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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날리기(4)
-불총을 쏘는 아이
김다호
초등 2학년까지 일본에서 살다 온 승대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말을 거리낌 없이 잘하지만 우리말은 무척 더듬거린다. 가끔은 뒷북치는 말로 우리 반 아이들을 자지러지게 웃길 때도 있었다.
선생님을 쎈세이라고 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치더라도 나를 [짬시 오야붕]이라 불러 무시무시한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로 착각하도록 서슴없이 불렀고 어려운 표현과 이해정도가 아직은 서툴러 우리가 무슨 일로 재미나게 웃다가 요청에 의해 한참을 설명해 주면 그때서야 배꼽이 터지라 혼자 웃는 것을 우린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녀석의 행동자체가 우스워 따라 웃을 때도 있다.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민아파트 건너 고급아파트에 사는 승대 아버진 재일교포다. 일본에서 큰 사업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온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승대 어머니는 철우 어머니처럼 금은보화로 화려한 몸치장을 하지는 않지만 내연관계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어머니와 비교하면 예쁘고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는 것 같지만 어둔 그림자가 얼굴 한 구석에 늘 어려 있었다. 승대에 대한 사랑은 표현 그대로 지극정성 이었지만 언제나 이웃을 경계했다. 방문객을 싫어했고 대부분 현관문을 잠근 상태에서 인터폰으로 의사전달을 했다.
이웃의 방문도 사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습관적으로 회피했다. 나는 승대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입이 허용되었고 특별대우에 귀빈에 가까운 접대를 받고 있으며, 어쩌다 귀가가 늦을 때는 우리 집에 직접 전화해 부모들을 안심시켜 주는 배려와 집까지 데려다주는 과잉친절도 베풀었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우리 어머니와 승대 어머니가 잠시 복도나 계단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시종일관 터프하고 가식 없는 웃음소리와 차분하고 만들어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화음이 되지 않고 물과 모래처럼 흩어져 날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승대네 집에 자주 들러보는 것은 물론 승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앞집에 사는 나영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특활시간도 그 아이 때문에 옮겼다 어머니의 권유로 들어간 영어 회화반에서 나영이가 있는 공작반으로 옮기는데 도와주신 담임선생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머니는 줄곧 영어 회화반에 다니는 줄 알지만 나는 오로지 나영이를 만나려고 반을 옮겼다. 물론 선생님한테는 반을 옮겨주면 후일에 에디슨처럼 훌륭한 발명가가 되겠다고 뻥을 쳤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보면 꼼짝없이 온몸이 얼어붙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천하의 쩜시가 말이다.....
승대네 집으로 가면서 늘 나영이를 마주칠 수 있다는 막연한 설렘과 신기한 장난감을 구경한다는 기대감으로 포만한 가슴을 안고 간다. 그 녀석의 집에는 언제나 최신형 일제 장난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방안 가득 들어찬 장난감 중에는 미처 포장을 풀어보지도 않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많았고 포장을 푸는 일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다 그 녀석은 그 방을 장난감 방이라고 부른다.
승대의 집과 철우의 집은 비슷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호사한 장식과 샹들리에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거실 한쪽엔 분수와 잘 꾸며진 실내정원이 있고 방이 여러 개 여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이젠 곧장 승대의 방으로 향하는 익숙함을 터득했다.
오늘 본 승대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다. 잔잔한 표현과 말씨는 투박하고 잔소리 투성이고 잔심부름 주문은 기본적 의무로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어머니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한 번은 식용유를 사 오라는 지시를 못 들은척하고 딴짓하며 버티는데 방 청소를 하다가 동작을 멈춘 어머니는 손에 든 걸레를 비행시켜 방 한 개와 거실을 지나 정확하게 내 뒤통수를 맞추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잔소리로 극성을 부릴 때는 잘못했으니 종아리 몇 대 맞고 끝내 주었으면 하는 말을 하고 싶을 만큼 닭살이 돋을 때도 있었다.
식구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승대네 집의 구조와 어마어마하게 일제장난감이 많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장난감 너무 좋아 하지마라"
예상한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우리 쩜도리 불총의 주인공 짝 나는 거 아니야"
아버지는 내가 첫돌이 지나면서 줄곧 이름대신 쩜도리 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별명이 내게는 익숙하고 그와 유사한 점탱이, 쩜씨 라는 표현방법으로 불러도 기죽거나 속상하지가 않다. 어쩌면 훗날 단체생활에서 놀림 받게 될 신체적 콤플렉스가 정신적 콤플렉스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처방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전에 볼에 있는 큰 점을 빼주자는 어머니의 제의를 할머니가 복점이라고 묵살시켰고, 그 후로 한 번도 내점에 대한 가족회의는 없었다.
지금도 내 친구들은 쩜씨라고 부르지만 아버지는 이젠 쩜도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빠 불총 주인공 짝 난다는 것이....."
"응 별거 아니야 그냥 아는 이야기야"
그날 아빠가 알려준 불총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박봉에 시달리는 어느 가난한 가정의 아들이 어느 날 총구에서 불이 나오는 큰 장난감 총을 사달라고 졸라댔고 가격이 봉급의 절반만큼이나 되는 비싼 불총을 사줄 수 없는 아버지는 호통을 쳤고 상심한 아들은 다시는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사달라는 불총이 늘 마음에 걸렸고 월급날 팍팍한 월급봉투와 어렵게 지내야 하는 한 달의 생활을 생각하며 괴로운 마음에 동료와 퇴근길에 술을 먹고 돌아오는 늦은 귀갓길에 동네 어귀의 땅거미가 밀려오는 언덕 위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다
한 아이가 언덕 위에서 불총을 쏘아대고 또 한 아이는 계속 언덕을 오르면서 총에 맞아 죽는데 죽는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고 안타까워서 다가가서 보니 바로 자신의 아들이어서 죽지 말라고 만류를 하자 열 번을 죽으면 한번 쏠 수 있는데 이제 한 번만 더 죽으면 저 불총을 쏠 수 있었다는 말을 했고 아버지가 막아서 무효가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우는 아이에게 앞으로 다시는 죽지 말라고 하면서 그 길로 아이의 손을 잡고 봉급을 틀어 그 불총을 사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승대네 집에 30만 엔이 넘고 내 키 크기만큼 큰 불총이 있더라는 사실을......
그날 밤
나는 우리 집 아파트 옥상에서 승대가 살고 있는 고급아파트를 향해 그 녀석이 가진 불 총보다 더 크고 좋은 불총으로 오랫동안 신나게 불을 품으며 쏘아대는 꿈을 꿀 수가 있었다.
김다호 : 1982년 도가니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회원 한성백일장,통일백일장 심사위원
송파문인협회 자문위원. 강서문인협회수석부회장.
시동인 가릉빈가회장 다시동인회장 前강서청소년회관 관장. 흥사단부이사장
시집: 경계에 서성이다. 말들이 고여 있다. 동인시집 오래된 습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