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쌀밥
이영백
“쌀밥 먹고 산다”는 것은 어쩐지 부자를 상징한 때도 있었다. 요즘은 쌀밥만 먹으면 각기병에 걸린다고 잡곡밥을 즐겨먹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쌀밥 즐겨 먹는 사람들은 한때 가난으로 이밥을 먹지 못한 무리일 것이다. 그 이밥이 쌀밥인 쌀로 지은 밥이기 때문이다.
이천 쌀밥은 전국 쌀 중에 왕에게 진상하였다고 하는데 출장 가서 한 번 사먹어 보았다. 확실히 밥맛이 좋다. 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으니 달착지근하였다. 구수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고, 쫀득하면서 알알이 살아있는 그 밥알이 내 입맛을 사로잡아 놀라게 하였다.
쌀밥하면 제사를 모실 때 메 짓는 것으로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특히 예전 쌀밥을 구경조차 못하던 시절에 제사 연 열두 번, 그때마다 지내고 나면 큰방 시렁 위 농에 올라가 있는 메는 언제 먹어 볼 수 있을지 기다려진다. 이틀인가 지나고 나면 드디어 상 위로 내려지는데 아버지 잡수면서 한 숟갈 떠먹여 주던 그 메는 평생 잊지 못한 쌀밥 맛, 그 맛이다.
그렇게 못살 때는 쌀밥, 쌀밥 하였는데 언제부터 쌀밥이 뒤로 밀려나게 되었던가? “통일벼”재배로 귀한 쌀이 흔한 쌀로 되면서 농촌에서 밀주라는 말이 사라지고 “농주(農酒)”를 담글 수 있는 시절로 바뀌게 되었다. 또 쌀밥 먹으면 각기병 생긴다고 잡곡밥으로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제 우리는 쌀밥이 아니라 건강을 생각하는 쌀밥을 굿바이 하면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제 쌀밥이 아니라, 건강하고 질로서 승부를 나누는 잡곡밥이 활성화된 것을 보고 흔히 안 먹어도 배부른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밥 심”으로 신진대사가 원활해진다. 근육양이 많은 젊은 층에 비하여 노화로 인해 체력소모가 심해짐에 따라 허기를 견디기가 힘들어질 때는 꼭 밥을 먹어야한다. 빵, 라면, 국수로는 안 된다. 밥 심으로 키워 둔 배는 밀가루로 부족하다. 쌀밥에 고기국물을 먹어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인의 체질을 버릴 수 없어서인가 보다.
나도 한국인이다. 지난 일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밥 심 기억으로 쌀밥을 찾게 된다. 결코 밀가루만 먹고 살 수 없다. 나는 밥 먹는 한국인이다.
오늘은 왠지 쌀밥이 그리운 날이다. 쌀밥 한 번 먹어볼까?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