其勢何能每書必答哉知我深者或在可恕且尊書中所問非固有疑於心而問也心合理氣自退陶已來已有定說不可變也足下旣知其然斯已矣又何必張皇其說似若爲設疑然者而俯問於如謙之無所識知者哉此謙之所以難於其答也抑又有一言焉足下其聽之夫所謂合理氣豈獨心也哉凡物皆然性理也而氣質亦性也情者性之發也而有四端之理七情之氣然而古未有言性也情也之合理氣而獨以合理氣言心是必有其故矣而謙實未知且朱子言心或有專以理言者如曰心爲太極曰心者天理在人之全體是也或有專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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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言者如曰心者氣之精爽曰心比性微有跡是也此言又何謂也此皆謙之所有疑於心者幸足下明以敎之秋凉萬萬以時自愛
晦峯先生遺書卷之十六 書
원서명 희조일사熙朝軼事 이경민(조선) 편李慶民(朝鮮) 編
1866년(高宗 3)에 李慶民(1814-1883)이 仁祖朝 이후의 여러 文集 속에서 正史에 오르지도 못하고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孝友忠義로서 이름이 있는 자, 文學, 書, 畵, 琴, 碁, 醫, 卜에 능한 자, 女子로서 孝烈 등이 卓絶한 자들에 관한 기록을 뽑아 편한 책
目錄. 卷上:韓舜繼, 劉希慶, 鄭潤, 金昌國, 朴泰星, 洪次奇, 金重鎭, 金益春, 尹明相, 宋奎輝, 白大鵬, 文紀房, 鄭六同, 金忠烈, 朴義, 金禹錫, 李亨翼, 吳孝誠, 姜孝元, 田滿車, 李震華, 安龍福, 崔老, 洪世泰, 高斗杓, 安光洙, 林俊元, 李得元, 高時彦, 金萬最, 鄭來僑, 鄭後僑, 白胤耈, 韓以亨, 李夢鯉, 崔天翼, 朴永錫, 李最선, 金泳. 卷下:石希璞, 李彦塡, 李亶佃, 千壽慶, 金洛瑞, 張混, 王太, 趙秀三, 鄭民秀, 朴允黙, 李至和, 金弘遠, 鄭芝潤, 李壽長, 嚴漢朋, 曺匡振, 金嗚國, 秦再奚, 金弘道, 崔北, 林凞之, 田琦, 白光炫, 趙光一, 李益成, 庾纘洪, 金鍾遺, 金聖基, 劉雲台, 曺生, 廉時道, 金壽彭, 庾世通, 申斗柄, 文金生員, 吳孝婦, 翠梅, 安峽孝婦, 金家母, 高節婦, 嚴烈婦, 河節婦, 李孝女, 蓮紅, 抄撮群書目錄.
서명응이 전기를 쓴 안광수(安光洙, 1710~1765)
안광수 역시 반촌 사람이다. 다만 안광수가 순수한 반인(泮人)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안향과 같은 성씨인 순흥(順興) 안씨라는 것, 그리고 서명응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무반직(武班職)을 가졌고(정3품 절충장군이었다. 물론 이것은 보잘것없는 무반의 품계다), 또 그의 선조가 반촌에 흘러들어와 살았다(寄居)고 했으니, 원래 반촌의 토박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의 행적을 보면 글깨나 읽은 지식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광수는 “태학은 수선지지(首善之地)인데, 풍속이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라면서 자제들 중 똑똑한 사람 70여 명을 불러모아 제업문회(齊業文會)란 이름의 계를 만들었다. 말이 계지 이것은 학교였다. 그 학생들의 능력에 맞추어 경사자전(經史子傳)을 가르치고, 사친(事親) 경장(敬長)의 도리를 일깨웠다. 이뿐이랴. 관혼상제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그것을 가르쳤다.
안광수는 유능한 교육자였다. 그는 여유를 갖고 살아야 기상이 좁아지지 않는다면서 맑은 날,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학생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또 상을 당하자 소식(疏食)으로 삼년을 지내고, 주야의 곡읍을 비록 병이 심하게 나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고 하니, 그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해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촌의 자제들이 감화되어 그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안광수전(安光洙傳)’(‘保晩齋集’ 9권)에 반촌의 유래와 반촌 주민에 관한 소상한 언급이 나온다.
반촌은 고려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자기 집안의 노비 100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를 부흥할 것을 도운 데서 비롯된다. 본조(朝鮮)가 한양에 정도(定都)하여 국학(國學)을 옮기자, 노비 자손이 수천명이 되어 반수(泮水)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거리와 골목, 닭울음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엄연히 하나의 동리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泮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자손들은 생장하면 반촌 밖을 나서지 않는다. … 총각이 되면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하며, 인색한 자는 말리(末利, 상업)를 좇아 예교(禮敎)를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안유는 곧 안향(安珦, 1243~1306)이다.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성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유학의 진흥을 위해 충렬왕 30년(1304년) 5월 관료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성균관의 섬학전(贍學錢)을 조성하고, 이 돈의 일부를 중국의 강남에 보내 경전과 역사서 등을 수입하였던 바, 이로 인해 성균관의 교육 분위기는 일신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다음 달인 6월에 성균관의 대성전이 완성되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는 고려말기 성균관의 부활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노비를 성균관에 기증했다 하여 이상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특수방언 사용한 반인
또한 남자들이 사치스러운 복색과 호협한 기질,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여러 문헌이 증언하고 있다. 이 폭력성을 순화시키기 위한 움직임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서명응이 전기를 쓴 안광수(安光洙, 1710~65)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광수 역시 반촌 사람이다. 다만 안광수가 순수한 반인(泮人)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안향과 같은 성씨인 순흥(順興) 안씨라는 것, 그리고 서명응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무반직(武班職)을 가졌고(정3품 절충장군이었다. 물론 이것은 보잘것없는 무반의 품계다), 또 그의 선조가 반촌에 흘러들어와 살았다(寄居)고 했으니, 원래 반촌의 토박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의 행적을 보면 글깨나 읽은 지식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광수는 “태학은 수선지지(首善之地)인데, 풍속이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라면서 자제들 중 똑똑한 사람 70여 명을 불러모아 제업문회(齊業文會)란 이름의 계를 만들었다. 말이 계지 이것은 학교였다. 그 학생들의 능력에 맞추어 경사자전(經史子傳)을 가르치고, 사친(事親) 경장(敬長)의 도리를 일깨웠다. 이뿐이랴. 관혼상제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그것을 가르쳤다.
안광수는 유능한 교육자였다. 그는 여유를 갖고 살아야 기상이 좁아지지 않는다면서 맑은 날,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학생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또 상을 당하자 소식(疏食)으로 삼년을 지내고, 주야의 곡읍을 비록 병이 심하게 나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고 하니, 그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해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촌의 자제들이 감화되어 그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안광수의 제자들은 성균관의 서리가 되고 수복이 되었던 바, 그들은 모두 성균관의 업무에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었던 것이다. 안광수가 죽자 반촌 사람들은 그의 제자건 아니건 남자건 여자건 애통해하면서 그의 장례를 도왔다. 또 제자들은 그를 기념하여 기일 생일 사시의 절기마다 제수를 마련해 제사를 도왔다고 한다.
安道挺(안도연)ㅡㅡㅡ>安光洙(안광수)
折衝將軍
(절충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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