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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구간 탐사 - 여섯 번째.
2월 4일, 맑음. 따뜻함.
오늘의 미션은, 첫째 장계면과 계북면을 잇는 쇠빗재[所非峙] 옛길을 찾아내고, 둘째 계북에서 무주 안성면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실제로 답사한 후 장수구간의 탐사활동을 마감하는 것이다.
노선 설계를 위한 탐사활동이 이렇게 일찍 끝나도 되는 걸까?
즉, “불과 여섯 번 들러본 후 노선을 확정할 수 있을까? 아무리 「초벌구이」격의 활동이라 하더라도…”라는 자기검열적 반성이다.
그런데,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진안-무주-장수의 순으로 넓으므로 ‘무진장’을 두르는 길 역시 장수군을 통과하는 구간이 가장 짧을 수밖에 없다.
또, 여행자의 대중교통수단 이용 편의를 위하여 버스 터미널이 있는 읍·면소재지를 경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도 하므로 이 부분도 고민의 대상이었다.
장수군 최남단의 산서·번암 두 면소재지를 경유하는 것을 포기하면 동선이 비교적 깔끔해지므로 우선 그렇게 획정하기로 하였다. 사실 ‘진안고원길’은 11개 읍면소재지를 모두 경유하고 있지만 ‘무진장고원길’로 확장함에 따라 진안군의 동쪽 구역은 삭제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기도 하다.
노선을 확정하여 발표하기 전까지는 수정과 조정이 있을 수 있으며 확정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변수에 따른 변경 또한 가능한 것이므로, 초기부터 ‘완벽한’ 노선설계에 시간을 지나치게 소모하지 않기로 하고 있음도 이 기회에 밝힌다.
또, 가시적인 성과를 일부라도 향유하기 위하여 올(2020년) 여름부터 무진장고원길 전체노선 이어걷기 시범활동을 시작하려고 3개 지자체와 협의가 진행 중에 있기도 하므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 그래서 초기단계 마지막이 될 장수구간 답사를 시작.
오늘의 팀 구성은 진안에서 세 명(정병귀, 정인호 조성팀장, 최태영), 장수에서 한 명(장기윤 선생) 그렇게 네 명이다. 천천면 사무소에서 만나 차 한 대로 움직였다.
오동리~명덕리.
지난번에 논개생가가 있는 주촌마을을 벗어나 장계면 오동리를 지나 명덕리로 갔었는데, 오늘은 실제로 걸을 루트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오동리 뒤쪽을 거쳐 옛길을 따라 움직였다. 이 루트가 무진장고원길의 경로가 될 것이다.
오동리와 명덕리 사이의 아주 작은 고갯길을 올라 뒤돌아 내려다보면 농업용수로가 보인다. 이 수로는 대곡호(오동저수지)에서 뽑아온 물을 농경지로 보내는 수로다.
정면으로는 짧은 숲길 건너편으로 남덕유산의 흰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보인다.
고개를 내려서자마자 오른쪽(동쪽) 편으로 성처럼 높게 쌓은 경주마들의 훈련장, 그 옆을 지나면 이미 명덕리의 들판이다.
(성벽 같은 경주마 훈련 트랙.)
원명덕마을의 시가지는 넓다. 들판 자체가 넓은 터이기도 하고, 육십령을 넘어온 여행자들이 머무르곤 하던 곳이라 번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명덕리 전체가 넓고 양지바른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았다. 그런데도 마을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안길은 좁고 꼬불거리며 집들은 작고 좁다. 곡식을 생산하는 들판을 집터로 파먹지 않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듯.
마을회관, 마사고등학교, 보건진료소 등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육십령로(26번 국도)를 가로질러 평지마을로 들어선다. 이 산골에서 얼마나 들판이 넓어보였으면 마을 이름이 평지일까.
명덕리의 유명한 마을숲은 꼭 봐야 하는데 ‘명덕수퍼’ 앞 육십령로 찻길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끝난 다음에 다시 답사해서 미세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원명덕마을 당산 부근)
(회관에서 정자로 연결되는 구름다리. 휠체어가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첫 번째 미션.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옛 쇠빗재 길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쓰지 않은 지 오래된 길은 묻히게 마련인데, 그런 소극적 원인에 그치지 않고 농경지로 개간하거나 요즘 극성이다시피 만연하는 태양광발전시설 등으로 지형과 용도마저 바꾸는 적극적 원인이 겹쳐, 도무지 길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된 것이다. 특히 계북면으로 향하는 갈래 길은 작은 등성이와 골짜기 몇 개를 연달아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던 모양으로, 한 번 올라갔다가 한 번 내려가면 되는 일반적인 고갯길과는 달랐다. 과연 옛 지도에 험애(險隘, 험난한 고개)로 소개되어 있던 연유가 수긍되는 길이었다. 몇 번이나 가시밭길을 헤치며 고생을 했어도 확실하게 ‘이곳이었다’고 할 만한 루트를 찾지 못했다.
더구나 사유지를 통과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옛길을 확실하게 찾아냈다면 세밀한 탐사과정을 의기양양 보고했겠지만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면목 없다.
평지, 양지, 동명, 지보촌…을 쭉 거쳐 소비재로(743번 지방도) 정상의 터널(사실은 야생동물 이동통로 아래) 앞에서 차를 내렸다. 이 찻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걷는길의 의미가 퇴색하므로 여기서부터는 오른쪽으로 난 임도(농로?)를 타고 산길을 걷기 위해서다.
그러잖아도 이미 평지마을에서 이 지점까지 5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줄곧 포장된 길로만 걸어오게 될 여행자들에게 계속하여 찻길을 걷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도 하므로. 고도차이도 4백미터에 가깝다.
마침, 이미 운영하지 않게 된 기존 ‘백두대간길’의 통과지점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당시에 조성해 둔 원두막 쉼터가 남아있다.
찻길 오른쪽 임도로 접어들어 잠시 시멘트 포장구간을 걷자 곧 흙길이 나타난다.
초입에서는 길이 잘 남아있는 줄 알고 기뻐했으나, 얼마 걷지 않아 길은 사라지고 펜스로 둘러쳐진 개인소유의 밭이 나타난다. 펜스 바깥의 급한 비탈을 겨우겨우 통과하여 지나가보지만 다시 등성이가 나타나고 그 너머의 상황을 알기 어렵다.
가파른 등성이를 넘자 길이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의 농토를 태양광발전소로 변경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땅을 온통 파뒤집어 놓았다.
아까 보았던 ‘백두대간길’ 안내말뚝이 뽑힌 채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이 맞긴 한 모양인데 도무지 걷기 힘들게 되었다.
쓰지 않는 길은 이렇듯 사라진다.
아무리 과거에 사람들이 다니던 「관행로」였다 하더라도 자동차가 주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아 버린 이 시대에 와서는 옛길을 보전할 필요나 가치를 느끼지 않게까지 된 것 같다.
게다가 인접 농가의 욕심이나 토지주의 이기심까지 가세하면 옛길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안내말뚝을 뽑아버리거나 길이었던 곳까지 점령하여 경작지를 넓혀도 이쪽은 대항할 힘도 근거도 없다. 이래서 걷는길의 보전에 관한 법률적 조치가 시급하다는 것.
“공사는 언젠가 끝날 테고 현장이 정리되면 다시 답사하여 다소 우회하는 루트를 조성하면 된다”고 자위하면서 힘들게 통과.
곧 다시 시멘트 포장의 농로(옛 고갯길 구간?)가 나타난다. 이 좋은 길은 얼마 걷지 않아 다시 743지방도(소비재로 찻길)와 만나게 되는데, 만나는 지점이 묘하다.
물가에 커다란 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정자를 이루고 샘물도 솟고 있어 세 갈래 길의 교차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順)한 방향으로 찻길을 따라 편하게 내려가면 계북면 농소리 연동마을로 향하고, 오른쪽(동북쪽)으로 급하게 꺾인 길을 택하면 우리의 목표지점인 계북면 소재지 어전리(문성마을)를 향하게 된다. 왜 면소재지로 가야 할까? 구간의 시·종점으로 주차공간이나 대중교통 편의를 얻기 위해서다.
(주황색 : 우리가 가야할 길, 연두색 : 연동마을 방향.)
이 삼거리 정자나무 아래는 원래가 주막이었을 것이므로 탐사팀도 잠깐 짐을 벗어놓고 쉬었다.
정자나무 아래에는 주막 대신 탁자와 의자 따위가 설치되어 있고 어전리 문성마을 방향을 가리키는 '백두대간길' 안내말뚝도 여전하여 우리가 찾는 길목이 맞다는 것은 알겠는데…
또 얼마나 걷기 힘든 구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문성마을 방향 길의 초입은 ‘돼지골 뜨란’이라는 이름의 펜션이 차지하고 있다. 걷는 여행자를 거절하면 통과할 수 없는 것.
다행히 관리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탐사팀은 별 저항 없이 지나갈 수 있었으나, 앞으로 이 사유지의 주인과 협의할 일이 숙제로 남았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사과밭 옆길을 가볍게 걸었으나 목적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점에서 길이 사라진 것. 가시덤불은 말할 것도 없고 우거진 잡목숲에 갇혀 얼마나 헤맸는지.
전지가위를 들고 앞장선 정 국장을 뒤따라 움직이긴 하지만 전지가위 정도로는 어림없는 가시나무 숲이 사정없이 점퍼를 쥐어뜯고 얼굴과 눈을 위협한다.
나중에 보니 장기윤 선생은 오른쪽 뺨에 긁힌 상처가 생겨 있었고, 나도 머리에 가시덤불이 덮여 두피가 따끔거렸다. 삼거리 정자에서 직선거리로는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걷는데 40분이나 걸린 것.
악전고투 끝에 문성마을 골짜기의 남쪽 길에 내려서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다.
마을의 한 사과밭 어귀에 또 하나의 ‘백두대간길’ 쉼터 원두막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이곳으로 빠져나온 것은 제대로 오기는 한 모양이다. 도중에 길이 없어져 버려서 그렇지.
허탈하기도 하고 시장기도 돌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8월부터 시작할 이어걷기 시범 때는 찻길(소비재로) 일부와 새로 낸 임도 일부를 섞어 걷는 것으로 하고, 옛길 찾아내기 작업은 추후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하기로 잠정 결론.
산길에서 도중에 삼거리로 되돌아가 차를 몰고 이곳에 먼저 와서 기다리던 정인호군과 함께 차를 타고 점심 먹으러 계북면 소재지로 나가다.
그러나 면소재지(어전리 느랏골)를 그냥 통과하여, 계북면의 최북단이자 장수 구간의 최북단이자 동시에 무주군 안성면과 진안군 동향면 세 군(郡)의 접점이 되는 원촌리까지 달려가 옛날순두부집에서 먹기로 했다.
-이삭줍기-
소비재 탐사 첫날(2019년 12월 10일) 지부천 마을에서 만나 남덕유산 등성이 ‘참샘’의 존재를 이야기해 주던 여성주민을 이번에도 만났다. 아니, 만났다기보다, 그가 산다는 ‘수도장 같은 곳’ 앞까지 가서 먼발치에서 보았다. 그가 ‘지부천’이라 부르던 그 마을은 알고 보니 ‘지보촌紙保村’이었음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지명총람은 “전에 종이를 뜨던 지소가 있어 그렇게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이 지명의 전와(轉訛)는 현지주민들의 무지 또는 잘못된 발음습관의 영향도 크다.
계북면 원촌리
세 군의 접점이 되는 삼거리인 만큼 여행객의 편의시설인 완경원(翫景院)이 있었다. 어디쯤이었을까 궁금하여 잠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딱히 이곳이었다고 할 만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다.
두 번째 미션.
점심 후에는 계북~안성 사이 루트를 역방향(안성→계북)으로 움직이며 답사했다.
이미 고개를 넘어온 평야지역이니 힘들 일은 없고, 오래되고 큰 마을들을 들러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양악리는 옛 지도에 양악소(陽岳所)라는 소(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무엇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선, 양악리 당저마을.
깜짝 놀랐다. 당저(堂底, 댕밑)라는 마을 이름에 확실히 부합하는 어마어마한 당산이 있다.
이런 당산은 처음 본다.
돌로 당산 부지 전체를 두르는 담을 쌓았고, 그 담 안의 거대한 당산나무 아래 작은 돌담이 또 있다. 흔히 당산목 아래에 함께 있는 돌무더기나 선돌 같은 모뉴멘트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작은 돌담 안에서는 어떤 공동체 행위를 했었을까. 이를테면, 짐승을 잡아 수호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제의?
산기슭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큰 규모의 마을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런 공동체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까. 매우 희귀하게 보는 형태의 당산이다. 옛 이야기를 좀 들어보았으면 좋겠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도 하고 전래의 행사를 복원도 하고 하면 좋겠다.
(고속도로 덕유산휴게소.)
당산에서 북쪽을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잘 보이고, 동네 안을 이리저리 누비며 흐르는 수로(水路)가 고가도로처럼 달리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농업용수는 마을 뒤쪽 양악호에서 끌어오는 물이다. 어쩌면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똘(또랑)이 마을 안까지 내려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가도로 아닌 고가수로는 최근에도 새는 곳을 보수한 흔적이 있는 등 여전히 현역 농업기반자산으로 활약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 뒤로는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덕유산휴게소’건물이 빤히 올려다 보이고 있다.
다음, 양악마을.
당저 뒤를 빠져 대전-통영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산기슭길을 남서쪽으로 돌면 양악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양악리의 중심이 되는 큰 마을.
애국지사이자 한글학자 정인승(健齋 鄭寅承)선생이 이 마을에서 났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의 둥근 지붕이 바로 발 아래 있다.
고속도로 옆으로도 농업용수로가 이어지고 있고 비교적 새로운 시설인 것으로 보아, 고속도로가 생길 무렵 또는 양악호 댐을 쌓을 무렵에 기존의 똘(봇도랑)을 모두 현대식 시멘트 수로로 바꾼 것은 아닐까?
양악천을 따라 양악호 둑아래까지 오르면 용연정과 양악탑이 있다.
이곳도 매우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시커먼 암반 위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도 같은 계류수.
댐으로 수몰될 뻔한 것을 정자(용연정) 옆으로 옮겨 놓았다는 작고 소박한, 그러나 오래된 탑.
정자도 오래 되었다. 각종 기문(記文)이 빽빽이 처마 아래를 장식하고 있는데 글자를 거의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자보다 약간 더 높은 언덕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바위 하나가 삐죽이 목을 내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금줄을 두르고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역력하다.
인간의 상식 안에 담을 수 없는 기기묘묘한 자연물에 대한 경외심이 신앙심으로 연결되는 생생한 현장이랄까.
이 일대는 반드시 걷는길 구간에 포함시켜야겠다고 4인 탐사대의 의견이 일치.
이곳은 우리 '진안고원길' 회원들이 여름마다 몇 번씩 하는 계곡트레킹 모임 때 이미 두어 차례 다녀갔던 토옥동계곡 입구에 해당한다. 차로 토옥동 입구까지 한 달음에 올라가버리곤 하여 그 아래쪽에 이렇게 훌륭한 곳이 있는 줄 몰랐던 것.
그런데 무진장고원길의 걷는 경로에 양악마을은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 원촌리 파곡.
이 마을은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 파를 巴(꼬리, 뱀)로도 芭(파초)로도 쓰는데 뱀골 또는 꼬리골이라 부르는 것이 듣기에 더 나았을까? 아니면 파초실로 부르는 것이 더 나았을까?
느슨한 산비탈 경사의 북쪽을 앞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네 안은 매우 깔끔하고 길도 넓고 크다. 집집이 돌담을 잘 둘러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파산밖(밧)골’이 양악마을 동쪽에 있었다고 전한다. 토옥동계곡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말함일 것이다. 지금 그 자리는 양악저수지가 되었으니, 어쩌면 댐을 지으면서 옛 파산밖골이 수몰되어 지금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 바로 이 파파실마을이 아닐까? 그래서 시골마을답지 않게 거리와 집들이 깔끔한 것은 아닐까?
‘파밭실’이 파파곡으로 한자화되었을 것으로도 추측해본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곳에 아주 그럴 듯한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 우리가 양악에서 뒷길로 들어와서 그렇지 원래 이 마을의 입구는 이곳이었던 듯.
어전리 문성마을.
파곡을 빠져나와 들판 가운데를 뚫는 농로길을 한참 달려 남하하면 어전리 문성마을로 올라가는 골짜기다.
쇠빗재 옛길을 찾다가 진이 다 빠진 바로 그 ‘이 갈리는’ 목표지점 마을.
삿갓봉 아래 넓은 골짜기를 널찍널찍하게 차지한 마을은 매우 풍요로워 보인다.
마을 입구에서 걸어서 올라가며 마을을 구경한다.
정인호 팀장은 차를 몰고 한 발 먼저 마을회관 앞에 가 있었는데, 동네 이장이 붙잡고 여러 이야기를 하더란다.
(문성마을 정자. 정자이름판에 웬 봉황무늬?)
(마을 뒤 높은 곳에 있는 당골저수지.)
마을 뒤로 계속 올라가면 남덕유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아는 형님'이 살고 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 출타 중이라며 삼십 분만 기다리라 한다.
비교적 젊은 이장이 인호군 외에 추가로 찾아온 우리 세 명을 보고 굳이 들어오라 하므로, 마을회관에 들어가 주민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낸다.
욕심에는 소비재 옛길을 좀 물어보고 싶었으나 왠지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고 화제를 급히 딴 데로 자꾸만 바꾸는 통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미 시각이 4시가 가까웠다.
나의 저녁 일정이 기다리고 있어 이쯤에서 오늘의 활동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급히 돌아오고 있는 형님에게 전화해서 “그냥 가노라, 미안하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마…”
문성마을에서 거의 직선으로 면소재지 ‘느랏마을’로 내려오면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모두 있는 등 매우 번화한 시가지를 가진 계북면 소재지.
어전(於田)리라는 이름은 느라(니라·느릇·느릅)나무에서 유래한 유전(楡田)이 변하여 된 이름이다. 진안 동향면의 외유·내유마을이나 백운면의 대유마을 모두 바깥니랏골, 안니랏골, 큰니랏골 등으로 불렸듯이. 느릇(릅)나무는 그 즙이 끈적끈적 잘 늘러 붙는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늘의 두 번째 미션인 안성면까지 잇[繼]는 일을 마감했어야 하는데…
이럴 때 흔히 하는 말, “오늘만 날인가?”
결국 어설프게 걷고 숙제만 잔뜩 안고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이런 날은 피로도가 급상승한다.
(최태영)
첫댓글 솔깃한 글들이네요, 시간 될때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계북에 이장님들 구면이라서 협조 구할일도 수월할것 같은데 다음에 시간맞으면 동행했으면 합니다.
당저마을에서 휴게소로 진입하는 길에 남방식고인돌 3기가 있는데 휴게소가 생기면서 풍광이 좀 아쉽습니다
그리고 양악마을도 할말이 많은데
양악소는 과거에 옥사도 있었고 역참의 역할도 했던 곳이라 들었습니다
염색공장도 있었다 하고 삼거리에는 장이 섰다고 합니다
건너편 진안 방면 길로 들어가면 같은 마을이 무주진안장수 행정구역이 달라지는 을곡마을이 있습니다
양악마을은 대규모토목 공사 대전통영고속도로와 양악댐이 거의 망쳐놨다고 볼수 있죠
고속도로는 주민들이 소음에 시달리고
양악댐은 토옥동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절반을 삼켜버렸습니다
계곡에서 월성재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이 있는데 거창 사선대로
사선대로 이어지는 고대 주요 교통로입니다
곽장근교수님은 사신로였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아름다운 길인데 언젠가 거창 사선대까지 걸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