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세워 변방을 안정시키다.)
<垦荒勘田兴修水利巩固新疆边防>
신강은 漢代에 둔전이 시작되어 唐代에 발전하였으며, 청대에 무르익게 되었다. 건륭제의 신강정벌 후 주요은 지역은 이리와 북 신강, 및 남 신강의 악수등지에 둔전이 성행하였으며, 병둔, 회둔, 죄수를 보내 둔전하게 하는 견둔, 민둔 등이 있었다. (그러나) 도광 년간에 장객이(짱거얼)의 반란이 발발하지둔전은 한 때 중지 되기도 하였다. 반란이 병정 된후, 카슈가르, 파얼추커 등지에 있는 둔전을 복구하였으며 임칙서는 당시 이리에 온 이후 바로 이리장군 포연태와 협조하여 대대적으로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심었다.
[新疆屯田始于汉代,发展于唐代,成熟于清代。乾隆皇帝统一新疆后,主要在伊犁和北疆,以及南疆阿克苏等地兴办屯田,有兵屯、回屯、遣(遣犯)屯和民屯。道光年间,发生张格尔叛乱,屯田一度停顿。叛乱平定后,喀什噶尔、巴尔楚克等地恢复屯田,林则徐到达伊犁后,立即协助当时的伊犁将军布彦泰垦田勘荒。伊犁垦田扩大耕种面积。]
이리장군 포연태는 한결같이 림칙서를 존경하였으며, 임칙서가 이리 근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차례나 군대를 보내어 그를 경호, 영접하였으며, 여러 위원회를 폐지시키고 하고 그가 군량을 담당하도록 지원했다. 군량과 말 사료의 관리는 이리주둔군의 중요임무였는데, 그는 포연태의 믿음과 신임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리개간을 맡게 되었다. 1843~1844년간, 임칙서는 이리 회원성 동쪽 아치우수의 버려진 땅 삼과수와 홍류완 일대의 3.3만, 아러푸스의 16.1만여 목의 전답을 개간하는 것을 주창하였다. (이에) 회민 571호, 한족 500호를 두었다. 아치우수 폐지는 현 이닝시 파얀따이 일대이다. 이리개간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림칙서는 포연태를 태자 태보함으로 봉하였으며 남 신강을 개간 하는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리개간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척되었으며, 남 신강의 개간 열기를 북돋았다. 도광제는 임칙서를 남강의 황무지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伊犁将军布彦泰一向敬重林则徐,他得知林则徐将抵达伊犁边界时,曾两次派遣兵丁前去迎接,还破例委以林则徐实务——执掌粮饷。军饷和粮秣是伊犁驻军的重要依托,林则徐深切地感受到了布彦泰的信任,承担了伊犁的垦田事宜。1843~1844年间,林则徐在伊犁倡导开垦了惠远城东的阿齐乌苏废地三棵树、红柳湾一带3.3万多亩和阿勒卜斯l6.1万多亩田地。安置回户571户,安置汉族民户500户。阿齐乌苏废地在今天伊宁市巴彦岱一带。伊犁垦田取得巨大成功,布彦泰被加封太子太保衔。不辞劳苦南疆勘田。
伊犁开垦成效显著,带动南疆掀起兴垦热潮。道光皇帝下令点名让林则徐到南疆勘荒。
도광 25년(1845)초, 림칙서는 어지에 따라 남신강에서 반 년동안 있었으며, 그 후에 쿠차, 오쉬, 악수, 호탄, 야르칸드(현 샤처), 카슈가르와 카라샤르(현 언기) 등의 7성을 개간하였고, 중간지점인 잉지샤[양기히사르]를 경유하여 남강의 변두리 8대 성의 60만여 목을 경작지로 바꾸었다. : 9월에는 투르판의 직할지인 투커쉰의 이라리커(현 이라 호)의 11만목, 10월에는 하미의 동타얼나씬(현 나씬 성) 6000만목도 포함된다. ]【註 1亩 : 6.667아르 현재 기준】
[道光二十五年(1845年)初,林则徐奉旨赴南疆,在大半年的时间里,先后勘查了库车、乌什、阿克苏、
和阗(今和田)、叶尔羌(今莎车)、喀什噶尔和喀喇沙尔(今焉耆)七城垦地,中经英吉沙,遍历南疆八大城,勘地60余万亩;九月间在吐鲁番所辖托克逊之伊拉里克(今伊拉湖)勘地l1万亩,十月间在哈密以东塔尔纳沁(今纳沁城)勘地6000亩。]
림칙서는 남강개발의 주요임무로는, 개간지의 실제 상황 뿐 만이 아니라, 더욱이 청 조정에게 황무지 개간 정책의 근거와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마의 몸을 이끌고 천산의 남북을 분주하게 오가며 수많은 곤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신강의 황무지 개간 임무를 성공리에 마쳤다. 또한 (청 정부의) 변방정책을 공고하게 하였다. 1845년 임칙서가 여단에게 보낸 서신에 ,“토지를 개간하여 인구를 늘리는 것이 바로 병방 정책의 최선이다. ” 라고 명시되어있다.
[林则徐南疆勘田的主要任务,除了解垦地的实际情况,更是为清廷制定南疆垦荒政策提供了真实的依据。林则徐扶病奔波于天山南北各地,克服了重重困难,完成了此次荒地勘察任务。他因地制宜,或招内地移民承垦,或让当地少数民族垦种。林则徐的上述活动,不仅充实了边地,而且还达到了巩固边防的目的。1845年林则徐写给汝舟的信中明确指出:“夫田亩欲招民户者,为边防计耳。”]
이리의 관개수로 수리는 백성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둔전에는 물이 필수인데. 아치우수의 버려진 땅은 , 본시 청 팔기군이 둔전을 하던 곳으로서 물의 부족때문에 버려지게 되었었다. 아치우수의 둔전을 복구하려면, 이리 하의 지류인 하쉬 하의 물을 끌어 와야 하는 엄청난 비용의 대규모 공사가 필요했다. 림칙서와 포연태는 지속적으로 계획을 수정보완하면서 시공계획을 결정하였다. 그 본인은 쇠약해진 몸을 돌보지 않고,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포연태에게 세부 증수계획과, 개간에 필요한 지원자금을 얻는 방안을 제안하였으며. 솔선하여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하쉬 하의 롱커우 보수를 지원하였다. 롱커우 공사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 하쉬 하의 옛 롱커우 부근의 실측조사를 하였으며, 그 거리는 정확히 6km,로 이는 공사의 가장 중요한 사업 이었다.
도광 24년(1884년)5월에 시공하여, 9월에 완공하였으며, 소요시간 4개월, 비용 20만량, 매일 평균 인부 760명이 동원되었다. 공사의 어려움에 대하여 그는 “직접 와서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고 하기도 하였다. 림칙서는 또한 신강의 다른 지역에서 관개수로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신강의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카레즈를 개수하고 확장시켰다. 《하과기정》 《회강죽지사》《을사일기》등의 저서가 있고, 그 외에도 《임문충공정서》《임칙서집》이 있다.
伊犁修渠造福百姓。要屯田,就要有水源。阿齐乌苏废地,原来是八旗兵屯田的地方,因水源不足而废弃。重垦阿齐乌苏废地,必须引伊犁河支流哈什河之水,工程规模巨大,花费甚多。林则徐与布彦泰反复筹划,确定施工方案。他本人拖着衰弱之躯,以极大热忱,主动向布彦泰提出分段承修、出资认捐阿齐乌苏垦地的要求。林则徐带头捐修了最重要、最困难的引哈什河水的龙口工程,龙口工程的具体位置,经考察在哈什河老龙口附近。龙口工程正好六里多长,这是整个引水工程的关键部分。道光二十四年(1844年)五月兴工,九月完成,费时四个多月,用工二十万有零,平均每日有760人。工程之艰巨,“非亲临其境者,不得而知”。林则徐还在新疆的其他地方修建了很多水利工程,把新疆劳动人民使用的“坎儿井”加以改进推广。
《荷戈纪程》《回疆竹枝词》《乙巳日记》;另外著有(林文忠公政书》《林则徐集》。
[http://www.ts.cn/special/jinrixinjiang/201012a/2011-01/06/content_5511651_2.htm]
윗글은 중공의 한 사이트에서 가져와 번역한 글인데, 림칙서의 新疆개간에 대한 주 내용이다. 그런데 윗글에 의하면 귀양이나 마찬가지 인 신강에서 정부의 엄청한 지원을 받는다. 이것은 사실 이 지역은 청나라 정부의 영향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넓은 지역에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하여도, 귀양을 간 처지로 이러한 대규모의 공사를 주도할 수 있냐하는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가 1849년에 신강을 떠난 후 그지역에는 야꿉벡 정권(1864-77)이 들어서며, 림칙서는 1850년 태평천국을 진압 도중 길에 사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좌종당이 천경을 함락하고 제일 먼저 쳐들어 간 곳이 그곳이다. 왜 그랬을까. 신강은 조선 조종의 기업이라 한 어느 누구의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