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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사(三省祠)
위치 :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6번지 삼성골 건립 2004. 11
순흥안씨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의 고손자인 세현공(世賢公) 후손은 죽전리 삼성골(三省洞)과 모약골(舞鶴洞)에 살고 있는데 삼성골 소종중에서 세운 사당이다.
세현공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구(龜), 손자 윤조(允祖), 증손 장사랑(將仕郞) 탁(琸), 고손 의정(義貞), 6세 신립(信立), 7세 대려(大梠), 8세 명익(命翊), 9세 지택(知宅), 10세 태수(台壽), 11세 응성(應成), 12세 처빈(處彬)까지 배향하여 음력 10월 6일과 8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子
안린(安麟)
1派13世-양공공파
통덕랑(通德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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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순흥안공 휘린 묘갈명 병서
위치 : 우록3구 갈골 이장산
옛 문의면의 서쪽 노동(갈골)에 있는 주봉의 동북쪽 언덕에 높이 네 자 되는 무덤이 있는데 곧 통덕랑 순흥 안공 휘 린의 묘소이다. 그 시조를 논한즉 고려 상호군 휘 자미가 순흥에서 기틀을 창건하시고 세 번 전하여 휘 향 시호 문성이 도학을 열어 밝히셔서 문묘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문순과 문숙과 문혜공이 대대로 이어져 나왔으니 이를 삼군사문의 가문이라고 일컫는다.
문혜공의 아들인 양공공 휘 조동은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이었는데 숭인의 재화에 크게 부르짖고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곧 파조이신데 공에게 오세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인강인데 수의교위 중군사조이시고, 증조의 휘는 우효인데 사과이시며, 조부의 휘는 철중으로 수의부위사맹이시고, 부친의 휘는 세현이신데 통정대부로서 진천현감을 지내셨고, 모친은 숙인으로 단천허씨 륜의 따님이시다.
공은 여기에서 태어나시고 여기에서 장사지내셨으니 생각건대 이것은 진실로 공이 남긴 가르침이다. 벼슬은 5품을 받았으나 영예와 빛남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굳게 동쪽 언덕을 지켜서 스스로 숲과 샘을 사랑하였으니 오직 이것으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며 수신제가와 효성스럽고 우애 있음을 평생의 행하고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공의 덕의 의로움으로써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져야할 것이지만 기나라와 송나라처럼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증명할 수 없으니 아마도 이것은 전란이 여러 번 겹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노라. 아아 애석하도다.
부인인 공인 경주김씨는 쟁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희는 예안김씨에 장가들어 아들 곤과 붕을 낳았고, 윤조는 숙부인 구에게 출계하였다. 봉조는 예안김씨를 맞아 아들 홍과 안을 낳았다. 곤의 아들은 응주와 응구가 있으며 딸은 이인길에게 시집갔다. 붕의 아들은 응두이고 홍의 아들은 응천이며 안의 아들은 응복인데 나머지는 번잡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하루는 후손 준호, 승준, 원모, 원근, 순근 등이 나를 대전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선조의 묘역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다 닳고 갈라져서 이제 장차 고치고 수리하려고 하는데 동족께서 옛 족보에 의거하여 서술하여 후손들이 오늘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백 세 동안 이어온 한 집안의 우의이니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전하는 말씀에서 대략 기록하고 또 문서를 살펴서 기록하여 이에 명을 짓노라. 명에 말한다.
높도다 저 주봉이여. 오직 공의 묘소로다. 능히 선조의 가르침을 따라서 출세하여 드날림을 일삼지 않았으며 선조를 봉양하고 후손에 드리워서 효성스러움과 우애가 이어져 전하며 진실로 숲과 샘을 지켰으니 그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
십여 세대를 이어오며 후손들이 매우 많게 되었으니 이것을 곧은 옥돌에 새겨서 길이 만년토록 보존하리라. 신미년 정월 하순에 후손 승춘이 삼가 찬하고 아울러 쓴다.
通德郞 順興 安公麟 墓碣銘 幷序
舊文義西蘆洞 冑峰坐艮之原 有崇四尺而封若堂 斧者 乃通德郞 順興安公 諱 麟之幽藏也 論其始祖 則高麗上護軍 諱 子美 創基順興 三傳 諱 珦 諡文成 倡明道學 腏祀聖廡 文順 文淑 文惠 繼世聯綿 稱三君四文之家 文惠子有 良恭 諱 祖同 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崇仁之禍 大呼殉節 寔爲派祖 於公五世也 高祖 諱 仁剛 修義校尉中軍司正 曾祖 諱 友孝 司果 祖 諱 哲童 修義副尉司猛 考 諱 世賢 通政大夫 行鎭川縣監 妣淑人 丹川許氏 倫女 公之生於斯 葬於斯 想是良公遺旨也 則官受五品而不喜榮耀 固守東崗而自愛林泉 惟以承先裕後 修齊孝友 爲生平行治之本 以若公之德之義 承習庭訓者 宜有家傳於後 而杞宋莫徵 恐是兵燹之屢經故歟 噫其可惜也 齊恭人慶州金氏錚之女 擧三子 允禧娶禮安金氏 生子鵾鵬 允祖出后父龜后 奉祖娶禮安金氏 生子鴻鴈 鵾子應龜應桂 女適李仁吉 鵬子應斗 鴻子應天 鴈子應福 餘煩不錄 日其后孫 俊鎬 承俊 元模 元根 淳根 訪余大田僑舍曰 先祖墓儀 世久磨泐 今將改修 族其依譜而述之 以爲後孫之追想 今日 則幸矣 其在百世一室之誼 豈敢以不文辭 諸畧記所傳之說 又接牒而錄之 仍爲之銘
銘曰
屹彼冑峰 維公幽藏 克追先旨 不事立揚 奉先垂後 孝友繼傳 固守林泉 知德者鮮 歷十數世 雲仍兟兟 鐫此貞珉 永保萬年
歲辛未元月下浣 族裔 承春謹撰竝書
子
안귀(安龜)
1派13世-양공공파
통덕랑(通德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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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순흥안공 휘구비문
위치 : 죽전3리 삼성골
통덕랑(通德郞) 안공 휘 구(安公 諱 龜)는 순흥인(順興人)으로서 고려 흥위위보승별장(高麗 興威衛保勝別將) 휘 자미(諱 子美)의 13世孫이요 성리학(性理學)을 도입(導入)하사 유교(儒敎)를 흥왕(興旺)시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신 문성공(文成公) 휘 유(諱 裕 後諱 珦)의 10世孫이요 이조(李朝)로 국체변혁시(國体變革時) 숭인문화(崇仁門禍)를 당하여 순절하신 양공공(良恭公) 부제학 휘 조동 (副提學 諱 祖同)의 6세손이요 진천현감(鎭川縣監)의 교지(敎旨)를 받고서도 선조(先祖)의 충절(忠節)을 사모(思慕)하여 불사(不仕 벼슬하지 않음)하시고 식죽이완상(植竹而玩賞 대나무를 심고 감상)하시어 죽전리(竹田里)라는 지명이 생기게 하신 휘 세현(諱 世賢)과 단천허씨간(丹川許氏間) 탄생(誕生)하신 차자(次子)로서 조(祖)는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철동(諱 哲童)이오 증조(曾祖)는 사과(司果) 휘 우효(諱 友孝)요 현조(玄祖)는 우군사정(右軍司正) 휘 인강(諱 仁剛)이오 배 공인(配 恭人) 밀양박씨지묘(密陽朴氏之墓)는 개영치(開榮峙 갱치) 후록(後麓)에 해좌(亥坐)로 별장(別藏)모셨는데 자(子)는 형 휘 린(兄 諱 麟)의 차자(次子) 휘 윤조(諱 允祖)를 맞아 손(孫)에 삼형제(三兄弟)를 두었으니 장(長)이 장사랑(將仕郞) 휘 탁(諱 琸)과 차(次) 휘 박(諱 珀)과 삼(三) 휘 서(諱 瑞)를 두어 증현(曾玄) 이하(以下) 불록(不錄 다 적을 수 없음)이나 자손(子孫)들이 죽전(竹田) 대박(大朴), 삼성(三成) 등지(等地)에 번연총거(蕃衍叢居 번창하여 한 곳에 모여 삶)하는 중 종재(宗財)로 표갈(表碣)을 세우게 되매 그 내력(來歷)을 기록(記錄)치 않을 수 없어서 비재천학(非才薄學)으로 찬양(贊揚)의 글을 꾸미지 못하고 다만 보첩(譜諜)에 의해서 높으신 음덕(隱德)과 청백(淸白)만을 찬술(撰述)하여 선조(先祖)의 유덕(遺德) 기리는 데 그칩니다.
단기 4313년 경신 2월 15세손 승갑 근찬 종손 승준 근서(檀紀 4313年 庚申 2月 日 15世孫 承甲 謹撰 15世 宗孫 承俊 謹書)
안탁(安琸)
1派15世-양공공파
장사랑(將仕郞)
안탁(安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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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랑(將仕郞) |
장사랑공 휘 탁 비문(將仕郞公 諱 琸 碑文)
위치 : 우록3리 갈골 이장산
고남산(高嵐山) 아래 갑좌(甲坐)의 언덕은 곧 이십삼세조이며 장사랑(將仕郞)을 지내신 휘 탁 부군(諱琸府君)과 부인 단인 공산이씨(端人公山李氏)의 묘소이다. 우리 순흥안씨는 고려에 상호군(高麗上護軍)이셨던 휘 자미(子美)로부터 시작하여 4대 뒤에 휘 향(珦)이고 처음의 휘는 유(裕)이며 호는 회헌(晦軒)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신 분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크게 밝히고 학문을 일으키며 장학금을 설치하셔서 가르치고 기르며 어진 이를 양육하여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에 배향되시고 동방 도학(東方道學)의 조(祖 시조)라 일컬으니 이분이 공의 십이대조이다.
무진(戊辰)년 숭인문(崇仁門)의 화(禍)에 크게 부르짖고 순절하신 휘 조동(祖同)이고 시호는 양공(良公)이며 봉의대부 예문관 부제학(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을 지내신 분이 팔세조이다.
진천현감(鎭川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덕을 숨겨 나아가지 않으시고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추고 자손을 가르치시며 전원에 대나무를 심어놓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기시어 죽전(竹田)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하신 휘 세현(世賢)이 증조이시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신 휘 귀(龜)가 할아버지이시다.
큰아버지 휘 린(麟)의 차남으로서 출계하신 아버지는 휘 윤조(允祖)이시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인데 윤조(潤祚)의 따님이시다. 아들은 휘 의정(義貞) 이고 손자는 휘 신립(信立)이며 증손에 휘 대려(大梠)와 대운(大橒)이 있는데 삼성(三省)과 무학(舞鶴)의 두 파로 처음 나누어져 자손이 번창하여 모두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었다.
아아 선조께서 굽히지 않고 절의만 숭상하여 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뛰어나고 지조있는 행위와 효성과 덕의 감화가 이웃 고을까지 만세토록 전하는 공의 산소 앞에 비석이 없음을 개탄한 나머지 돌을 세워 표시할 때 불초는 듣고 아는 것이 소박하여 위대한 공과 업적을 낱낱이 칭찬하여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족보의 세계에 의하여 전말만 간략하게 기록하여 백세 뒤를 준비하노라
단기 4315(1985)년 임술년 정월 13세손 승갑 근찬
將仕郞公 諱 琸 碑文
高嵐山下 甲坐之原은 迺我十三世祖 將仕郞諱琸府君과 配端人 公山李氏 衣履之藏也라 我順興之安이 高麗上護軍 諱子美로 四傳諱珦初諱裕號晦軒 諡文成께서 性理學을 倡明興學置贍學錢訓育養賢하사 聖廡에 腏祀東方道學之祖라 稱하니 寔公의 十二世祖요 戊辰年 崇仁門禍에 大呼殉節하신 諱祖同諡良恭 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이 八世祖요 鎭川縣監을 除授받고 隱德不就林泉에 遯跡子孫을 敎誨하고 田園에 種竹하야 琴書로 自娛하시어 竹田이란 村名이 생기게 하신 諱世賢이 曾祖요 通德郞 諱龜가 祖요 伯考諱麟의 次男으로서 出系하신 考는 諱允祖시며 妣禮安金氏는 父潤祚의 女이시다 子諱義貞 孫諱信立 曾孫에 諱大梠大橒하야 三省舞鶴兩派로 始分 雲仍이 繁衍 叢居成村하였으니 噫라 先祖不屈의 節義만 崇尙 비록 不就宦路 하였으나 卓操之行과 孝德感化가 隣邑까지 萬世傳하시는 公의 墓前에 顯刻이 없음을 慨歎한 나머지 竪石以表之할새 不肖聞識이 素朴하여 偉功業績을 一一이 贊揭치 못하고 다만 依據譜牒世系顚末만 略記하여 備后百世하노라
檀紀 4315년 壬戌年 正月日 十三世孫 承甲謹撰
진천현감공묘소
세현공은 사직공의 맏증손으로 비는 통훈대부행진천현감세현지묘(通訓大夫行鎭川縣監順興安公諱世賢之墓)라고 쓰여 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시동리에 있으며 단기 4310년(1977) 2월 그믐 15대손 승갑(承甲)이 글을 썼다. 배위는 단천허씨로 산소는 죽전리 삼성골에 있다.
세현공은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현도면 죽전리에 자리를 잡고 후세를 가르칠 때 조정에서 진천현감(종6품, 군수)을 제수하였으나 마다하고 전원에 대나무를 심고 은둔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여 살던 곳을 대밭, 즉 죽전리(竹田里)라고 하게 되었다. 세현공 후손은 현도면 죽전리 삼성골과 모약골, 충남연기군 동면 합강 등에서 번성하였다. 안희정 충청남도지사도 세현공의 죽전리 모약골파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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