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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0
창세기 11:27-32
데라의 족보
- 여섯 번째 톨레도트 -
네 번째 톨레도트를 통해 노아 아들들의 역사를 보여주셨다면 다섯 번째 톨레도트로 셈의 족보, 즉 셈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가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여섯 번째 톨레도트로 아브람을 통해 언약을 이어가실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다. 그것을 이미 5장 “아담의 계보”(두 번째 톨레도트)에서 이미 상고하였던 바와 같이 우리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지만 4장에서 가인의 후손을 “낳고”라고 할 때는 ‘칼동사’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단순 능동태’이다. 그러나 5장의 “낳고”라는 표현은 ‘히필동사’로 ‘사역 능동태’인데 다섯 번째 톨레도트인 “셈의 족보”에서도 “낳았고, 낳았으며”라는 표현이 ‘히필동사’로 표현된다.
단순 능동태는 단순한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인에 의해 후손을 낳는다는 의미로 부모에 의한 동물적 출산이라고 할 수 있고, 사역 능동태는 하게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한 은혜적 출산이다. 죽음의 족보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내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런 점에서 다섯 번째 톨레도트는 언약의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 역시 “지내며”(13, 15, 17, 19, 21, 23, 25절)라는 말인데 히브리어로 ‘하야’이다. ‘~이 되다, ~이 일어나다, ~이 발생하다, ~이 살아나다’라는 뜻이다.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는 말씀에서 “생령이 되니라”라고 할 때 ‘네페쉬 하야’라는 표현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라는 말씀은 단순히 세상을 살면서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고 살려내신다는 의미이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로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히신 것이다(참고 겔 37:1-6). 대신 5장 아담의 톨레도트에서는 분명히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셈의 톨레도트에서는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없다.
그렇다면 26절에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셈의 톨레도트에서 보통 30세 즈음에 후손을 얻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데라가 70세에 세 아들을 낳았다는 말인가? 아니라면 세쌍둥이인가? 27절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라고 하였고 28절에서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29절)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았을 때 “나홀”이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을 했으니 “하란”이 맏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데라가 낳은 아들의 순서는 ‘하란 – 아브람 – 나홀’이 된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서는 ‘형제’라는 ‘아흐’를 나홀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의 “동생”이라고 번역하였다(24:15, 27, 48). 본문의 족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22:20-22에 보면 나홀과 밀가 사이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라고 언급한다. 이 언급은 브두엘에게서 라반과 리브가가 태어나는데 리브가는 언약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되는 배경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아브람은 데라의 맏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래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30절)라고 암시를 준다. 약속의 아들이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셈의 톨레도트에서 “지내며”(13, 15, 17, 19, 21, 23, 25절)라고 표현했던 그것이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자식이 태어나고 후손이 자연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26절)라는 표현이다. 노아의 아들들의 톨레도트에서 70명을 언급한 것을 생각해 보면 많은 민족으로 상징되는 ‘70’이라는 숫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아브람을 칠십 세에 주신 것으로 나타내었다(데라가 하라는 70세 이전에 낳았으나 나홀은 70세 이후에 낳은 것이다).
아무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절)라고 말씀한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는데 그것이 이유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데라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을 한다. 적어도 여기까지 주거지를 옮기는 일에 대해 주도권은 데라가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데라는 하란에 머물러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 부분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조금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말씀한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수 24:2-3)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차지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론하면서 한 말이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일에 예외였다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나 데라나 다같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드라빔”(히, ‘테라핌’ : 복수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가족 우상으로 추정된다)이었을 것이다(31:19, 34-35). 드라빔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제거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우상으로 계속 언급된다(삼상 15:23, 왕하 23:24, 슥 10:2).
데라가 가족들을 이끌고 어떻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강론한다.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우상을 섬기는 데라의 가족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바벨탑으로 인간들의 이름을 내고 성읍을 확장하여 하늘에 닿아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의 죄성과 대조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는 것을 통해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해 언약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대목이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데라가 아브람을 70세에 낳았고(26절)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으므로(12:4), 그때 데라는 145세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아버지 데라는 살아 있었고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흔히 말하듯이 아브람은 데라가 죽었기 때문에 하란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가 살아 있을 때 하란을 떠나야 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아브람에게 주신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창세기의 기록 형식이 어떤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다가 다음 인물을 통해 언약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앞의 인물에 대한 생애를 먼저 죽음으로 정리한 후에 다음 언약의 인물을 구체적으로 진술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라고 하였을 때 ‘아포드네스코’를 써서 영적으로 죽었기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기록하였다.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 연대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2305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요셉의 시신을 애굽에 두신 깊으신 그 뜻은?
이땅에서~
죄 가운데 내 죽음을 확인하게 하시며,
언약의 땅.하나님 왕국만이 참 생명됨을 알게 하시고,
언젠가 내 육신의 장막을 벗는날,
하나님 왕국에서 누릴 그 은혜를 사모하게 하심이라.
오늘도 복음으로 확인 되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 감탄! 감복! 합니다.
같은 하나의 말로 진리를 나눌 수 있음이
늘 위로가 되고 자극이 됩니다~
공감해 주시고 감동을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