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폭풍의 8월
1991년 8월 16일, 가스공업부 장관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긴박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주요 송유관 및 유류저장고 관리병력이 신원미상의 병력으로 급하게 교체되었고, 하필이면 이 모든 것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요양과 함께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새벽바람부터 호출을 받은 알렉세이 메스너, 아미나트 나가이, 안드레이 사사노프는 람스도르프의 아파트에 모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정보를 전달받자마자 '급변사태', 즉 쿠데타 음모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챘죠. 조사 결과 주동자는 얼굴마담이자 대표격인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무력을 담당하는 드미트리 야조프 원수(국방장관)와 올렉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정보부문의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KGB 의장, 그리고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을 비롯한 각급 각료들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신임했던 측근들이 모두 대통령의 노선에 비토를 날리며 쿠데타까지 일으키려는 이 초유의 사태에 모두들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충격에만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우선 람스도르프 부부와 3인방은 "어떻게 마무리되든 사태가 내란으로 비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고르바초프를 도와 쿠데타 음모를 조기에 분쇄하거나, 아니면 쿠데타를 무조건적으로 '깔끔하게' 성공시켜서 마치 흐루쇼프의 실각 때와 같은 합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정권교체를 이뤄내는 것이었죠. 또한, 3인방의 공통된 의견은 "옐친과 같은 이가 정권을 어부지리로 탈취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SFSR의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한때 람스도르프의 술친구였으나, 특유의 대중영합적인 성향과 지도자감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함이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는 쿠데타에 저항하는 인민의 힘을 믿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나 람스도르프와 사사노프는 "애초에 인민들이 모두 알아챌 정도로 사태가 커진다는 것 자체가 연방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반대입장을 취했죠. 결국 아미나트의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연락을 취해 쿠데타에 가담,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오후께 접견을 받은 쿠데타 음모가들은 일행들을 은근히 위협하며 "당신들이 무얼 해줄 수 있는가"를 물어왔습니다. 이에 메스너는 '리즈코프 전 장관회의 주석을 끌어들여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회답했죠. 사사노프와 아미나트의 부연설명은 덤이었습니다. 마무리로 람스도르프가 실제로 리즈코프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행은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을 포섭하면서 계획이 유출되기 직전이었던 터라, 실행은 급격히 앞당겨졌습니다. 작전은 간단했습니다. 사사노프가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체류중인 옐친을 '처리'하고, 아미나트가 '혹여 고르바초프에게 충성하며 저항할 수 있는' KGB 알파 그룹의 개입을 막아내고, 메스너는 크림반도 별장의 고르바초프를 압박해 대통령직 사퇴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러한 밑작업 하에서 야나예프와 크류치코프, 람스도르프, 야조프 등은 소수 병력과 함께 모스크바로 향해 중앙위원회를 소집, 대통령 유고사태를 발표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꾸리는 것까지가 계획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계획은 거의 완벽하게 달성되었습니다. 옐친은 음주운전 중 트럭에 치여 사망, 고르바초프는 '건강 상 이유'로 퇴진을 결정했고, 알파 그룹은 그대로 막사에 남았죠. 물론 그 와중에 옐친이 사고에서 잠깐이나마 살아있었다던가, 고르바초프의 경호원들을 KGB 경호병력이 제압해야 했다던가 하는 몇몇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목표는 완전히 달성되었습니다.
8월 17일 낮이 밝았습니다. 고르바초프가 급성 신부전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는 소식, 그리고 보리스 옐친이 카자흐스탄에서 음주운전 중 트럭과의 추돌사고로 후송된 지 4시간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모스크바를 강타했습니다.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은 즉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람스도르프, 리즈코프와 함께 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야나예프는 대통령에,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는 부통령에, 리즈코프는 국무총리에, 그리고 람스도르프는 외무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외에 야코블레프, 리가쵸프 역시 입각하여 자리를 채웠습니다. 야블린스키는 불법 수뢰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재빨리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신연방조약의 처리를 논의해야 했습니다. 아미나트의 의견에 따르면 이 조약은 인민대표회의의 비준을 거치지 않아 법적 정당성이 없으며, 따라서 발효시켜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이 의견에 동조했죠. 다만 공화국들의 불만을 잠재울 다른 방안을 반드시 생각해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안으로 제기된 것은 놀랍게도 "소련 자체의 민주화"였습니다. 심지어 보수파이자 강경파, 냉혹한 정치현실주의자 야조프마저 신연방조약을 대체할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다는 점에 동감했습니다. 1949년의 독일민주공화국(동독) 헌법을 모델로 한 의회민주주의, 다당제, 양원제, 내각제 신헌법이 채택되었고, 전연방공산당은 기타 좌익정당과 사민주의자들,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인민전선을 꾸렸습니다.
물론 총선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넘어야 할 언덕은 꽤 여러가지였습니다. 특히 첫 번째로,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가 이끄는 자유민주당(LDP)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문제였죠. 특히 두긴 등의 대러시아주의자들, 베레좁스키 등 올리가르히들, 예고르 가이다르를 필두로 한 급진 시장주의자들, 그리고 레베드 상장 등 옐친 편을 들던 군부 인사들까지 자유민주당에 속속들이 모이면서 이들이 최악의 경우 제1당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불안심리가 커져갔습니다. 아미나트의 보고서에 따라 당은 대응방안을 강구한 끝에, 자유민주당을 탄압하기보다는 자중지란을 일으켜 일단 극우주의자들을 고립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이다르와 베레좁스키는 사사노프 등의 도움을 받아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CfD)'이라는 정당을 새로 만들었고, 잔존 자유민주당은 총선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또한 그루지야 문제가 부각되었는데, 그곳의 실권을 잡은 즈비야드 감사후르디야가 서방의 지원을 받고 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등을 불법점거, 캅카스 전체에 독립압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메스너는 감사후르디야가 (서방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인권운동가가 아니라 또 다른 인권탄압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뒤, 당에게 보고하고 이를 전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결국 서구세력은 더 이상 대놓고 그를 지원할 수 없었고, 곧 반-감사후르디야 쿠데타가 발생해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전 연방 외무장관/부총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루지야가 연방 잔류 쪽으로 가닥을 잡자 중간에서 간을 보던 아르메니아가 연방 잔류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몰도바 역시 "독립 후에도 국가연합을 유지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발트3국은 그대로 독립했지만, 적어도 소련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NATO에 가입하는 일은 근시일 내 일어나지 않을 듯 합니다.
1991년 11월 7일(혁명기념일) 치러진 초대 자유총선의 결과 공산당이 여전히 단독과반을 차지, 인민전선 전체로 확장한다면 단독개헌선까지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자유민주당은 몰락했고, 그 대신 니나 안드레예바 등이 이끄는 극좌세력(마르크스주의-볼셰비키공산당)이 스멀스멀 세를 키웠습니다. 가이다르와 체르노미르딘, 베레좁스키의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은 제1야당이 되었죠. 사사노프의 노력으로 공산당과 정교회 간의 협력관계 역시 돈독해졌고, 이는 사회의 안정성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4년간 정국은 안정을 찾을 것입니다.
02. '국지적' 분쟁
총선 이후 신정부가 꾸려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맹'은 서쪽으로 다시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피곤한 우방'인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신유고연방)가 크로아티아도 모자라 보스니아에서까지 무력사용을 감행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죠. 보슈냐크(무슬림)인, 크로아트(가톨릭)인, 세르비아(정교회)인들이 이리저리 얽혀사는 보스니아에서 종족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정부는 세르비아를 도와야 하는 지 자체에 대한 회의와 고심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우리 개새끼"라며 지원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야조프를 비롯한 일부 강경파에 국한되었죠.
그렇게 해서 제시된 선택지는 총 3개였습니다. 하나는 야조프의 '세르비아 지원', 두번째는 메스너의 '대서방 협력 및 몰타협약 명문화' 안, 그리고 세번째는 람스도르프의 'UN안보리 제재 주도'안이었죠. 장시간의 토론 끝에 결국 채택된 것은 람스도르프의 안건이었습니다. 결국 소련의 제안으로 서방 국가들과 주요 강대국들, 교전당사자들은 터키 이스탄불에 모여 대안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당초 미국은 NATO 단독 군사작전을 통해 구유고 전체를 친서방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소련 쪽에서 "OSCE 위탁"안을 꺼내들며 이 또한 무산되었습니다. 게다가 적절한 언론공작과 친인권행보(?), 간접적인 서유럽 우대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이 소련의 안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 미국 역시 공동개입을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은 소련 측의 적극적인 언론플레이로 인해 "밀로셰비치랑 크게 다르지 않은 전쟁범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상태였기 때문에 UN 차원의 개입에 적극 협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항전을 택했고, 결국 일가족이 Tu-95의 융단폭격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악행의 대가를 치렀죠. 개입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48시간만에 세르비아의 모든 방공망을 무력화시킨 다국적군은 2달 정도의 평정작전을 실행하며 분쟁지역을 일단 안정화, '더블린 합의'를 채택해 유고 연방을 완전히 해산했습니다. 보스니아에는 UN 고등판무관사무소가 자리잡아 약 35,000명의 상주 평화유지군 병력을 통해 민족분쟁을 관리하게 되었고,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 소련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더더욱 친서방노선을 견지했죠. 아무튼, 발칸 분쟁은 이렇게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단'은요.
발칸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3인방은 각자의 일에 매진했습니다. 사사노프는 오래 끌어온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평화 회랑' 정책과 적극적 이주지원, 에너지 교류협력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아미나트는 가스공업부를 생활협동조합 방식으로 전면 개편해 사실상 에너지 부문의 독립된 기관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가스코프(Gazkoop)'를 출범시켰습니다. 메스너의 경우 다음 대선 승리가 유력한 클린턴 대선캠프 측에 접근, 외교안보참모인 조셉 바이든 상원의원을 제1목표로 한 대대적인 로비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민주당 리버럴들은 소련과의 협력과 대중국 견제를 주장하기 시작했죠. 이는 이후 꽤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습니다.
-------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외무장관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연방 외무부 제1차관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0)/경영(2)/호신(0)/조사(2)/위조(2)/선전(2)/공작(2)/화술(4)/장악(2)/압박(4)
- 트레잇:
#회색빛 나라의 신사: 그는 서구권 국가들의 협상창구입니다. 미국 및 서구권 국가들에 대한 우호적 협력 제안에 +2, 권위주의 체제의 구 동맹국에 대한 협상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연방 환경에너지청 제1서기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1)/조사(2)/위조(3)/선전(1)/공작(0)/화술(2)/장악(3)/압박(0)
- 트레잇:
#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공화국간우호협력위원회 차석위원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5)/경영(1)/호신(0)/조사(3)/위조(0)/선전(0)/공작(2)/화술(4)/장악(2)/압박(0)
- 트레잇: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국가 상태창.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맹(Union of Soviet Sovereign States)
- 사회 안정성 : 6(양호함)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공화국 단결도: 7(괜찮음)
: 낮으면 분리독립 시도가 빈발함.
- 정권 지지도 : 5(보통)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7(잠재적 협력대상)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3) / 중국(3)
@렌지파일 고난의 행군에서 저상황이었음 진짜 전면전 벌어졌을테니.
지금은 잘하면 군사도발선에서 끝낼수도...
@렌지파일 그나마 식량은 있는게 다행이네요 ㅋㅋㅋ... 이 상황에서 자연재해 터지면 어후야...
@931117 그럼 반북 드림팀이죠 뭐(...)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때도 그렇고, 천하의 중국도 북한이 대놓고 선제도발하면 직접개입은 못합니다. 근데 미·소가 한국 편이면 뭐.. 외교 말아먹은건 자기네 탓이고요.
@E.E.샤츠슈나이더 1995년 일본 중의원 선거 결과.
@렌지파일 어차피 가만 있음 망할거 걍 일벌이고 뒤지자!라는 마인드가 없길 바랄뿐입니다...
@dear0904 고난의 행군도 이제 곧 시작이죠. 자연재해는 못 막으니...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북한이 어떻게 했길래 중공 사업가들이 짐싸서 귀국하는거에요? 단교라도 선언했나?
@카라멜 마끼아또 어... 140조를 투자했는데, 이문이 안 나오는 시장을 잡고 있는 민간 사업자는 없을겁니다.
@카라멜 마끼아또 말 그대로입니다. 야심차게 공동투자사업을 시작했는데 북한 시장이 붕괴하고... 대홍수로 기껏 깔고 있던 인프라들이 싹 날아가고 배급경제도 ㅈ망하는 상황에서는 얼른 손절해버려야죠.
@카라멜 마끼아또 사업이 되어야 사업을 하죠(?)
@E.E.샤츠슈나이더 샤오나이:
"여긴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알바니아보다 심각한거냐...? 라코시 마차시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양반이었네!"
@E.E.샤츠슈나이더 신생당은 이럴거면 그냥 자민당 들어가지 왜저런데요 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추신 : 피라미드는 아직 터지지 않았다.
@dear0904 다행히 독립국가연합으로 조기에 거둔 덕에 피라미드까지 끌어들이면서 무리하게 자금 끌어올 필요는 사라졌습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그거 참 다행... 교육만 잘하면 해결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