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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4강
지난 시간까지 부처님 경전의 전승과정과 주석서의 생성 배경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경전 공부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필요한 내용을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빨리어(Pāli語)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입니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서민들의 언어인 빨리어(Pāli語)는 현재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뜻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빨리어(Pāli語)를 통해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어 그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빨리어(Pāli語)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를 주석서와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석서와 경전을 같이 읽으면 느낌이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총론을 말씀하셔서 그 깊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라한 스님들께서 주석서로 설명해주셔서 구도자들의 이해를 돕는 매우 유익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주석서가 없었다면 가르침의 뜻이 변질되어 지금과 같이 바른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1주제(S1) 천신 상윳따(Devatā-saṃyutta)
제1장 갈대 품(Naḷa-vagga)
폭류경(S1:1)(Ogha-sutta)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띠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 삔디깟사 아라메”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경전을 시작하는 이 작은 문장 하나에서도 공부해야할 내용이 매우 많습니다.
제1장 갈대 품은 빨리어(Pāli語)로 나라 왁가(Naḷa-vagga)입니다. 나라(Naḷa)는 갈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왁가(vagga)는 무리, 경전에서 사용하는 장(章), 절(節), 품(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갈대라고 하는 나라(Naḷa)는 갈대처럼 여러 가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1장 나라 왁가(Naḷa-vagga)는 총 10개의 품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오가(ogha)는 거친 물살이 흘러간다는 뜻의 폭류(瀑流)를 말합니다. 오가(ogha)는 경전에 많이 나오는 단어로 윤회를 뜻합니다. 우리는 다음 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면서 이것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오가(ogha)는 흐른다는 뜻과 내려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때 위에서 밑으로 내려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가(ogha)는 윤회의 거친 물살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윤회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감각적 욕망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서 괴로움을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오가(ogha)는 연기가 회전하여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거센 물결을 폭류로 비유한 것입니다. 윤회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은 거듭되는 윤회가 끝나 파도가 미치지 않는 해안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이때의 해안을 열반을 얻어서 피안(彼岸)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피안(到彼岸)입니다. 이러한 거센 물결은 감각적 쾌락의 거센 물결인 욕류(欲流)가 있고, 생성의 거센 물결인 유류(有流)가 있고, 견해의 거센 물결인 견류(見流)가 있고, 무지의 거센 물결인 무명류(無明流)가 있습니다.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뜻입니다.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은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말하는 엄숙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은 중요한 문구입니다. 특히 아난다 존자가 1차 경전결집을 할 때부터 암송하기 시작한 문장입니다. 부처님 시대는 기록하는 시대가 아니고 듣고 암송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 문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말씀이다’는 뜻을 직접 말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이 없으면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이에 대해 ‘오직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다. 이 말이 없으면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는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이라는 말이 없고 경전에만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이 나옵니다.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뜻이지만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의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와 ‘부처님 말씀이다’는 뜻의 붓다와짜나(buddhavacana)의 두 가지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아난다 존자께서 결집 때 많은 스님들 앞에서 말씀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처럼 아난다 존자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문장은 아난다 존자의 말이 아니고 오직 부처님한테 들은 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빨리어로 말한 에왕 메 수땅(Evaṃ me sutaṃ)이라는 뜻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문장은 후대에 만들어진 경전에서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단지 관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me)는 아항(ahaṃ)과 같은 뜻으로 나, 우리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나’는 아난다(Ānanda) 존자를 말합니다. 아난다(Ānanda) 존자는 부처님의 첫째 사촌동생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25안거동안 부처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과 나이가 같으며 또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간 가르침을 펴셨는데 처음 20년 동안에는 부처님의 시중을 드는 정해진 비구가 없이 여러 비구가 돌아가면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 뒤에 아난다 존자는 21년째 되는 해부터 25년 동안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까지 전적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펴신 지 21년째 되는 해에 이제는 시중을 드는 시자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제자들이 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상가(saṇgha, 僧伽) 회의를 통해 아난다 존자를 천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아난다 존자에게 시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난다 존자는 이 요청을 즉각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밝힙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내가 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부처님이 나에게 요청하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요청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시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시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난다 존자는 무조건 승낙하지 않고 다시 부처님께 시자가 되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이 수락될 때 시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가 내세운 조건은 여덟 가지였습니다. 처음 네 가지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음 네 가지는 ‘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거부하는 것’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시자라는 이유로 아난다에게 어떤 가사도 주지 말 것.
둘째, 시자라는 이유로 부처님께서 공양 받으신 좋은 음식을 주지 말 것.
셋째, 부처님의 향기가 나는 방에 머물게 하거나 아난다가 독방을 갖지 않도록 할 것.
넷째,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공양을 올리겠다고 할 때 아난다를 그 초대에 포함시키지 말 것. 이상이 아난다 존자가 요구하는 네 가지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러한 관계 때문에 어떤 물질적 혜택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네 가지 ‘원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난다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어떤 초대도 수락할 권리를 갖는다. 만약, 아난다 존자가 초대를 수락하면 부처님께서는 초대를 받은 장소에 가셔야 한다.
둘째, 멀리서 온 신심이 있는 불자를 어느 때나 부처님께 데려올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셋째, 어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부처님께 이 사실을 알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만약, 아난다가 어떤 것에 대하여 의구심이 생기면 부처님께 가서 의구심을 풀어주기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 즉,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하시도록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넷째,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없을 때 말씀하신 법문은 아난다에게 반복해서 말씀해주셔야 한다.
이상 네 가지가 ‘원하는 것’ 이지만 이 중에 네 번째 요구사항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말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의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승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이러한 조건이 승인 된 뒤에 비로소 부처님의 시중을 드는 개인 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가 없을 때 하신 법문을 어떤 내용에 상관없이 모두 아난다 존자에게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난다 존자는 자기가 시봉하지 않던 20년과 시봉한 25년의 가르침을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역대의 부처님은 모두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뛰어난 시자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아난다 존자도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담마(Abhidhamma, 論藏)의 법집론 주석서에서는 아난다 존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야말로 넓은 경험을 하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장, 율장, 논장이라는 삼장(三藏)을 공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곤충과 꽃을 수집하듯이 쉽게 일만 오천 절 또는 육천 피트 길이의 글을 서서 배우고, 암송하고, 설법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한번 서있는 동안 그분은 배우고, 암송하고, 설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그분께서 행한 해설의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부처님 외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었고 또는 가르침으로 명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난다 존자께서는 경전 원문의 낱말들 하나하나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다문(多聞) 제일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처럼 아난다 존자는 빠르고 예리한 지성을 갖춘 제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마하 까사빠(Mahā Kassapa) 존자가 500명의 아라한을 소집해서 제 1차 경전결집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께서 ‘이렇게 나는 들었다’는 암송을 하는 것으로 경전결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경전결집대회에서 아난다 존자가 암송하는 역할을 맡아서 불법을 체계화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석서에 다음의 게송이 나옵니다.
위나사야띠 아사담
Vināsayati asaddham
의심을 없애버린다.
사담 와데띠 사사네
saddham vaddheti sāsane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을 계발한다.
에왕 메 수따밋쩨왐
evaṃ me sutaṃiccevam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와담 고따마 사와꼬
vadam gotama sāvako
부처님의 제자
이상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나사야띠(vināsayati)는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아사담( asaddham)은 믿음이라는 뜻의 삿다(saddhā)의 반대로 의심을 뜻합니다. 여기서 앞에 붙은 ‘a’는 빨리어에서 부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나사야띠 아사담(Vināsayati asaddham)은 ‘의심을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사담 왓데띠(saddham vaddheti)에서 왓데띠(vaddheti)는 계발한다, 신심을 계발한다는 뜻이고 사사나(sāsane)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담 왓데띠 사사나 (saddham vaddheti sāsane)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을 계발 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에왕 메 수따밋쩨왐(evaṃ me sutaṃiccevmvam)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를 주석하고 있습니다. 와담 고따마 사와꼬(vadam gotama sāvako)의 고따마 사와꼬(gotama sāvako)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사부대중을 말합니다. 에-왕(evaṃ)에서 e는 장음입니다. 그래서 길게 발음합니다.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띠양 위하라띠(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는 한때 세존께서는 사와티 제타 숲에서 머무셨다는 뜻입니다.
에깡 사마양(ekaṃ samayaṃ)은 한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때라고 말하는 에깡 사마양(ekaṃ samayaṃ)은 어느 때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설법이 어느 때 설하셨는지를 아난다 존자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기를 뛰어넘어 간결하게 한때라고만 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어느 장소는 말했지만 어느 시기를 말하지 않은 것은 시기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경전결집을 해서 경전인 니까야(Nikāya)를 구성할 때 시기별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묶어서 엮은 니까야(Nikāya)는 가르침의 종류에 따라 분류를 해서 어느 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뿐더러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처음부터 완성한 내용이라서 어느 때가 의미가 없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 하신 법문보다 나중에 하신 법문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자주 나오는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마양(samayaṃ) 때, 시간, 모였다.
에깡 사마양(ekaṃ samayaṃ) 한때
뿟바나(pubbanha samayaṃ) 아침 때
맛디야나(maddhiyāna samayaṃ) 오후 때
사야나 사마양(sāyanha samayaṃ) 저녁 때
우나사마요 빠리라하사마요(unhasamayo parilāhasamayo) 여름은 괴로운 계절이다
따스민 사마예(tasmin samaye) 그 시대
떼나 사마예나(tena samayena) 그 시대에서
바가와(bhagavā) 세존, 부처님의 9가지 공덕 중 하나
여기서 사마요(samayo)는 ‘계절’을 말합니다. 우나사마요(unhasamayo)는 ‘여름계절’이고, 빠리라하(parilāha)는 ‘괴로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나사마요 빠리라하사마요(unhasamayo parilāhasamayo)는 ‘여름은 괴로운 계절이다’라는 뜻입니다.
따스민 사마예(tasmin samaye)는 ‘그 시대’ 이고, 떼나 사마예나(tena samayena) ‘그 시대에서’입니다. 에깡 사마양(ekaṃ samayaṃ)은 한때고 바가와(bhagavā)는 세존입니다. 바가와(bhagavā)는 높은 분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자이나교에서도 바가와(bhagavā)를 사용했습니다. 세존이라는 뜻의 바가와(bhagavā)는 경전에서 거룩하신 스승이신 부처님에 대한 칭호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바가와띠 와짜낭 셋탐
bhagavāti vacanaṃ settham
세존이라는 단어는 최고라는 단어다.
바가와띠 와짜나뭇땀망
bhgavāti vacanamuttamaṃ
세존이라는 단어는 최상의 단어다.
가루가라와윳뚜 소 바가와 떼나 웃짜띠
garugāravayuttoo so bhagavā tena uccati
존중과 존경에 적당한 그분을 세존이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불수념(佛隨念)이 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관찰수행인데 여기서 부처님을 얘기할 때 바가와(bhagavā)를 사용합니다. 주석서에 바가와띠 와짜낭 셋탐(bhagavāti vacanaṃ settham)은 세존이라는 단어는 최고의 단어이다, 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세존이라는 단어는 최상의 단어이다, 라는 뜻은 가루가라와윳뚜 소 바가와 떼나 웃짜띠(garugāravayuttoo so bhagavā tena uccati)입니다. 가루가라와윳뚜(garugāravayuttoo)에서 가루가라와(garugārava)는 존중이고, 윳뚜(yuttoo)는 적당한 이라는 뜻입니다. 소(so)는 그래서입니다. 가루가라와윳뚜 소 바가와 떼나 웃짜띠(garugāravayuttoo so bhagava tena uccati)는 ‘존중과 존경에 적당한 그분을 세존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또 청정도론에 바가와(bhagava)는 윤회를 토한 사람, 윤회를 종식 시킨 분으로 나타납니다. 밧뜨와 완따가마노(bhattvā vantagamano)는 윤회를 종식시킨 분,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입니다.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는 부처님께 수행 처인 제따와나(Jetavana)를 보시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25년 동안의 안거를 제따와나(Jetavana)를 중심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전들이 제따와나(Jetavana)를 중심으로 설해졌습니다. 폭류경과 행복경도 제따와나(Jetavana)에서 설하셨습니다.
아나타(anātha)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는 사람, 집이 없고, 지켜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는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 등의 뜻입니다. 삔디까(piṇḍika)는 무료급식소를 하는 사람이며, 삔디(pinḍi)는 밥입니다. 그래서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는 사람입니다.
거부장자였던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는 죽을 때 많은 보시를 해서 완전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나타 삔디까는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보시하는 마음이 똑 같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나타 삔디까는 승가에서 최초의 신도 회장이었습니다. 최초의 여성 신도 회장은 위사카(Visākhā)입니다.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는 제따와나 수행처(Jetavane Vihara)를 보시했는데 지금 돈으로 천만 억에 해당하는 금으로 제따와나 선원의 땅을 사서 보시했습니다. 이러한 보시는 후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빠릿짜가(pariccaga)는 후원의 뜻으로 보시와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빠릿짜가(pariccaga)는 내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거나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보시를 빨리어로 다나(dāna)라고 합니다. 보시는 신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나따 삔디까는 땅 주인인 왕자에게 제따와나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이때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왕자가 땅에 금을 깔면 팔겠다고 했습니다. 아나타 삔디까(Anātha piṇḍika)는 실제로 땅에 금을 깔았습니다. 물론 땅 전체에 모두 금을 깔지는 못해서 부족했지만 이러한 정성에 감복한 왕자는 땅을 파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비구들은 탁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민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제따와나(Jetavana) 숲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비구들의 수행 처로 매우 적합했던 곳이었습니다.
사왓티양(sāvatthiyaṃ)에서 사왓티(sāvatthi)는 부처님 당시 꼬살라(Kosala) 국의 수도였습니다. 사왓티(sāvatthi)를 한역(漢譯)으로 사위성(舍衛城)이라고 하는데 현재 네팔의 국경지대에 있습니다. 제따와나(Jetavane)는 제따(Jeta)는 원래 이 땅을 소유하고 있던 꼬살라 국의 태자 이름입니다. 그리고 와나(vane)는 숲, 삼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따와나(Jetavane)는 제따 숲이라는 뜻입니다.
위하라띠(viharati)는 머무른다, 거주한다, 산다, 지낸다는 뜻입니다. 임시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걷고, 앉고, 자고, 먹고 살면서 지낸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또 위하라(vihāra(m.)는 머무름, 사찰, 부처님 계시는 대웅전(大雄殿)의 뜻을 지닌 명사입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위대한 영웅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비구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경전의 처음에 나오는 문장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띠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 삔디깟사 아라메”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 참고 >
(질문 1) 오까사(okāsa)와 오가(ogha)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변) 오까사(okāsa)는 말을 들을 만 하신 분, 존경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가(ogha)는 윤회,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빨리어로 아와하나(avahana)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도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가라앉기 때문이고 집착 자체가 번뇌입니다. 여기서 오가(ogha)는 윤회라는 뜻으로 주석서에 나와 있습니다.
(질문 2) 오가(ogha)에 번뇌, 흐름이라는 뜻도 있나요?
(답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 때문에 윤회한다는 의미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가(ogah)는 기본적으로 윤회, 폭류, 흐름을 뜻합니다. 역시 오가(ogha)는 윤회라는 뜻으로 주석서에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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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sādhu sādhu sādhu.
시작을 알 수 없는 전생의 공덕으로 담마끼띠스님의 법문과 선생님의 해설을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담마끼띠 스님의 법문 외에 제가 보충한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보충한 부분이 잘못된 내용일 때는 추후에 교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