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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軍威) 김 길 수
여행을 끝내고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군위(軍威)로의 문학기행도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여행이었다고 해야겠다. 늦더위도 이제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9월초, 연제문학회원님들의 문학기행지로 선정된 곳이 ‘경주석굴암보다 오래된 석굴과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인각(麟角)사라는 사찰이 있는’ 경북 군위(軍威)라는 이야기에 약간의 호기심은 일었으나, 결국 그렇고 그런 농촌이겠지! 했었다. 거기에다 중앙선 열차를 타고 지나가 본 것 외는 그야말로 아는 게 별로 없는 곳인데다, 지도상의 위치로 보아 팔공산 북쪽자락에 위치한 작은 고장으로 뭐 하나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우리나라 여느 농촌과 다를 것 하나 없는 곳쯤으로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또한 그러했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산천(山川)의 모습이야 나의 선입견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9월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초순인지라, 여름기운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들판과 산골짜기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지형지세가 내겐 너무도 평범했다. 심지어 경주석굴암의 모태가 되었다는 삼존석굴로 들어가는 동네입구에서 옥수수, 호박, 나물 등등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인상마저도 너무 익숙해 보였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유야 쉽게 짐작하시리라! 농촌에서 살아본 사람이라야 농촌을 잘 알듯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이 바로 이곳이나 별반 다름없는 경남 서부의 농촌인 탓이다. 하기야 대한민국 농촌풍경치고 서로 닮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만. 그런데 삼존석굴을 관람하기 위해 극락교(極樂橋)를 건너는 순간부터 나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기보다는, 애초부터 전적으로 나의 과문(寡聞)의 탓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보수중이라며 가까운 접근을 막은 탓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국보 제109호인 삼존석불은, 경주석굴암보다 100여년이나 앞서 조성 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암이라고 한다. 먼저 만들어졌는데도 왜 제 2석굴암이라고 부를까? 아마도 먼저 만들어지긴 했지만 뒤늦게, 1927년에야 발견된 연유로 두 번째 석굴암이 된 게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나로서는, 후일 경주석굴암의 모태가 되었다는 삼존석굴의 존재사실도,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사실도,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정말 몰랐으니까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으니 느낌조차 없었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거기다가 군위가 ‘삼국유사의 고장’이라는 사실이, 주민들의 삶속에 이처럼 깊이 녹아있음을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곳곳에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알리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고 해마다 전국적인 규모로 ‘삼국유사 마라톤대회’ ‘삼국유사 골든 벨 퀴즈대회’ 등이 개최되고, 읍에는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 ‘삼국유사도서관’ 등이 세워져 있는 것만 봐도, 삼국유사가 이 고장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인각(麟角)사에서도 삼국유사의 완성과 더불어 100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는 일연스님의 업적이며 행적, 그리고 인각사에 남아있는 비문들에 대한 해설로 채워졌다. 곁들여 일연스님의 업적중 하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마지막 감수자였다는 주장이 거의 사실이라는 설명까지 듣다보니, 한 사람의 치열했던 삶이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후손들에게 전승되고 회자될 수 있구나! 하는 게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울 따름이다. 만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민족의 주체성이나 정통성은 어디서 정립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화본역으로 이동했다. 삼존석굴과 삼국유사가 천년이전의 역사를 보여주었다면, 화본(花本)역은 우리의 근대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일제가 1936년에 만들었다는 화본역은 하루 3회씩 상 • 하행 기차가 서는 간이역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기차타고 휙 지나는 보았지만 내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전국의 철도마니아들이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정말 작고, 아담하고, 예쁜, 그야말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역이었다.
증기기관차를 위한 급수탑이 70년 이상의 풍상을 안은 채 그대로 서 있었고, 열차를 개조한 카페 트레인도 만들어져 여행객이 쉬어가는 공간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이웃에 폐교를 이용하여 옛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라는 간판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박물관도 있었다. 하루의 기행을 마쳐가는 시간. 문득 그 한적하고 외진 지역의 이름이 하필 왜 군위(軍威)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명으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군(軍)자가 왜 들어갔을까? 유래를 찾아보았더니 고려건국이전의 삼국시대 말기에는 이곳이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단다. 후백제의 견훤으로부터 왕건을 살리고자 여덟 명의 장수가 목숨을 바친 곳이라는 데서 팔공산(八公山)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듯, 왕건이 이곳을 지나면서 군인들의 위세가 당당한 모습을 보고는 군위(軍威)라고 이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더 볼 것이 많아지고, 아쉬움 또한 더 커지는 고장임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적 ‧ 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명승고적이나 사찰들이야 물론이고, 이에 못지않게 천년의 전통을 자랑한다는 한밤마을의 돌담길이나, 이 길을 넘나드는 삽상한 바람마저도 주민들의 자랑거리가 아닐까! 그야말로 자연과 역사를 배우며 힐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고장이 아닌가 싶다. 하루일정으로는 넘칠 만치 많은 걸 보고 배웠다는 느낌이 든 기행이었다. 겨우 표피만 보고도 이러한데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얼마나 보고 느낄 게 많겠는가! 당초 계획했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가방문을 못한 게 다소 아쉽다.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가 볼만하고, 또 쉽게 가볼 수 있는 고장이기에, 그때로 미루고 귀가 길을 서둘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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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본역 많이 지나친역이네요...,.청량리행...
잘 앍었습니다.
시간나면 사진여행 한 번 가야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